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고민 (1)
몬스터, 뮤테이션, 인간, 질병, 식량의 부족.
방공호를 건설하고 확장하면서 염두에 둔 것 중 하나는 나에게 닥쳐올 위협의 종류다.
다채로운 위협이 있을 것이다.
막을 수 있는 위협이 있고 막을 수 없는 위협도 있고 위협처럼 보이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도 분명 있다.
최악의 위협은 무엇일까?
침식이 내 영역까지 확장되는 것?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유한한 수명의 끝이라고 할까.
진심으로 내가 꺼리는 위협은 강력한 인간 집단의 타겟이 되는 것이다.
그 집단은 분명 다양할 것이다.
절박한 피난민이 될 수 있고 개척자나 약탈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정으로 두려운 집단은 정해져 있다.
바로, 군대다.
나는 군대를 적으로 돌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방공호를 버려야 하나, 아니면 방공호를 안고 죽어야 하는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도망을 간다고 하더라도 어디로?
우민희 밑에서 백승현 같은 심부름꾼 일이라도 하며 연명해야 하나?
개척단에 들어가서 남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m9 옆집에 입주해 같이 밧줄로 몸을 묶고 서커스라도 하며 살아야 하나?
이 박규,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그러나 나도 평범한 사람인 모양이다.
이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뻘짓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발단은 고민으로 오버히트 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머리나 식힐 요량으로 인터넷에 접속한 때부터 시작된다.
페일넷이라는 선택지도 있지만 내 마음은 고향은 어디까지나 우리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잠시 페일넷이라는 거대한 사이트에 끌려 볼거리를 탐닉하던 우리 친구들은 고향의 구수함을 못 잊고 하나둘 돌아와 지금은 예전 같은,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에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게시판에 접속했을 때 게시판은 흥미로운 화제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익명458 : 전쟁 전 시점으로 살아오면서 저지른 가장 나쁜 일 말해보자.
카일도스의 친구 중 하나인 익명 458이 화제의 포문을 열었다.
이른바, 나쁜 짓 고백하기.
우리 집 앞에서 일어난 전투 떡밥도 시들어가겠다, 게시판 유저들은 신이 나서 새로운 떡밥을 물었다.
곧 게시판은 거대한 고해성사장으로 변했다.
익명458 : 나부터 나쁜 짓 고백
ㅇㅇ : 나도 고백
RKKArA : 고백
Dolsingnam : 고백(A.K.A 불륜)
다영아빠 : 이 게시판 재밌게 노네~ 나도 고백요
iamjesus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
전쟁 전이라는 단서를 단 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살인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로 여기니.
도시 피난 캠프에서 산 사람이라면 모를까, 우리처럼 외떨어진 곳에서 혼자 혹은 소수로 사는 사람들은 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살인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적다는 소리다.
지금은 죽은 카일도스도 드래곤씨도 명시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 한둘 정도는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 전”이라는 시점 제한은 단지 우리의 죄상을 살인이라는 천편일률적인 범죄로 도배되는 걸 막는 것 말고도 문언 그래도, 전쟁 전에 우리가 저지를 수 있었던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을 추억하는 의외의 효과도 있었다.
익명848 : (고백) 음주운전을 했다. 혈중 알콜 농도 0.1%에 달할 정도로 퍼마신 상태로······.
익명848이 이실직고한 음주운전도 그렇다.
이제는 범죄도 아니다.
술도 없고 차도 없고 술 처먹고 운전할 도로도 없으니.
즉, 성립이 사실상 불가능한 범죄라는 이야기다.
이런 차이가 멸망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흥미로 다가온다.
ㅇㅇ : 대학 다닐 때 술집에서 돈 안 내고 튄 적 있었지.
이런 것도 지금보면 아련한 추억이다.
나는 대학을 다녀본 적이 없지만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상황과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
이런 것들이 우리가 돌아가지 못할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Foxgames : 고딩 때 게임기 사려고 아버지 지갑에서 5만 원씩 훔쳤다....
폭스게임의 나쁜 짓은 뭐랄까, 나쁜 짓이긴 한데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unicorn18 : 고등학교 때 학교 일진놈 너무 설치길래 밤에 복면 쓰고 나타나 개 패듯이 패준 적 있었지. 눈물콧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라고······.
아무도 안 믿을 허언도 있었고,
Defender : 너무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핫바 하나 훔친 적이 있었어.
나쁜 짓조차 착해 보이는 이상한 친구도 있었다.
이 뜨거운 흐름에 이 스켈톤이 합류하지 않는 건 뭐랄까, 팥 없는 팥빵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타닥타닥-
그것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 특히 우민희에게 살려달라는 연락 등등 – 현실을 잊고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작성한 이유다.
이야기는 전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내 방공호가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건 내 방공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박철주 회장급은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평범한 사람이 혼자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요새를 만들어냈다.
그 공사의 첫 번째 난관은 내 기술과 경험 부족이지만 후반기엔 돈이 발목을 잡았다.
지름신이 강림해 이거저거 지르다 보니 돈이 다 떨어지고 만 것이다.
사람이 사정이 어려우면 양심이 없어진다고들 한다.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나도 똑같은 놈이었다.
대출을 땡겼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사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돈을 빌릴 때부터 제대로 갚을 의사가 단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내 간이 그리 컸던 건 아니다.
여기에도 멘토가 있었다.
a_few_good_man : 남의 돈으로 방공호 짓는 법 (1)
어퓨굿맨은 전쟁 전에 활동한 유저로 전쟁 이후엔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친구다.
아마도 죽었겠지.
이제는 지옥에 있을 이 친구가 내게 영감을 주었다.
a_few_good_man : 전쟁 나면 모든 게 끝이에요. 왜 돈 안 빌려요? 안 갚아도 되는데.
슬슬 돈이 쪼달리던 나는 어퓨굿맨을 따라다니며 좋아요!를 누르며 악성 채무자에게 되기 위한 비법을 전수받았다.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a_few_good_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주변부터 손을 벌리세요 친구, 친척, 부모, 형제 누구라도 좋습니다. 사기꾼 90%가 주변인에게 사기를 친다고 하더군요.
어퓨굿맨에게 답장이 온 것이다.
돈 빌릴 가족이 없다고 하자 그가 내게 메신저 아이디를 주었고 그 이후부터 우리는 실시간으로 대화했다.
a_few_good_man : 무직이죠?
SKELTON : 네. 그렇습니다.
a_few_good_man : 일단 일부터 구하세요. 무직한텐 돈 안 빌려주거든요? 일단 사대보험부터 납부하세요. 그래야 서류 뚫을 수 있으니까.”
어퓨굿맨의 조언에 따라 돈 빌리기 전에 먼저 취직을 했다.
취직처는 사장도 자기가 무슨 일 하는지 대답할 수 없을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일을 하는 중소기업이었다.
일터는 내 은신처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창고 건물로 랩핑, 지게차 운전, 상하차 등 다채로운 일을 했다.
재직 내내 나는 그 회사가 대체 뭘 목적으로 영업하는지 알 수 없었다.
취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당시 나이로 이십대 중후반에 지게차 운전이 가능하고 신체 건강하고 범죄 사항도 없었으니까.
선하고 깔끔한 마스크도 덤이라면 덤이겠지.
월급은 박봉에 야근은 일상,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가족 같은 회사지만 애당초 사장만큼이나 내 심보도 꼬롬하기에 딱히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적당히 일을 하면서 남는 공업용 랩을 챙겼다.
신축성이 좋고 튼튼하며 커다란 화물도 가뿐하게 포장할 수 있는 공업용 랩은 다가올 미래에 유용하게 쓸 수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거 가지고 가서 어디에 쓰게?”
내 사수인 조부장이 궁금해했지만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가족 같은 회사에 다닌 지 석 달이 지났을 때 나는 본색을 드러냈다.
대출을 풀로 땡긴 것이다.
우선 카드 등 신용대출을 일으켰는데 대출을 할 때마다 심사직원이 묻는 항목이 있었다.
“고객님은 부산에 주소가 있으신데, 직장은 경기도네요. 실제 거주하시는 주소가 어디세요?”
작고하신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몇 안 되는 재산 중에 지방에 있는 작은 빌라가 하나 있었다.
15평 남짓한 구축에 옆 동네에 원전이 바로 보이는 양지바르고 경치 좋은 곳에 위치했는데 경치만 좋고 설상가상으로 조망권을 위협할 수 있는 지역에 넓은 공터까지 있어 가격이 똥값이었다.
실제로 잘 팔리지도 않아 모든 재산을 처분하려고 했을 때도 이 녀석만 악성 매물로 남았다.
그런데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
이 빌라를 내 주민등록주소로 삼았고 대출 서류에도 여기가 내 주소라고 천연덕스럽게 기재한 것이다.
“부산 기장군 쪽입니다. 이쪽은 잠시 파견을 나왔고요.”
대출 이후에도 회사는 계속해서 다녔고 일도 열심히 했다.
사장은 사십 좀 되었는데 속된 말로 좆만한 공장 안에서 얼굴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출근도 자기 마음대로에 가끔 출근해도 늘 사장실에서 골프 퍼팅만 치다가 첩인지 비서인지 모를 여자를 끼고 일찍 퇴근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쩐 일인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덕담을 해줬다.
“박대리. 잘하고 있어. 지금은 우리 회사가 작아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말이야. 사실 큰 건수가 하나 있거든. 그거만 터지면 게임 오바야. 게임 오바.”
“Game over?"
"스톡옵션 알지?"
"?"
"코스닥 상장. 기대해.”
“?!”
코스닥은 개뿔, 기술 하나도 없는 구멍가게가.
다음 날부터 나는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사장 말에 실망한 게 아니라 내 신용으로 가능한 마지막 대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퇴사 처리를 늦추기 위해 한 장의 편지를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지만 언젠가 일이 해결되면 돌아오겠습니다!
박규, 눈물을 흘리며 올림
그런데 그 회사 만만치 않다.
나 같은 놈 많이 봤는지 다음날 바로 퇴사처리를 해버렸다.
회사 단톡방의 분위기도 싸늘했다.
CEO호섭 : 박규 새끼, 좆물을 흘리며 올렸겠지.
그걸 읽자마자 나는 단톡방에서 도망치듯 나가기를 눌렀다.
아무튼, 그들의 기민함은 예상 밖이었지만 큰 틀에서 내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됐다.
그 첫 번째 작업은 대출원리금을 3회차까지 충실하게 갚는 것이다.
왜 3회차인가?
어퓨굿맨 왈, 판례에 따르면 첫 회차부터 대출금을 안 갚으면 사기죄라고 볼 여지가 있다고 하는데 웃긴 게 3회차 이상을 납부하면 사기가 아니라고 한다.
그다음부터는 버티기다.
대출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엔 문자로 시작됐고 이후엔 단기 콜 센터 여성이 나긋나긋하지만 내공이 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언제 갚을 거냐고 추궁했다.
“곧 갚겠습니다. 들어올 돈이 있어서요.”
물론 은행은 어림없다.
3회 연체 다음 날 그들은 내 유일한 부동산에 잡아놓은 근저당권을 실행했다.
경매로 넘어갔다는 소리다.
여기까진 예상한바.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어퓨굿맨의 어드바이스에 의하면 연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대출업자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란다.
대체로 악성 채무자는 개털일 가능성이 높고 이런 개털 상대로 법적 조치 취해봐야 원금 챙길 보장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일단 걸려오는 전화는 충실히 받았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지금 노가다하다 허리를 다쳤는데 몸이 낳으면, 아니 몸이 나으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들은 채권을 추심업체에 이관했다.
무슨 신용정보니 하는 회사가 바로 그 친구들이다.
나긋나긋한 여성의 목소리 대신 걸걸한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사장님. 부산에 사시는 거 맞나요? 갈 때마다 집에 안 계시던데.”
“마, 죄송함더. 제가요. 대출금을 갚느라 하루 23시간 동안 일해가꼬요. 카~ 윽수로 힘이 들어가지고예.”
약속을 잡아 만났다.
여러 헛소리를 준비했지만 그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이번 주까지 일단 3개월분. 3개월분입니다. 전처럼 1개월분으로 퉁치진 않을 겁니다.”
“안 내면 어떻게 되나요?”
“소송이 들어갈 겁니다.”
“제발 소송만은······! 가족이 보면 충격받을 겁니다.”
“가족관계 증명서 보면 혼자시던데.”
“사실혼 관계의 처와 토끼 같은 아들딸 둘이 있습니다.”
“이번 주까집니다. 넣어주세요. 부탁했습니다.”
당연히 땡전 한 푼 안 냈다.
며칠 뒤 집에 지급명령이라는 게 날아왔다.
생전 법원에서 문서 받아보는 게 처음이라 덜컥 겁이 나 어퓨굿맨에게 조언을 구했다.
a_few_good_man : 연락이 잘 되고 주소지에 사는 것처럼 보이니 지급명령 신청한 거 같은데 일단 푹 삭히세요.
그는 강원랜드에 있었다.
a_few_good_man : 시간 끄는 게 목적이라면서요? 거기서 석 달은 더 끌 수 있겠네요.
SKELTON : (깜짝) 그, 그래요?!
a_few_good_man : 지급 명령이 확정되려면 지급 명령 정본이라는 문서가 내게 도달하고 그로부터 2주가 지나야 하는데 2주 아슬아슬할 때 묵혔다가 ······.
마침 시간이 남아도는지 그는 나에게 진지한 조언을 많이 해줬다.
아무튼, 이 박규는 어퓨굿맨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거의 3년이 지난 지금 게시판에 털어놓았다.
SKELTON : (스켈톤 고해성사) 처음부터 돈 절대 안 갚을 생각으로 돈 빌렸고 결국 안 갚음
어퓨굿맨과의 일화, 뭐 돈을 안 갚기 위한 투쟁 과정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솔직히 이 정도면 앙증맞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여자를 강간한 것도 아니고 뉴스에 나올 법한 악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
그런데.
익명458 : 와······
“응?”
반응이 왜 이렇지?
익명848 : 진짜 나쁜 놈이네······.
Dies_irae69 : 어퓨굿맨 정말 오랜만에 보는 닉네임이군
Foxgames : 이건 좀.
gijayangban : ?
Defender : 실망이 큰데?
unicorn18 : 눈나······?
ㅇㅇ : 인간쓰레기네
...
...
“······.”
나, 뭘 하고 있었던 걸까.
K-워키토키를 그제야 들어 아까 하려던 일을 비로소 수행했다.
개인식별번호 : REDMASK
우민희에게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