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낙원 (3)
“뭐? 건강검진? 그게 뭐야?”
“메디컬 체크.”
“아하. 그런데 가능 해?”
내 이웃 중 건강 상태가 의심되는 건 저격수 모녀 쪽이다.
그녀를 설득해 함께 건강검진을 받기로 했다.
“캠프 더치구스.”
레베카가 우울한 눈으로 옛 미군기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떤 곳이지?”
전술핵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공군기지.
내가 가진 대략적인 정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미군은 신속하게 전략 자산을 회수하며 기지를 비웠다.
“내 남편이 있던 곳이야.”
“남편?”
“난 대구에 있었어. 남편은 여기.”
“남편은 어디 갔지?”
“미국에 갔겠지.”
“다행이네.”
“인터넷으로 찾고 있어.”
밤새 인터넷을 했는지 충혈된 눈이지만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덧붙였다.
“아빠 없는 딸, 만들기 싫어.”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그녀를 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남편, 찾았으면 좋겠네.”
레베카 모녀와 함께 미군 기지에 들어섰다.
이제 기지를 점거한 건 미군이 아니라 박철주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생소한 이방인들을 데리고 오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뭐, 뭐지?”
“외국인? 미군 군복인데?”
“아이는 뭐야?”
웅성거림 속에서 한 사내가 내게 다가왔다.
박철준의 사위 구성준이다.
“뭔가요? 이분들은?”
“제 친척입니다.”
“친척요?”
김필성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레베카를 보았다.
“친척, 맞나요······?”
“제 동생 마누라입니다. 그러니까 제 올케죠.”
“제수씨라고 하지 않나요?”
“아, 제가 좀 국제적이라 촌수에 대해 무지합니다.”
구성준은 그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입밖엔 내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구성준은 우리를 미군 지하 시설 안으로 안내했다.
시설 안은 그럭저럭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중 하나는 꽤 괜찮은 의무실로 꾸며 놓았다.
의무실 안엔 의료용 침대와 링거, 은빛 쟁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의료기구들이 있었다.
내심 불만스러웠던 레베카도 의무실의 풍경을 보자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정돈된 의료기구를 보니 신뢰감이 든 모양이다.
“의사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묻자 갑자기 구성준이 하얀 가운을 입더니 의료용 조명을 켜고 반사경과 청진기를 착용했다.
“제가 의사입니다.”
구성준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휴대폰을 내밀어 과거의 자신을 보여주었다.
대학 병원 의사, 그러니까 교수님이었다.
“자, 시작합시다.”
검진이 시작됐다.
피를 뽑고 입을 열어 차가운 쇠를 혓바닥에 갖다대고 혈압과 시력을 재고 요상한 망치로 무릎을 두들기는 등의 검사를 했다.
구성준이 약간의 놀라움을 담아 날 보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신다고 들었는데······.”
“대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죠.”
“그렇군요. 그런데 대자연에 살면 대부분 죽던데.”
정확한 지적이다.
그냥 대자연에 던져지면 이 박규도 죽는다.
“저는 어떤가요?”
“아주 건강하십니다. 우리 회장님만큼 건강하시네요.”
내 차례는 끝났다.
다음은 저격수 모녀다.
레베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해댔지만 구성준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고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있었다.
레베카가 헛소리를 하지 않을까 염려됐지만 적어도 영어를 쓰는 한 그녀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스우는 미국인답지 않게 구성준의 어려운 용어 몇 개를 못 알아듣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마다 레베카가 스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속말로 뜻을 말해주었다.
그 모습은 꽤 보기 좋았다.
이곳에 잘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베카 모녀의 검사가 끝나고 구성준이 내게 다가왔다.
“그쪽 제수씨와 그 딸은 그럭저럭 건강한 편이네요. 이 시대 평균이라고 할까. 만성적인 영양부족에 비타민 결핍이 우려되네요. 자세한 결과는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구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액검사는 하루 정도 걸릴 겁니다.”
하루라.
상당히 길게 느껴질 거 같은데.
허리띠를 추스르는 척하며 지나가듯 물었다.
“같이 제주도로 가시나요?”
“네?”
그가 날 보았다.
“회장님과 같이 제주도로 가시냐고요.”
“아니오. 저는 가지 않습니다.”
“비행기 멋지던데요?”
“걸프스트림. 세계적인 부호들의 장난감이죠.”
“누가 조종하나요?”
“파일럿이 있어요. 우리 회장님도 젊은 시절에 조종사 자격증이 있긴 합니다만. 아, 저도 자격증이 있습니다. 미국 경비행기 면허지만 말이죠.”
비행기 이야기를 하니 구성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내 분은 함께인가요?”
구성준이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포격에 죽었습니다. 아이랑 함께.”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그는 끔찍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너무나 무심하게 이야기해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죠.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이니까요. 저보다 훨씬 심한 꼴을 당한 사람도 부지기수니 그러려니 해야죠.”
구성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갈 곳 없으면 김필성씨한테 부탁해보세요. 좋은 자리 알선해 줄 겁니다.”
“좋은 자리요?”
“군단파라고 아시죠?”
“당연히 알죠”
“그쪽에서는 늘 유능한 헌터를 모집하고 있죠. 김필성씨 후배라는 분이 책임자라고 하던데 어쩌면 아는 사이실지도?”
“후배요?”
“네. 여성분인데.”
“성함이?”
“글쎄요. 거기까진 잘. 키가 작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야 그쪽과 비슷해 보이고요. 좀 더 어린 느낌도 드는데 20대 초중반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때 한 여성이 진료실에 들어왔다.
“교수님. 김필성씨가 찾습니다.”
“아, 네. 잠깐만요.”
구성준이 내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가 날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아, 혈액 검사 결과는 내일 나올 겁니다. 한 번 더 찾아와주세요. 가까우니.”
그가 떠난 후 레베카 모녀에 합류했다.
둘은 썩 만족한 눈치.
스우는 아이스바까지 손에 들고 있었는데 레베카가 딸의 것을 큰 키를 굽혀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있었다.
스우가 영어로 뭐라고 잔소리를 해보지만 레베카는 입안에 차가운 게 가득 차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또 차가운 걸 갑자기 많이 먹어서 그런지 두통이 왔는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엄마. 너무 해.”
약간의 소동이 진정된 후 모녀가 날 동시에 응시했다.
“고마워. 스켈톤.”
“땡큐.”
둘을 먼저 돌려보냈다.
둘은 자전거를 사이좋게 타고 신록으로 물든 초원을 향해 느릿하게 나아갔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후우.”
아까 구성준이 이야기 한 군단파의 책임자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설마 김다람인가.
이제는 연락이 끊어지고 소식도 알 길이 없고 무전기마저 다른 녀석에게 뺏긴 그 김다람인가.
김다람은 괜찮은 녀석이다.
나와 합이 잘 맞았고 눈치도 빠르고 처세술도 뛰어나다.
물론 단점도 있다.
지나치게 은원을 따지는 성격이다.
특히 앙심을 품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이상훈을 끝까지 이상훈씨라고 부르는 태도는 그에게 당한 게 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골은 같은 직장에서 같은 취급을 받는 상황에서도 해결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군단파에 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녀가 살아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왜일까.
이 서늘한 느낌은.
어제 보았던 핵폭탄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마음에 걸린다.
무엇보다 방금 유도신문에서 구성준은 엉겁결에 진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제주도로 가냐는 물음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지영희의 말과는 전혀 다르다.
지영희는 비행기의 행선지가 일본이라고 말했다.
일본, 제주도, 비행기, 핵폭탄, 재벌 회장, 그리고 김다람.
“······.”
좋지 않은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내 주변에 감도는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깥 공기를 마시려고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문가에 누군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말쑥한 양복을 입은 초로의 사내.
박철주다.
그가 빤히 날 쳐다보고 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가만 보고 있자니 그가 느릿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권총 있나.”
그가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총기를 든 사내 쪽을 보는가 싶었는데 정작 그들은 박철주에게 별 관심을 쏟지 않았다.
경호원이라는 사람들이 경호 대상에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권총요?”
“하나만 팔아줄 수 있어? 다마. 다마 있는 걸로.”
“어디에 쓰시려고요.”
“레저용이지.”
“회장님은 권총 없습니까?”
박철주가 주머니 안에 손을 넣더니 차갑고 묵직한 물건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금괴다.
“ESFP.”
그가 말했다
“나 사실 ESFP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간절하게 나의 권총을 갈구하고 있었다.
갖고 있던 권총을 그에게 내밀었다.
“사용법은 아시죠?”
“몰라.”
“이걸 이렇게 놓으면 안전장치를 풀립니다. 이 부분을 잡고 누르면 탄창이 빠지고요. 방아쇠를 당기면 탄환이 나가는 건 알고 계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박철주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내 설명을 들었다.
처음 봤을 때 느낀 광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이 이 사내의 진짜 모습인가.
문득 든 생각이다.
그가 권총을 안에 넣으며 비행기 쪽을 주름 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오가사와라 제도. 거길 아나?”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좋은 곳이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아니지만 가장 마음에 들던 곳이야. 그러니까 낙원 같은 곳이지.”
“낙원이라······.”
“자네에게도 낙원이 있나?”
“글쎄요.”
나는 내 방공호를 떠올렸다.
사전적 의미의 낙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단지 현실적인 의미에서 내 방공호만한 장소가 없기에 내 방공호를 떠올린 것이다.
“전 여기가 마음에 드네요.”
“그럼 거기가 낙원이지.”
“그런가요?”
중앙에 변기가 있는 낙원이라.
그런 낙원은 대체 어떤 낙원일까.
“난 아직 낙원을 찾지 못했어.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놈들이 다 부숴버렸지. 뭐, 걔들이 안 부셨어도 결론은 비슷했을 거야.”
“왜요?”
“낙원이라고 생각한 곳도 결국 단점이 하나둘 보이거든. 마음에 안 드는 곳을 낙원이라고 부르지 않잖아?”
그 대목에서 나는 저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지영희다.
“낙원이 낙원이 아니게 되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낙원이라는 게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단점이 자꾸 보이면?”
“난 새로운 낙원을 찾는 편이지. 그러니까 끝없는 여정이야. 한 낙원을 찾고 거기서 실망을 하고 다음 낙원으로 향하는 거지. 또 거기서도 실망하고.”
“제논의 역설 같군요.”
“그래. 제논의 거북이 같은 거지. 따라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런데 말이야.”
우리에게 다가오던 지영희가 박철주를 불렀다.
“회장님.”
박철주가 고개를 돌려 지영희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낙원을 찾는 과정 자체가 재밌지 않나?”
그는 다시 자신의 비행기를 흐뭇한 눈으로 응시했다.
“오가사와라. 오가사와라.”
박철주는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현재 그가 그리는 낙원을 되뇌며 돌아섰다.
그가 자리를 떠난 후 지영희에게 물었다.
“오가사와라 제도로 가는 겁니까?”
지영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나요?”
“언제쯤 출발하나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네요. 한 이틀 정도?”
“그렇군요.”
방공호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우민희에게 연락을 취했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저 비행기의 행선지는 제주도로 보이니까.
몰락한 재벌 회장이라는 예쁘장한 포장 케이스 안에 악의를 꾹꾹 눌러 담은 핵폭탄을 넣어 그들을 배신한 제주 정부에 통한의 일격을 가한다.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제주도가 중요한 거 맞지?”
“응.”
우민희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안 중요하겠어.”
“무슨 일을 하는지 조금이라도 알려줄 수 있냐?”
“갑자기?”
우민희의 음성이 날카롭게 변했다.
진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거기서 대화를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중요한 일이야.”
“선배. 선배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지?”
“알지.”
“민간인이잖아.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선배는 시각에 따라 군단파로 몰릴 수도 있다고?”
“······우민희. 부탁이다.”
그녀가 보일 리 없겠지만 고개를 숙였다.
무전기 너머에선 한동안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후, 그녀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박 선배. 부탁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네.”
“······.”
“진작 부탁하지 그랬어?”
그녀가 조롱조로 물었다.
조롱에 답할 말은 없다.
반성을 가장한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무거운 침묵이 지난 후 다시 우민희가 입을 열었다.
“그때 말이야. 그때 강한민에게 부탁했으면 지금처럼 이상한 곳에 처박혀 살지 않았어도 됐잖아? 솔직히 선배가 이상훈 선배보다 높은 자리 받는 거, 누구나 알 수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걸 이제 와서······.”
스피커 너머에서 날카로운 쇠 소리가 갑자기 고막을 긁었다.
의수로 어딘가를 긁기라도 하는 걸까.
다분히 악취미적인 행동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민희답다고 생각하며 답변을 기다렸다.
“······균열을 닫을 거야.”
기다림의 결과는 실로 값졌다.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물었다.
“···가능한 이야기냐?”
“인도에서 최저강도의 균열을 닫는데 성공했어. 이미 인구 99.8%를 잃은 이후에 얻은 성과긴 하지만.”
“······!!”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내 눈에 인화성 물질이 있다면 눈동자가 불에 탔을지도 모른다.
내 앞에 이상훈이 서 있었다.
그 얄미운 놈이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결국 녀석이 내 뒤통수를 치려는 건가.
만년 내게 뒤지던 그 부잣집 도련님이.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우민희는 말 이외의 노이즈가 들리는 걸 아주 싫어하니까.
대신 심장을 타고 피가 빠르게 도는 걸 느끼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강한민과 나혜인이 지금 균열을 닫고 있어.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
“인터넷에 올리지 마. 올리면 바로 찾아갈 거야.”
“인터넷이 뭐지?”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럼 끊는다?”
그렇다면 나도 같은 진실로 응대해야겠지.
“핵을 발견했다.”
내가 본 사실을 이야기했다.
박철주, 자가용 비행기, 중국인, 김필성, 오가사와라 제도, 그리고 핵에 관한 이야기를.
우민희의 감상은 짧고 무거웠다.
“제주도겠지.”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제주도에 핵을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겠지.”
나는 우민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지만 대체로 그녀의 생각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
그녀가 피식 웃었다.
“김다람, 걔 생각일지도?”
“김다람? 군단파에 있는 거냐?”
“그렇지 않을까?”
“너도 모르는 거냐?”
“선배는 냄새 안 나?”
우민희가 잔혹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마 지금 그녀는 어두운 연구소 안에서 물결무늬를 칠 수 있는 의수의 손가락을 움직이며 미소짓고 있겠지.
“걔. 제주도, 제주도 노래를 불렀잖아?”
“······그렇긴 하지.”
“가질 수 없는 낙원이라면 차라리 부숴버리겠다. 야누스 같은 그 여자에게 어울리는 생각 아니겠어?”
그럴 거 같다.
김다람이라면.
그녀가 살아 있고 군단파에 의탁했다면 자신을 버리고 받아주지 않은 사람들, 제주도에 있는 배신자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지 않을까?
한때 자신이 그리던 낙원을 불태우고 싶지 않을까?
“정보 고마워. 연락 트길 잘했네. 제보 안 해줬으면 영영 모를 뻔했어.”
“······이쪽이야말로.”
“한바탕 전투가 벌어질 거야. 선배는 피해 있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내 영역에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부른 재앙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주도를 잃을 수 없다.
거기엔 나의 전우 이상훈이 남긴 낙원이 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