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96화 (96/183)

52. 보일러 (1)

전쟁이 시작된 지 2년하고도 8개월이 지났다.

전쟁 전만 해도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산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현실은 달랐다.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정부는 여전히 존재하고 여기저기 수많은 사람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다.

하지만 슬슬 모든 것이 한계에 부딪히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통틀어 가장 완벽하게 대비했다고 자부하는 이 박규 조차 요즘은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건 군단파나 몬스터만이 아니다.

외적은 생존을 위협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생존이란 건 매일의 일상을 포함한다.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물자가 필요하다.

게임에 비유하면 HP와 같다고나 할까.

게임 캐릭터의 HP가 0으로 변하면 죽는 것처럼 우리 멸망주의자도 물자가 다 떨어지면 죽는다.

전통적으로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는 방식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약탈과 수집이다.

약탈 쪽은 내 스타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디펜더 퇴출 사건 때 알 수 있듯이 모두가 레벨 업을 했다.

만만하게, 집구석에 앉아 당해줄 놈은 이미 다 죽고 없어졌다는 소리다.

만만한 건 수집이다.

점잖게 표현해서 수집이지, 정확히는 스케빈징이다.

누군가의 버려진 집이나 시체 같은 걸 뒤져서 물자를 얻는 방식이니.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은 전쟁 전에는 선택지에 없었던 방식이다.

하지만 멸망이 장기화되고 사람들의 생명력이 의외로 질기다는 게 입증되고 있는 현재, 조금은 나도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계기를 제공한 건 레베카였다.

*

사람이 필요로 하는 물자는 여러 개가 있겠지만 결국 큰 틀에서 보면 의식주라는 전통적인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선, 식량 문제는 그럭저럭 양호하다.

냉동 식량을 거의 보존식으로 바꿨고 또 나도 소일거리 삼아 내 영역에 드문드문 경작을 하고 있다.

김노인이 넘겨준 모종을 비롯해 내가 기존에 비축해둔 것들을 곳곳에 심어 수확하는 게 나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다.

다만 나의 농장은 불규칙적이다.

디에스이라에나 다른 농업에 재주가 있는 친구들처럼 정사각형 네모난 정방형 밭에 갖가지 작물을 집약적으로 심고 수확하는 묘기를 부리는 대신, 나는 곳곳에 드문드문 씨앗을 뿌렸다.

내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경작지가 밭처럼 보이지 않게 위해서 이런 식으로 작업을 했다.

적게는 신발 하나 크기, 커도 내 한 몸 다 뉘지 못할 경작지를 곳곳에 박아 두었다.

관리가 힘들고 물을 줄 때 몸이 남아나지 않고 병충해에 약하고 생산성조차 떨어진다는 숱한 단점이 난무하지만 경작지가 들켰을 때 받을 리스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군단파에게 찍힌 인간이 디에스이라에처럼 자랑스럽게 경작지를 올리고 “스켈톤 팜” 이딴 제목으로 인증글 올리다간 군단파에서 날아온 포격을 받고 일년 농사 전체를 말아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조차도 내년과 내후년이 되면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비축량도 길어봐야 1년 정도다.

장기보관형 “벽돌 식량”을 합치면 5년은 버티겠지만 5년이 채 지나기 전에 내가 정신병에 걸리거나 다른 질환으로 죽게 되겠지.

식량보다 더 큰 문제는 설비 노후화다.

전기, 배관은 처음 시공할 때 준최상급을 썼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어려움이 없다.

다만 배터리는 수명에서 자연스러울 수 없다.

다량의 축전지를 구비했지만 3년 남짓한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점 충전량과 전압이 떨어지고 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기름이다

기름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예상한 일이다.

기름이라는 게 천년만년 보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휘발유 같은 건 1년도 못 쓰고 경유도 길어봐야 1년 반 정도다.

해서 시중에 나온 경유 중에 특히 보존성이 좋다는 녀석을 발주해 산화를 막기 위한 각종 첨가제를 넣고 진공으로 유지되는 저유고를 만들어 보관했지만 가는 세월을 완전히 막을 순 없다.

잠깐잠깐 기름을 쓸 때마다 밸브를 열게 되고 그 밸브의 틈으로 공기가 밀려오는 건 대기업도 막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한국 특유의 기복 심한 계절과 습도가 기름에 악영향을 끼친 것도 무시할 순 없으리라.

말이 사계절이지, 지구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혹독함을 두루두루 종합선물세트로 경험하는 택이니.

레베카의 선배들이 한국 전쟁 때 단체로 얼어 죽은 것도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다.

태평양의 섬만큼 더운 나라가 그렇게 추워질지 예상하지 못해서다.

기름 부족은 문제가 된다.

“······.”

오늘 오전 레베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COOKIEMONSTER123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스켈톤. 이번 겨울 매우 추워.

레베카가 인터넷으로 메시지를 보내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비바! 아포칼립스! 영어 게시판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인기글 번역본을 내게 함께 전송했다.

Drastic81 : 주의! 북미 기상연구소에서 올 겨울, 기상 관측사상 최대의 한파를 예고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이번 겨울에 어중간한 각오로 임한다면 다 얼어 죽는다는 이야기다.

그 글에 의하면 현재 지구엔 세계적인 냉각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는 모양이다.

지난겨울에도 역대급 한파가 밀어닥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는데 이번 겨울엔 더 혹독하고 강한 놈이 온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 글쓴이는 동남아시아발 거대 화산 분화, 지구 규모적인 핵전쟁 등을 지목했다.

“······.”

아마 이번 겨울을 고비로 이 세상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몬스터보다 대자연이 먼저 인간에 대한 시험을 내린다는 소리다.

맴맴-

바깥에서는 한창 매미가 기승을 부린다.

추위는커녕 열사병을 걱정해야 할 시기.

한여름이다.

하지만 나는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전에 군단파나 몬스터가 덮친다면 죽겠지만, 아무 준비 없이 겨울을 맞이하면 얼어붙은 스켈톤 엔딩이니까.

어떻게 겨울에 대비해야 할까?

나는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다는 장비를 떠올렸다.

나무를 때는 화목 보일러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기름이 변변치 않고 질이 낮아지고 있는 반면, 나무는 비교적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다.

나무의 화력은 도시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김노인도 집에 화목 보일러로 구동되는 황토방까지만들어 놓고 웰빙 라이프를 즐기다 저세상으로 갔다.

내가 화목 보일러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대량의 하얀 연기를 분출한다는 점이다.

전쟁 전이야 오붓한 마을을 상징하는 오브제 중 하나겠지만 요즘 세상엔 주변 사람들에게 나 죽여달라는 자살 신호다.

그래서 화목 보일러는 아예 난방수단을 고를 때 선택지 후보에조차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진지하게 화목 보일러를 생각하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레베카의 말에 의하면 이번 겨울은 지난 한파보다 더 끔찍한 놈이 온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얼어 죽든가, 총 맞아 죽든가.

가혹한 양자택일이라는 소리다.

별 고민 없이 나는 화목 보일러를 선택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겨울의 혹독함이라는 몽둥이로 온몸으로 두들겨 맞았을 때 딱 감이 왔다.

사람보다 추위가 무섭구나 하는.

물론 화목 보일러를 가동하는 때는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그러니까 영하 15도 이상의 기온이 한 달 이상 유지될 때.

그쯤 되면 어지간히 약자들은 다 죽는다.

천신만고 끝에 내 주변에 온 사람들의 상태도 좋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골프장에도 못 오지 않을까?

물론 군단파가 방한장비 둘둘 두르고 온다면야 뭐, 죽어야지.

그런데 나에겐 화목 보일러가 없다.

선택지에 올리지 않았다는 건 아예 그걸 쓸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내겐 화목 보일러가 필요하다.

인터넷 쇼핑도 없어지고 업자도 다 좀비나 시체로 변한 멸망기에 물건을 구할 방법은 둘.

뺏거나 줍거나.

나는 줍는 걸 선택했다.

주변에 줍기 전문가가 있다.

바로 내 이웃, 디펜더다.

*

“화목 보일러? 그거 널리고 널렸어. 주변에 버려진 전원주택을 몇 채만 뒤져도 금방 찾을 수 있지.”

살인 인증으로 유명세를 떨치긴 했고 결국 그게 족쇄가 되어 게시판에서 은퇴해야 하긴 했지만 내가 볼 때 디펜더는 살인자라기보다는 전투력이 높은 스케빈저에 가깝다.

집안에 숱하게 쌓아둔 물자를 보고 하는 소리다.

갈 때마다 뭔가가 늘어나 있다.

차량도 포함해서 말이다.

“소모품은 이제 없어. 거의 다 털어갔어. 하지만 보일러 같은 고정된 장비, 특히 화목 보일러 같은 단순한 물건은 그냥 놔둬. 굳이 무거운 걸 낑낑 들고 갈 필요도 없이 가진 것만으로 뚝딱 만들 수 있으니까.”

그 디펜더가 내게 화목 보일러가 있을 만 한 장소를 알려줬다.

<해바라기 빌리지>

내 영역에서 가까운 버려진 전원주택 단지다.

현재 사는 사람은 없지만 오래전에 약탈자와 스케빈저가 다녀간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전원주택 뒤엔 특이하게, 아마도 분양 전후에 시공사와 주민 간의 법적 소송을 만들어냈을 묘지가 가득 있었는데 스케빈저 중에 독일인이 있었던 모양인지 묘 몇 개가 파헤친 상태다.

디펜더가 말하길 빈집을 뒤질 때에는 각별히 조심하라고 한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집에서 사람, 특히 노약자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 아니면 좀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최악의 경우엔 뮤테이션이 도사리는 경우도 있다는 모양이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고양이 뮤테이션이었지. 그땐 진짜 육성으로 비명을 터뜨리며 도망쳤어.

뮤테이션이 두려운 존재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것들의 개체 수는 그다지 많진 않다.

덩치가 커진 만큼 눈에 잘 띄고 먹이 또한 커진 몸집에 걸맞은 것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게 지능이 좀 오르고 덩치가 커진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중국에서도 수많은 뮤테이션이 나타났지만 대부분이 먹이 부족이나 뮤테이션끼리의 살상으로 죽었다.

인간을 주식으로 삼은 놈들도 꽤 있지만 인간들의 손에 의해 죽었다.

이 근방은 뮤테이션을 먹여 살릴 만한 마을도 없고 짐승도 많지 않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겠지.

한 손에 도끼를 들고 거기에 총구를 받친 채 천천히 버려진 집으로 향해 다가갔다.

쿵!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니 먼지로 뒤덮인 실내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시체의 잔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철컥!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집안을 수색했다.

빈집을 뒤질 땐 집 전체를 뒤지는 것이 철칙이다.

다락이나 지하 같은 곳을 귀찮다고 수색하지 않다가 그 안에 숨은 사람의 반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특히 그 집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면 더더욱 꼼꼼하게, 심지어 인근 가옥까지 전부 뒤져야 안전이 보장된다.

스케빈징을 시작하는 단계에 이쪽의 위치를 사방에 알리고 그 반경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게 무기가 있다면 상당한 위험한 사고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목적했던 물건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보일러 실에 큼지막한 화목 보일러가 큰 손상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일러 옆에 미라화가 된 시체 두 구가 누워 있는 게 걸리긴 하지만, 오히려 적어도 이 집안엔 위험이 없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역시 화목 보일러의 무게.

얼핏 봐도 150kg은 족히 나가 보인다.

스켈톤이 들 수는 있겠지만 들 수 있을 뿐인 무게다.

허리 나간다.

허리 나가면 죽는다.

감기에 걸려도 죽고.

추워도 죽는다.

그런 세상이다.

“······.”

지게차를 동원해야 하나.

9km 거리라고 하나 지게차를 동원하는 건 꽤나 쉽지 않은 결단.

뭐, 갖고 가야겠지.

트럭에 올려서 가는 방법도 있으니.

아무튼 목적했던 보일러는 확보했다.

그다음은 수색이다.

나중에 한 번 더 와야 하니 그만큼 더 철저하게 주변을 살필 필요가 있다.

총기를 들고 옆으로 진입했다.

옆집보다 크기는 작지만 제법 잘 지어진 예쁜 주택이다.

1층 유리창은 거의 다 깨졌지만 2층이나 손이 닿기 어려운 부근의 유리창은 멀쩡하고 쨍한 투명함을 머금은 채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잠시 망설였다.

돌아갈까 하고.

왜냐하면 이 집.

사람이 산다.

생활감이 느껴진다.

꼭꼭 숨기고 있지만 어쩌겠나.

내 감이 좋은 걸.

사람과 실랑이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총기를 가지고 안전한 위치에 틀어박혀 들어오는 놈만을 쏴 죽일 각오를 한 인간 상대로 다퉈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잘못 찾아왔습니다. 그냥 갈게요. 싸울 생각 전혀 없으니 오해 마시길.”

누구인지 모르는 상대방을 향해 양해를 구하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뒤로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런데 몇 걸음 채 걷지도 않았을 때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빛이 반짝였다.

사람이다.

“저, 저기요!”

어린아이.

하나가 아닌 셋이다.

그 아이들은 하나 같이 해골처럼 말라 있었다.

“먹을 거 좀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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