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거목 (1)
전쟁 전에 잠깐 직장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우리 게시판에 내가 직접 올린 진솔하고 담백한 체험담을 통해 익히 공개한 바다.
그 회사엔 두 명의 경리가 있었는데 한 명은 사장 애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진짜 경리였다.
둘 다 일을 안 하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일 하는 시늉이라도 한 건 진짜 경리였는데, 우리 게시판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진짜 경리는 이 박규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 눈치였다.
“이거 봐요. 박규씨.”
그래서일까.
그녀는 자신이 자주 보는 커뮤니티 화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아마도 공감대를 찾으려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 아닐까 싶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여성에게는 그다지 살갑지 못한 남자다.
“인터넷 안 합니다. 카톡 같은 것도 안 합니다. 톡 들어가는 건 일절 안 합니다.”
그녀가 내 타입이 아니라는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단톡방에 있는 건 뭐예요?”
“비지니스 계정입니다. 사생활을 존중받기 원합니다.”
경리의 매력이 높았더라도 결과값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목적은 1인 생존이지, 동반 생존 같은 사치는 당시에 단 한 번도 고려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보여줬던 커뮤니티 화면은 당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떡하냐는 걱정과 잦은 빚 독촉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던 이 박규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는데 익명 게시판이었고 익명 게시판인데도 완벽한 익명이 아니었다.
그 게시판은 특이하게도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이름이 표시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 보다 진솔하게 서로가 다니는 직장의 비밀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는 공간을 만들어 직장인의 알 권리와 권익을 보장하는 좋은 취지로 기획된 아이디어로 그 익명 게시판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취지는 좋다.
그럴듯하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그 시스템은 대한민국이 가진 해묵은 병폐의 복각판처럼 보였다.
“짜잔~ 우리 회사는 이렇게 떠요!”
진짜 경리가 글 하나를 올렸다.
해물파전lv.1 (새 회사) : 우울우울해 ㅠㅠ
“새 회사요!”
“새 회사?”
“네. 보통 우리 회사 같은······.”
그녀가 내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죠.”
내 반응에 그녀는 삐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좆소가 그렇게 떠요.”
그녀 몰래 사이트에 접속해서 가입신청을 했다.
회사 명함과 회사 전화번호를 요구했는데 명함도 안 만들어주는 회사라 1회 이용료 2,500원 짜리 서식으로 직접 명함을 만들고 회사 전화번호를 기입해 인증받는 방식으로 간신히 계정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계정을 만든 후 문제의 사이트에 접속해서 분위기를 보았다.
직장인들이 많이 모이는 사이트답게 실용적인 정보와 3040 직장인 특유의 문화 같은 게 손으로 잡힐 정도의 현실감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처음 보고 느꼈던 익숙함이 덜컥 목에 걸렸다.
SKELTON(새 회사) : 일이 너무 힘들어요
글을 썼다.
3초 뒤에 비슷한 글이 올라왔다.
사축A(제풍자동차 본사) : 사는 게 너무 힘들다 (12)
두 글의 차이점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댓글 수가 차이가 난다.
내건 댓글이 단 하나도 안 달리는 반면 그 아래 사축A라는 놈은 댓글이 12개나 달린 것이다.
그 댓글 몇 개를 읽어 보았다.
ㅇㅇ(철주미디어) : 나도 힘들어 ㅠ
내일은내일의태양이(코카오) : 내일도 출근해야 해...
사토리세대(CK텔레콤) : 하.... 힘내자
슬램덩크123(공무원) : 휴가 내고 싶다
...
...
“아니.”
당시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도 이 상황은 상당한 불합리함으로 다가왔다.
내가 뭘 잘못 했냐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사람인지라 우리 진짜 경리가 언급한 “새 회사”라는 문구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찝찝한 불쾌감을 머금은 채 새로고침을 하던 중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노보노햄찌(의사) : 우리 직장 특징.txt (13)
-일 빡셈
페이 적음
허구한 날 노인만 상대해야 함
공부 왜 한 지 모르겠음
“의사라는 회사도 있나.”
회사 이름이 기이하다 여기며 나도 비슷한 글을 적어보았다.
SKELTON(새회사) : 우리 회사 특징.txt
-항상 10분전에는 도착하는데 더 일찍 나오라고 꼽줌
점심시간에 밖에 나가서 산책하고 있는데 전화로 갑자기 부름
모르는 거 물어보려 하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 하고 안 물어보면 안 물어본다고 지랄함
“?”
장문의 글을 썼음에도 댓글이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나중에 인기글을 훑어보며 대충 이쪽에 흐르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닉네임 옆에 있는 회사 이름이 곧 그 사람의 신분이었다.
조선시대에 쌍놈 양반, 양반도 무반이니 문반이니 노론이니 존내론이니 급 나눠서 구분하는 것처럼, 가깝게는 아파트 이름, 지역 가지고 차별하는 것처럼 사람 급을 나누는 도구로 보였다.
나 같은 좆소 다니는 놈은 다른 놈 다니는 기세 등등한 대기업 이름 보고 글을 안 적거나 아니면 조롱 받을 각오로 적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하고 우리의 의견이나 생각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지는 경우는 드물다.
논쟁성 있는 글에 새 회사를 단 사람이 제삼자가 볼 때도 객관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 글을 써봐야 의사 딱지 단 놈이 떽! 하면 그냥 찌질이의 하소연으로 전락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봤다.
뭐, 내가 새 회사를 달고 있고 댓글을 못 받았고 빚 독촉으로 심적으로 눌린 상태라 열등감이 평소보다 민감하게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내 감상은 그러했고 그 게시판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하고도 7개월이 된 지금 시점에 재현됐다.
그 장소는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페일넷이었다.
*
ㅇㅇ(A13) : 오, 이거 뭐냐? 갑자기 이상한 거 떴는데?
ㅇㅇ(B31) : 진짜네. 뭐지? 이거?
ㅇㅇ(F13) : 푸르르르르
ㅇㅇ(D07) : 아이디 같은 거 생긴 거냐?
ㅇㅇ(E31) : 테스트
ㅇㅇ(E31) : 어? 뭐냐? 너 왜 나랑 뒤에 문자가 같아?
...
...
페일넷에 이변이 일어났다는 걸 들은 건 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워질 정도로 노동을 한 후 샤워를 하고 노트북 앞에 앉은 시점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장마 때 열어 두었던 메인 방공호를 다시 메우는 작업을 실시했다.
전처럼 흙으로 전부 메꾸지는 않았다.
다음에 쓸 일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길어봐야 2년 정도?
솔직히 그 시점엔 나도 군단파도 김다람도 생존이 불투명하다.
그래서 전체를 흙으로 메꾸는 대신 합판을 깔고 그 위에 방수포를 덮은 다음 그 위에 다리 흙을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흙으로 덮은 뒤엔 주변의 잡풀을 심어 잘 위장했고 나머지는 작렬하는 여름의 태양에 맡겼다.
위이이이잉-
에어컨이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쾌적한 방공호 안에서 노트북을 켠 순간 페일넷에 일어난 비보를 들었다.
닉네임 옆에 이상한 코드 같은 게 떴다는 것이다.
그 코드의 정체가 무엇인지 관해 페일넷의 할 일 없고 배는 고픈 유저들이 설왕설래했는데 곧 익명의 유저가 코드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ㅇㅇ(D13) : 이거, 캠프 코드 아니냐? 전에 캠프 마다 기지국 공사 했잖아?
그 유저의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닉네임 옆에 붙은 코드는 곧 그 유저가 접속한 기지국 코드를 의미했다.
한편, 위성통신으로 페일넷에 역으로 접속하는 우리 비바! 아포칼립스! 유저의 코드는 아래와 같다.
ㅁㅁ(Unknown) : 테스트
언노운.
그러니까 알 수 없음이다.
이 박규나 다른 유저가 “ㅇㅇ”라는 가면을 써도 그 출신은 숨길 수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제2의 엄창이가 페일넷에 나타날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ㅇㅇ(D13) : 코드별 지역.txt
한 유저가 코드를 기반으로 코드가 의미하는 기지국 위치를 알아냈고 그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 의도는 선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마 글쓴이가 생각하지 못했던 추잡한 방향으로 자료를 해석했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ㅇㅇ(A18) : 코드별 계급.txt
두 번째 게시글은 첫 번째 게시글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으로 두 번째 글쓴이는 여기에 하나의 변형만 가했다.
지역을 계급으로 바꿨다.
피난민 캠프에 발만 담근 나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인천 피난민 캠프에서는 캠프마다 나름의 격차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음모론이 감돌았던 모양이다.
얼핏 보기엔 다 같은 피난민 캠픈데 실제로 정부에선 잘 살고 능력 있는 놈들이 모인 곳, 어중간하고 어중간한 동네에 살던 놈들이 모인 곳, 별 가치 없는 어쩔 수 없이 수용한 사람들이 모인 곳 이런 식으로 계층을 구분지어 사람들을 수용했다는.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이 멸망하는 혼란기에 대충 되는대로 사람을 수습하고 가르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캠프마다 차이가 나길 마련인데 그걸 가지고 평균 운운하는 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나도 후자 쪽이 맞다고 생각한다.
정부 대표자도 없고 중장년 바깥에 끌어내 죽이는 놈들이 뭔 그런 짓을 하겠냐고.
내가 보기엔 정부에서 필요한 인력은 그나마 어웨이큰 각성 가능성이 있는 애들밖에 없는 거 같은데.
그런데 논리는 무논리에 자주 무너지는 법이다.
상대적 고평가를 받는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전쟁 전 마냥 그들이 어떤 지역에 있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길 원했고 막무가내로 그들의 논리가 맞다고 밀어 붙였고 결국 캠프 계급론이 진리인 것마냥 인천 전역에 퍼졌다.
그 결과가 아래와 같은 참상이다.
ㅇㅇ(A18) : 코드별 계급(최종판).txt
-A01~10 : 왕족
A11~23 : 권문세가
B01~18 : 호족
B19~33 : 양반
----양반 마지노선----
C01~14 : 중인
C15~32 : 평민
----인간 마지노선----
D~ : 노비
E~ : 노예
F~ : 좀비
“······.”
존내논의 가치가 훼손됐다.
누구나 자유롭게, 평등하게 ㅇㅇ라는 익명으로 활동을 하던 페일넷에 계급이 생기고 만 것이다.
형우아빠(D18) :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캠프마다 뭔 차이가 있다고. 나 제주도 가는데?
ㅇㅇ(B11) : 네~ 다음 거지~ 꿈에서나 실컷 가세요~
ㅇㅇ(A22) : 계급표 이거 귀신 같이 들어 맞네? 우리 캠프에 의사 엄청 많거든. 연예인도 있고. 나도 여의도 펀드매니저였어.
ㅇㅇ(A23) : 우리는 강남 생존자들 많이 모였던데. 나라에서 솎아내서 수용한 게 맞나봐요.
ㅇㅇ(E22) : 개소리죠? 뭔 씨발 니들 오늘 밥 뭐 처먹었는데? 소고기라도 처먹고 이 지랄 싸는 거죠?
ㅇㅇ(A15) : 아~ E 냄새~ 구역질 나오네~
ㅇㅇ(A02) : 냠냠... 거지 새끼들... 이제 좀 게시판 기강 잡히네.. 냠냠... 주제도 모르고... 냠냠...
...
...
똑같이 웃고 떠들던 인간들이 이제 닉네임 옆에 있는 코드표를 보고 서로의 고하를 확인한다.
이 모습은 전쟁 전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게시판에서 보았던 닉네임 옆에 표시된 회사명을 연상하게 했다.
이 사태를 보고 나는 즉시 존내논의 부하에게 연락을 취했다.
SKELTON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 페일넷에 난리가 났던데.
잠시 후 존내논의 부하에게 연락이 왔다.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아, 스켈톤님······.
SKELTON : (스켈톤 깜짝) 아니, 그쪽 닉네임이······?!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이제는 이거 이제 제 계정이나 마찬가지라서요. 거짓말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SKELTON : (스켈톤 심호흡) 그, 그렇군요.
SKELTON : (스켈톤) 좌우지간, 무슨 일이죠?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게 말이죠.
171cm는 그간 있던 사정을 내게 말해주었다.
일전에 장마 때 장비가 망가지면서 정부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정부 쪽에 복속하는 모양새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존내논이 위대한 사이트를 개척한 건 맞지만 운영하는 과정에서 유지보수는 필요한 일이고 그 유지보수를 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원이 필요하니까.
그 자원이 장마 때 거의 소진됐다.
어쩔 수 없이 존내논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나라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고 그게 지금 우리가 보는 이 끔찍한 판데모니엄으로 이어진 것이다.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아, 그리고.
인터넷 글자뿐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글 너머엔 안경을 낀 삐쩍 마른 사내가 주저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이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존내논님.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아마 이번 달이 고비가 아닐까. 그렇게 보입니다······ ㅠㅠ
“······.”
두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로는 예상한 바다.
그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개념은 죽음이었으니.
하지만 막상 이제 그 빛과 같은 사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머리로 망치를 맞은 기분이다.
솔직하게 좀 더 오래 살아줬으면 했다.
비록 그가 더이상 게시판에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SKELTON : 그렇군요...... ㅠ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나저나 저도 참 괴롭습니다. 진짜....
SKELTON : 왜요?
171cm54kg13c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존내논님. 너무 괴로워하세요. 자신이 만든 사이트가 결국 정부 입맛대로 끔찍하게 변해가는 걸······. 어제도 한 잠도 못 주무시고 숨을 헐떡이며 게시판을 보더라고요. 회한에 가득 찬 눈으로······.
그도 그렇겠지.
자신이 목숨과 맞바꾼 유토피아가 정부의 흙발에 더럽혀지는 걸 보는 건 얼마나 처참하고 실망스러운 기분일까.
“······.”
또 한 번의 무력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이 문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도끼 들고 설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어웨이큰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으리라.
강한민처럼 나라 전체를 좌지우지할 위치에 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잠깐.”
그렇지.
존내논은 존내논이다.
오랜 팬으로서 나는 그 사람을 잘 아주 잘 안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타닥타닥
SKELTON : (제갈스켈톤)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