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89화 (89/183)

47. 감기

전쟁 전이나 전쟁 후나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건강이다.

몸이 망가지면 사람도 망가진다.

건강한 체질이긴 하지만 방공호 생활을 하는 내내 건강 관리에 주의했다.

건강 관리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다.

체온이 너무 떨어지지 않게 온도를 유지하고 적절한 양의 식사를 하고 음주와 담배를 하지 않고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스트레스는 단지 마음만 잡치게 하는 게 아니라 몸까지 좀먹으니까.

영양제도 수시로 복용했는데 영양제는 매일 먹어도 5년을 더 먹을 양이 남아 있었다.

물론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게 할 정도의 운동은 자제했지만 적절한 폐활량과 근력, 유연성을 유지할 운동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건강 관리를 해도 언제나 건강할 순 없는 법이다.

방금 전만 해도 멀쩡하게 헬스장에서 운동한 사람이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을 수도 있고 선물로 받은 어패류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사경을 헤맬 수도 있다.

이 박규도 예외는 아니다.

“콜록! 콜록!”

제풍호 시티에서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다.

감기에 걸렸다.

그것도 지독한 독감에.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둔 체온계는 39.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오한과 발열이 번갈아 왔다.

방공호 안은 늦가을의 열기로 후덥지근했지만 나는 두꺼운 이불 안에 누워 꼼짝도 않고 누워 있어야 했다.

꼬르륵-

제대로 먹지 못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밥을 차려 먹기는커녕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다.

즉석 죽이 있지만 지하 3층, 그것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지금 기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 내내 침대 위에 누운 채 고열과 오한과 싸웠다.

약을 먹었지만 차도는 없었다.

머리는 더 아파 오고 기침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체온계는 39.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콜록! 콜록······!!”

사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인한 동물이지만 또 어떤 때는 어처구니없이 쉽게 죽곤 한다.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 나는 끝없는 고통 속에서 오락가락하며 생각에 이르지 못한 모호한 이미지를 그렸다 지우며 하루를 보냈다.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불 밖으로 나왔으나 어지럼증 때문에 지하엔 내려가지 못하고 1층에 비치한 크래커를 물에 개서 섭취했다.

그날 저녁, 교신기로부터 연락이 왔지만 받지 못했다.

교신기가 울린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약 기운과 졸음, 고통에 취해 의식이 흐릿한 상황이라 교신기를 켤 수 없었다.

그날 새벽에 눈을 떴다.

새벽 2시 10분경.

극도의 허기와 갈증이 느껴졌다.

도저히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랜턴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지하 3층으로 향하는 사다리 쪽으로 향했다.

“끄으으으······.”

해치가 열리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지하 2층으로 통하는 해치를 열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물만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포도당 캔디를 배가 부를 정도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끔찍하게도 그 이후로 잠이 오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하지만 정신이 너무 또렷했다.

또렷한 정신은 그 자체로 아픈 몸과 맞물려 새로운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왔다.

이 또렷한 정신으로 뭔가를 하자니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멍하니 있거나 잠을 자자니 이 말똥말똥한 정신이 그마저도 가로막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시간을 초 단위로 인식하며 해가 뜨는 걸 기다려야했다.

감기에 걸린 지 3일째.

온도계는 38.6도를 가리켰다.

열은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고열에 해당하는 상태다.

지끈거리는 두통도 여전하고 쓸데없이 또렷한 자각 상태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꼬르륵

이제는 뭔가를 먹어야 한다.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 해치를 열었다.

끼이이익--

간신히 해치를 여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

동작 감지 센서가 붉게 점멸했다.

그 위치는 메인 방공호 외곽 동편.

틀림없다.

침입자다.

절로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늘 그렇다.

운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아프다고, 내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운명이 날 봐주는 일은 없다.

먼저 죽은 내 동료들만 해도 그렇다.

박선미라는 후배가 있었다.

말이 많은 여자였다.

그날 그녀는 몸이 아프다고 했다.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생리통으로 보였다.

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야망이 있던 그녀는 쉬는 대신 쉬운 보직을 요청했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전장에서 좀 더 높은 포인트를 쌓고 한 단계 승진하여 더 좋은 조건에서 신혼을 시작하고 싶은 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나는 그녀의 요청을 불허했지만 그녀는 내 상관을 통해 작전에 참가했고 죽었다.

100m를 12초대에 주파하던 무시무시한 주력을 가진 그녀는 평소보다 굼떴고 그래서 죽은 것이다.

지금 나는 그녀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고열과 오한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고 그로 인해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효과가 강한 감기약 성분으로 인해 정신마저 혼미하다.

이 상태에서 싸워야 한다.

철컥-

도끼를 들 수 없는 몸이기에 도끼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믿는 건 오직 소총 두 정과 권총 세 정.

부비트랩 같은 건 깔 여유도 없었고 장마 때 파헤친 내 메인 방공호의 입구는 그대로 뚫려 있는 상태다.

아마 김다람이 보낸 살인자들은 내 방공호의 입구가 두 개라는 걸 알고 어리둥절해 할 테지만 이내 방공호 하나가 문이 없고 텅 비어 있는 걸 보고 메인 방공호 쪽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동작 감지 센서가 계속해서 점멸한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두 눈을 잠시 감았다.

딱히 떠오르는 풍경은 없다.

생각나는 사람도 없다.

뭐랄까, 의외로 여한도 별로 없다.

그냥 죽는구나.

이 정도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다.

어쩌면 고열과 오한, 갖은 고통에 시달린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살면서 애타게 원한 건 없었다.

이상훈처럼 권력욕의 화신도 아니었고 김다람처럼 매사 실리를 챙기려 든 것도 아니었고 공경민처럼 꿈을 쫓은 것도, 우민희처럼 충동에 따르지도 않았다.

단지 몬스터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뿐이다.

아니, 하나가 더 있다.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늘 꿈꿔 오던, 하지만 절대 하고 싶지 않던 위시리스트가 하나 남아 있었다.

총기를 내려놓고 헐레벌떡 노트북 앞으로 가 전원을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비바! 아포칼립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타닥타닥

게시판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친구들의 죽음을 보았다.

조용히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친구도 있고 요란하게 간 친구도 있다.

그중에 특히 내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친구들이 있다.

죽기 전에, 그러니까 죽임당하기 전에 최후의 단말마를 인터넷을 통해 내뱉던 친구들이다.

지금은 백승현의 몸으로 부활한 동탄맘이라든지.

아무튼, 갈 땐 가더라도 진짜 저 세상으로 가는 순간이 오면 그 친구들처럼 하고 싶었다.

SKELTON : (스켈톤 위기) 좆.됐.다!

-지금 밖에 나 죽이려 온 놈들이 있다.

먼저 간다. 안녕!

인터넷 단말마를 말이다.

사진을 찍고 업로드할 상황은 아닌지라 다급히 내용만 적고 노트북을 덮었다.

“······후우.”

위시리스트 작성 완료.

절로 입가에 미소가 배어든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인간의 것이다.

사람 몸이 참 지랄 맞다는 게, 새벽과 오전 내내 말똥말똥하던 정신이 이제는 졸음으로 바뀌어 내 눈꺼풀을 짓누른다.

너무 화가 나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내 위치를 알리고 싶지 않다.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데려가야 하는 게 내 사명이다.

정면 센서가 번득였다.

놈들은 이제 내 방공호 입구까지 왔다.

중앙 변기를 올려놓은 콘크리트 단상 아래에 몸을 숨기고 변기에 총기를 갖다 대고 총구를 고정했다.

“······.”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뭘 준비하는 걸까?

다이너마이트? 용접기?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왔다면 죽어야겠지.

그나저나 내 최후의 글.

댓글은 달렸을까.

설마 내 마지막 단말마마저 무플로 묻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로 화가 날 거 같다.

진짜로 말이다.

똑똑

운명이 내 문을 두드린다.

총기를 고정한 채 미동도 않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스켈톤?”

아.

“스켈톤? 거기 있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스켈톤? 야~ 스켈톤~!”

내게 이웃이 있다는 걸.

“아니, 교신기로 몇 번이고 연락했는데 왜 답장이 없어? 응?”

침입자는 다름 아닌 디펜더 남매였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동안 누적된 피로와 고통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노트북에 최후의 단말마를 쓴 반작용 때문인지 아무튼, 이 박규는 디펜더 남매에게 문을 열어준 직후 의식을 잃었다.

*

몬스터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되기 전 우리 가족은 79㎡, 그러니까 24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24평이지만 방 세 칸에 화장실도 두 개나 있었는데 당연히 방도 거실도 그보다 넓은 평수에 비하면 확연히 미니사이즈였다.

그래서 거실에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저녁을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요리는 친구네 엄마보다 맛있다고 할 수 없었지만 창가를 통해 파고드는 노을의 색채와 고즈넉한 공기, 보글보글 끓는 냄비의 소리는 가끔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풍경이다.

그 어머니도 죽었다.

즉사다.

목이 옆으로 꺾이고 눈알이 반쯤 튀어나온 채 죽었다.

생전 화 한 번 못 내던 사람이 그렇게 죽어야 했다.

그 분노가 나를 무의식에서 깨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기이하게도 날 깨웠던 것과 흡사한 풍경이었다.

고즈넉한 공기, 노을의 색채,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내게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여성.

“스켈톤?”

그 여성이 주걱으로 음식 맛을 보더니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정이다.

“일어났냐?”

내 옆엔 디펜더가 모니터 앞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게임이다.

아이엠지저스의 집에서 가지고 온 걸 모니터에 연결해 갖고 놀고 있었다.

“아프면 말하지 그랬냐?”

그가 날 보며 실없이 웃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뽀잉~

모니터 속 도트로 그려진 게임 캐릭터가 점프를 하는 걸 보다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잘 누워 있었다.

이마엔 얼음도 놓아둔 상태.

“······.”

멍한 얼굴로 잠시 굳어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솔직히 잘 알지 못하겠다.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뭐랄까 그 말이 입에서 나온다는 게 그리 쉬울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상한 놈 맞다.

“······.”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으니.

그나저나 음식이 다 된 모양이다.

다정이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주걱으로 냄비를 가볍게 두드렸다.

“스켈톤 새.됐.다!”

디펜더네 집에서는 밥먹으라는 말을 저렇게 표현하는 모양이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디펜더 동생이 나도 어디에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던 오븐 장갑을 끼고 갓 끓인 죽을 내왔다.

얼굴을 덮는 하얀 수증기와 전분기가 있는 불리고 익힌 쌀알의 향기가 내 입에 식욕과 더불어 잃어버린 풍경을 내 앞에 가지고 왔다.

“드셔.”

“······고맙다.”

“우리 사이에 뭘.”

디펜더 동생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릇에 죽을 펴서 내 앞에 대령해주었다.

“먹여줄까?”

“아, 아니. 괜찮아.”

“왜?”

“아니, 괜찮다니까.”

뜨거운 죽을 숟가락으로 퍼서 호호 불며 입안에 가져갔다.

슴슴하고 고소하고 부드럽고 뜨거운 죽은 사실 아무 맛도 없는 녀석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남매가 동시에 나를 보았다.

“일 있으면 연락 해. 아직도 우리가 어려워?”

“아니, 그건 아니고.”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정신없이 밀린 식사를 했다.

순식간에 죽 한 그릇이 바닥났다.

“남은 거 냄비에 있으며 천천히 데워먹어.”

“게임기 빌려 간다?”

느닷없이 나타나 내게 위기감을 주었던 디펜더 남매는 왔을 때처럼 느닷없이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주는 그들의 배려심은 나로 하여금 그들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닫힌 문 쪽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후우.”

좀 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병마가 남긴 작은 교훈이다.

그건 그렇고 내 마지막 인터넷 단말마의 반응은 어떠할까.

솔직히 몇 놈은 걱정해줄 거 같긴 한데.

다정이의 마음으로 끓인 죽으로 회복한 몸을 이끌고 노트북으로 가서 나의 인터넷 단말마를 확인했다.

“······하.”

댓글, 하나도 안 달아줬네.

“백승현 개새끼야!!!!”

*

SKELTON : 아니,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한 거 아니냐?

나도 사람이다.

솔직히 우리 게시판 민심에 너무나도 실망했다.

아니, 인터넷 친구이자 올드비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는데 무시라니.

말이 되는 소린가.

dongtanmam : 냠냠... 살아 있네... 냠냠...

이제야 댓글이 달리는데 보고 싶지 않은 댓글이다.

무시하고 있자니 그제야 다른 게시판 놈들도 그제야 엉기적거리며 댓글을 단다.

익명848 : 역시 구라였네

mmmmmmmmm : 심심하지? 응? 삶이 무료하지? 우리 집에 와볼래? 매 순간이 다이나믹한데?

unicorn18 : 와... 댓글 안 달린다고 양치기 소년짓 해놓고 또 거기에 댓글 안 달린다고 징징 글까지 쓰네.... 이제는 사람의 마음마저 버린 거냐?

gijayangban : ?

“······.”

이 스켈톤이 뭐가 그리 잘못을 했나.

아이엠지저스 썰이라도 풀어서 기강을 잡아야 하나.

아니, 그건 조금 위험할지도.

아무튼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몸이 건강해서겠지.

디펜더 남매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교신기을 잡았다.

공교롭게도 교신기가 울렸다.

“스켈톤!”

디펜더 동생이다.

그런데 이 목소리, 이상할 정도로 다급하다.

“무슨 일이냐?”

즉시 대답했다.

“오, 오빠가!”

“······.”

“총에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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