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71화 (71/183)

42. 낙원 (4)

철컥.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른다.

대의니 세상의 운명이니 그럴 걸 위해 싸우는 시기는 진작에 지나갔다고 느꼈지만 그 궤적이 내 생존과 맞닿아있다면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닐까.

무기를 점검하고 사로를 확인했다.

사경도와 다른 것들을 제거해 사경도와 동일한 상태로 만드는 한편 내 방공호에 죽음의 함정을 파놓았다.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

내 거점을 방어거점으로 쓰겠다는 게 아니다.

곧 들이닥칠 국회파 병력이 저 무리, 아마도 군단파에 속할 저 친구들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불똥이 내게 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니까.

그때는 세 치 혓바닥으로 속일 순 없을 것이다.

아마 나를 가혹하게 몰아세울 것이고 모든 걸 수색할 것이고 어쩌면 고문을 동반할지도 모른다.

메인 방공호로 내려오는 계단에 초를 칠하는 중에 지영희가 날 찾아왔다.

위장하우스로 이동해 그녀를 맞이했다.

“혈액검사 결과 나왔어요. 무전으로 했는데 답장이 없으셔서.”

“몸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요.”

“혹시 감기?”

“비슷한 기운이 있는 거 같습니다.”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 아, 그나저나 박 헌터님 계속 거기서 사실 거예요? 박 헌터님 같은 유능한 분이 이런 곳에 은거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네요.”

“괜찮아요. 사실 무릎이 안 좋아요. 많이 못 걸어요.”

숨 쉬듯이 거짓말을 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얼굴.

아름답지만 어째서인지 인간미가 없는 인형처럼 보였다.

과거, 아버지를 은근히 원망하던 인간미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희석된 느낌이다.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또한 전쟁이 그녀에게 남겨 준 변화이리라.

지영희가 그늘 안의 날 보며 말했다.

“군단파에 관심 있으세요?”

“아니오. 어느 집단에도 흥미가 없습니다. 지쳤다고 할까요. 조직 생활에도 안 맞고.”

“그렇군요. 저는 가보려고 해요.”

그녀가 내게 혈액검사 결과지를 건네주었다.

결과는 정상.

레베카도 스우도 큰 문제가 없단다.

다만 레베카는 간 수치가 좋지 않다고 간 수치를 개선하는 알약 한 통을 동봉했다.

하루에 한 알, 식후에 복용할 것이라는 경고사항을 추가해서 말이다.

잠시 후, 트레일러와 트럭을 포함한 차량들이 현장을 떠났다.

큰 차들이 사라졌지만 활주로엔 활주로를 복구하는 작업자와 비행기를 복구하는 기술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내 눈길을 사로 잡는 건 이 끔찍한 세상에 터무니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 하얀 비행기였다.

이제 두 개의 날개를 단 그것은 언제라도 우아하게 날아오를 것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저 비행기에 탈 수 있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박철주와 했던 문답이다.

역시 인도가 좋을까.

거긴 균열을 닫았다고 하니.

하지만 거기에 가봐야 나는 이방인이다.

카스트 제도라는 어떻게보면 몬스터만큼이나 잔혹한 제도를 만들어 서로의 급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생김새가 다른 외국인이 가봐야 말하는 원숭이 취급 정도를 받진 않을까.

오가사와라 제도는 어떨까.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박철주 회장의 말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

그런데 거기 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일본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는 나는 여전히 이방인일 테니.

한국에서조차 이방인인 내가 갈 곳이 있을까.

요새화된 방공호를 물끄러미 보다 덩그러니 구석에 치워둔 노트북을 발견하고 그것을 펼쳤다.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가만히 올라오는 하찮은 글들을 보았다.

“······흠.”

그래, 여기다.

여기가 나의 낙원이다.

그런 걸로 치자.

깊게 생각해봐야 정신병만 걸리니 말이다.

*

이른 새벽부터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여기는 제21 개척단 조성용 대령입니다. 들리시나요? 여기는 제21 개척단 조성용 대령입니다. 귀하가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구역은 우리 개척단에게 불하된 토지입니다. 토지의 사용, 수익, 처분을 제외한 모든 권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시 한번······.”

빠르게 얼굴을 씻고 바깥 동정을 확인했다.

“······시발.”

절로 입에서 욕이 나 정도로 실망스러운 전력이 도착했다.

개척단이다.

우민희, 생각이 있긴 한 건가?

상대방이 군단파라고 추정한 시점에서 저런 쓰레기들을 보내다니.

군단파의 핵심은 장비가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병사들이 그들의 심장이다.

내가 목격한 박철주의 경호원이라는 작자들은 하나 같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사 출신이었다.

아마, 경호원 따위가 아니겠지.

군단파다.

김필성을 포함한 모두가 군단파다.

집이 박살 나고 거지꼴이 된 재벌이 무슨 수로 막강한 경호원을 붙잡아둘까.

그래서 미친 척을 한 걸까?

갖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성용은 열 대 가량의 차량을 끌고 왔고 그중엔 장갑차도 한 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수색에 들어가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완장을 찬 개척단원들이 미군기지를 향해 접근했다.

탕!

날카로운 총소리가 들렸다.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아아아악!”

높게 찢어 끌듯이 울리는 고통에 겨운 비명.

“아아아아악!!”

소름 끼칠 정도로 높고 길게 이어진다.

어쩌면 사수는 이 비명을 유도했을지도.

언덕 위로 올라갔다.

과연 한 사내가 바닥에 누운 채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바닥엔 피가 흥건했다.

“꺼져.”

무전기에 김필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행기만 띄우고 갈 테니까. 우리 회장님 일본에 가시겠다는데 왜 이렇게 방해질이야? 재미없게.”

K-워키토키가 쉴새없이 울리는 가운데 공항에선 작업자들이 육중한 핵탄두를 동체 안에 싣고 있었다.

그 핵탄두엔 전에는 없었던 기폭장치로 보이는 전자장치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기술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파일럿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뭔가 설명하는 듯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 분주하면서도 일사불란한 대응을 보고 있노라니 나와 우민희의 가정이 점점 현실로 구체화되는 것 같다.

“이 사람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퇴거 명령에 불응했으니 실력을 행사하겠습니다.”

무전기에서 조성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뭘 믿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잠시 후 조성용의 자신감이 드러났다.

부우우우우웅--

헬기다.

전투 헬기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보이세요? 보이냐고? 씹새들아? 너희들 다 뒤졌다고!”

조성용이 부하들과 함께 깔깔 웃어댔다.

확실히 소규모 전투원 상대로 전투 헬기는 죽음의 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빠르게 강하고 단단하고.

하지만 그것이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쪽 하늘에서 날카로운 굉음이 들렸다.

“아.”

무전기에서 아마 개척단의 것으로 보이는 탄식이 들려왔다.

대공 미사일이다.

대공 미사일이 하늘을 가로질러 헬기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전투 헬기는 회피 기동을 해보려 했지만 마하의 속도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맞고 공중에서 그대로 폭발했다.

“실력 행사 끝났어요?”

비산하는 파편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김필성의 조롱이 울려 퍼졌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미 99%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 친구들.

100% 군단파다.

하나의 군대라는 소리다.

아마 사방에 레이더망을 가동해놓고 헬기가 나타나자마자 수십 킬로미터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지대공 미사일을 쏘아버린 것이겠지.

어쩌면 우리가 볼 수 없는 상공에 전투기도 배치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군대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폭력 그 자체.

그런 군대를 상대하려면, 이쪽도 군대로 맞서야 한다.

너무나도 간단한 상식이지만 우민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내 운명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이다.

“박 헌터님~ 박 헌터님~.”

김필성이 나를 부른다.

나를 의심하고 있다.

경고의 메시지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에서 날 찾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웅- 웅- 웅--

하늘 위에서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서 들려왔다.

나는 즉시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 곧 일어날 소란에 대비했다.

쾅! 콰쾅! 쾅!

쾅!

장거리 포격이다.

155mm 유산탄이 마치 자로 잰 것처럼 개척단의 진영을 강타했다.

포병의 화력 앞에 맞설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몬스터마저도 녹아내리는데 하물며 인간이랴.

“후퇴! 후퇴!”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부리나케 방향을 틀어 달아나려 해보지만 포탄의 탄착군은 얄궂게도 그들의 후퇴속도까지 고려해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열 대의 차량 중 단 두 대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남겨진 건 무수한 포탄 구멍과 검은 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뿌려진 시신들.

“벌레 새끼들이 간덩이가 부어 가지고.”

김필성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박규. 거기에 있냐?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대답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다.

해봐야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나 박규는 이곳을 떠난 거다.

소리소문없이 이 영역에서 달아난 것이다.

드론 몇 대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내 위장 하우스를 중심으로 사방을 신중하게 훑어 나갔다.

“박규. 듣고 있으면 나와라. 네가 뭐, 밀고 할 수도 있었겠지. 용서 할 수 있어. 아구창 한대만 맞자? 응? 진짜야. 죽일 생각은 없어. 프로페서를 왜 죽여?”

“······.”

“우리에게 와라. 군단파로 오라고. 군단파에서 우리도 대접 받을 수 있어. 여기도 어웨이큰이 있긴 한데 걔들은 몬스터를 안 잡으려 들거든. 우리가 할 일이 생긴 거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를 거 같은데 세상이 그렇게 됐어. 아니 북한 애들이 그렇게 많이 넘어올 줄 누가 알았냐고?”

김필성이 계속 떠들어댄다.

나는 듣기만 했다.

듣기만 할 것이다.

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병사들이 곧 내 영역에 나타났다.

그들이 위장 하우스를 신경질적으로 뒤졌다.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컨테이너 벽을 발로 차는 소리도 들렸다.

“조심해. 이 주변에 부비트랩이 있을 거야.”

도청 장치에서 김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녀석이 가까이 있다.

나와 냉병기를 겨루던 내 동기가 가까운 곳에서 날 찾고 있다.

더미 방공호 안에 설치한 폭탄을 제외하면 부비트랩은 없다.

적어도 눈에 드러나게끔 함정으로 보이게 만든 건 없다.

교묘하게 각도와 단차를 조정해 발목을 부러지게 하는 함정이나 낭떠러지 앞에 수북한 관목과 잡초를 착시현상을 일으켜 발을 잘못 내딛게 만드는 종류의 트릭은 있지만 인공물은 설치하지 않았다.

내 영역의 가장 큰 방어력은 은밀성 그 자체기 때문이다.

죽음의 함정은 방공호 안에 있다.

크레이모어의 인계철선을 점검하고 원격 기폭 장치가 연결된 버튼의 연결부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삐- 삐-

동작 감지 센서가 쉴 새 없이 점멸했다.

동서남북. 전방위에 걸쳐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환기구 같은 걸 찾아봤는데 그런 것도 보이지 않고요.”

“하수로 쪽에도 딱히 생존자의 징후는 없습니다.”

도청 장치가 그들의 대화를 내게 알려줬다.

곧 김필성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론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수풀 속에 은신할 가능성이 높아. 어차피 맨 몸이니 도보로 이동한다 가정하고 그 영역 주변을 집중적으로 훑어. 멀리 못 갔을 게다.”

그 목소리가 들린 직후 무전기가 울렸다.

“박규. 김다람 아냐?”

“······.”

“그 위원까지 했던 건방진 계집애 말이야. 아, 이제는 무려 대령님이신가.”

“······.”

“김대령이 시킨 거야. 걔가 계획한 거라고. 우릴 신나게 쓰고 토사구팽한 그 개자식들 싸그리 쓸어버리려고 핵을 중국 놈들한테 사 온 거라고.”

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기분 탓일까.

안 좋은 가정이나 상상이 늘 현실로 일어난다는 건.

내 방공호에 가족을 데리고 내 변기를 보고 놀라워하던 내 후배의 얼굴이 눈앞에 사무친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내 변기가 다른 곳에 있었어도 그녀는 같은 선택을 했을까.

모를 일이다.

그녀는 날 보고 어려 보인다고 말했다.

뼈있는 조롱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자기는 현업에서 갖가지 고생을 하며 위기에 맞서는데 전장에서 도망치고 한가롭게 방공호나 만든 내가 나이만 먹은 어린 놈으로 보일 법 하겠지.

이제는 다르다.

내 후배가 이처럼 어려 보이는 적은 없었다.

도청장치에서 김필성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다람한테 연결해. 뭐? 바쁘다고? 개소리 말고 박규가 불었다고. 당장 연결하라 해!”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후, 다시 무전기가 울렸다.

“야. 박규.”

“······.”

“너 여기 있지? 응?”

“······.”

“김다람이 그러던데 너 여기 방공호 짓고 산다며? 응? 숨바꼭질 시작해볼까?”

폐부에 남은 마지막 한숨을 내뱉고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있다.”

장기영에게 주입받은 헌터의 철칙 하나가 그린 듯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와서 죽여봐라.”

죽음 앞에 초연하라.

나는 다르게 말하겠다.

추하게 죽진 않겠다.

개돼지처럼 붙잡혀 도살당하지 않겠다.

죽을 때까지 한 놈이라도 더 상처 입히고 물어뜯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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