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불멸 (2)
바다를 보는 건 오랜만이다.
특히 낙조를 품는 바다를 보는 건.
캠핑 의자에 앉아 붉은 태양이 바다에 들어가 바다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걸 멍하니, 하염없이 응시했다.
땅거미가 들판을 덮어올 무렵 향긋한 향기와 함께 드래곤씨가 나타났다.
“커피 한잔하고 가.”
드래곤씨는 잘 준비된 멸망주의자였다.
그의 방공호는 나처럼 압도적이진 않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방공호보다 넓고 쾌적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식량 또한 넉넉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무기였다.
드래곤씨는 나처럼 중국제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에 중국군 시체가 쓸려온 적이 있었지. 참 많이도 쓸려왔었지. 국군 잠수함이 걔들 함대를 아주 아작을 냈거든. 저 앞바다에서 두 척이나 반으로 쪼개져 가라앉았어. 그때 시체 몇 구가 흘러들어왔고 몇 개 슬쩍했지.”
가장 인상적인 건 커피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2년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는 커피 원두를 가지고 있었다.
“내 영혼 절반은 술과 담배, 나머지 절반은 커피로 이루어져 있지.”
커피만이 아니다.
그는 전문 카페집에서 볼 법한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갖추고 있었다.
모처럼의 호사에 나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깃드는 걸 느끼며 기꺼이 우리 바리스타의 한잔을 기다렸다.
그가 원두를 볶는 동안 그의 방공호 안을 보았다.
휑하고 황량하다.
나처럼 변기가 중앙에 있진 않지만 거칠게 마감된 콘크리트의 균열과 결로 자국, 군데군데 핀 곰팡이 자국은 방공호 건설이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드래곤씨는 아마 자신의 작품으로 보이는 익숙한 그림체의 웹툰 포스터를 곳곳에 붙여 방공호의 우울한 공기를 덜어내려 했지만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술병과 빈 담뱃갑은 오싹함과 더불어 일종의 연민을 자아내게 했다.
담배도 담배지만 술이 하나 같이 도수가 40도가 넘는 독주라는 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런 걸 수백 병이나 이미 비웠다.
그래서일까? 그의 안색이 그토록 좋지 않은 건.
“몸은 좀 어때?”
“나? 안 좋아 보여?”
“조금.”
“약 먹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무튼 여길 보시라. 이게 나, 드래곤씨의 작업장이야.”
방공호 한 구석에엔 목각 인형, 각종 작법서와 해부학 서적, 프린터, 여러 개의 조명과 보조 모니터, 타블렛을 갖춘 작업대 등이 있었다. 책상에 널린 수많은 글귀와 콘티는 과연 그가 프로 작가라는 걸 짐작하게 할 정도의 전문성이 있었다.
책상 한 구석엔 앙증맞은 소품도 하나 있었다.
조그만 어항에 엄지손가락만 한 모조 금붕어 한 마리가 물 안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금붕어는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주제에 멍청하게 생긴 얼굴을 여기저기 돌리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는데 대단한 원리가 있는 게 아니라 본체 자체가 워낙 가벼운지라 주변의 작은 진동에도 반응했기 때문이다.
멍하니 둥둥 떠서 움직이는 금붕어를 보고 있자니 드래곤씨가 내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오.”
맛있다.
이 얼마 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커피냐.
절로 눈을 크게 뜨고 따뜻한 잔 안에 담긴 어두운 액체를 새삼스레 응시했다.
“또 있으니 아끼지 말고 마셔. 솔직히 이 멀고 위험한 길까지 부른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례니까.”
드래곤씨가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이미 바다는 어둠으로 물든 뒤였다.
칠흑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두 커뮤니티 유저가 나란히 앉아 어두운 바다와 그 위로 하나둘 떠오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늦깎이 작가는 아니었어.”
별들을 바라보며 드래곤씨가 흐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히려 고교 졸업하기 전부터 만화의 길에 뛰어든 대책 없는 놈이었지.”
드래곤씨가 어릴 때만 해도 한국에서도 이른바 챔프류라 불리는 주간 연재만화 잡지가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만 해도 종이책 만화가 갓 태동하기 시작한 웹툰보다 우월하며 상위의 만화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했다.
드래곤씨도 그중 하나였다.
“책장을 넘길 때의 두근거림. 그게 내가 만화를 좋아한 이유였지. 스크롤은 그 재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드래곤씨의 첫 인상은 생각한 것보다 나이가 들었고 친해지기 어려운 까탈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천상 만화가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전 페이지에 악당이 범접 못할 포스를 풍기며 와, 이 새끼 진짜 세다! 이런 이미지를 심어줬단 말이야. 그러면 독자는 궁금해하는 거지. 대체 이런 새끼를 어떻게 이겨야 하냐? 그 조바심과 호기심, 그리고 악당이 두들겨 맞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책장을 막 넘기는 거지!”
만화라는 소재를 이야기할 때 엄창이만큼이나 어린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적어도 만화책 한 권은 그 분량만큼의 세상을 내 마음대로 펼쳤다가 덮었다가 할 수 있거든. 웹툰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손안에 있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딸깍하는 세계는 글쎄. 뭔가 달라. 콕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야.”
조금은 두서없이 시작한 그의 인생사는 물 흐르듯 그가 당면한 문제와 맞닿았다.
“그런 만화를 그린 내가 다른 놈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어. 그건 사실이야. 함께 문하생으로 있던 선배, 동기들도 다 비슷한 생각이었으니. 그런데 재능이란 건, 어쩔 수가 없더라. 도구가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도 결국 그림만큼 재능의 차이가 눈으로 느껴지는 영역도 없거든. 나야 음악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그림은 눈으로 보이잖아?”
드래곤씨의 시선은 바다를 넘어, 그에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의 굴욕감을 선사한 한 사내를 떠올리고 있었다.
“웹툰이건 종이 만화건 잘 그리는 놈은 잘 그려. 필크럼 같은 놈이 그런 놈이지.”
“좀 그리긴 하더라. 특히 여자를 잘 그리던데.”
“뭐, 일본에서 태어났으면 천만 부 팔았을지도 모르는 인간이지.”
“흠, 그 정도인가?”
“선만 보면 보여. 게다가 그런 놈들은 쉽게 그리지. 내가 좆빠지게 구상하고 밑그림으로 색칠하듯 선을 그어야 간신히 완성하는 한 컷을 그런 애들은 그냥 슥 보고 슥슥 그으면 그냥 끝이야. 그런데 간단하게 그린 게 내가 몇 시간 동안 붙잡은 것보다 더 완성도가 있다니까? 그림만의 문제가 아니야. 걍 구도를 생각한 족족 뽑아내니 연출도 당연히 좋게 나오지. 그런데서 차이가 나오는 거야. 게다가 난 손조차 느렸지. 작업 방식이 지나치게 번거로웠거든.”
“어떻게?”
“난 글을 써야만 뭔가가 연상되더라고. 콘티를 짜도 글 콘티를 짜고 다시 그림 콘티를 짜야 했지.”
“확실히 번거롭긴 하네.”
드래곤씨가 남은 커피를 털어 넣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의 차이인 거지.”
여기에 대해 딱히 보탤 말은 없다.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드래곤씨는 적어도 나보다는 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만화는 그림이 전부가 아니야. 결국 만화가도 넓게 보면 이야기꾼이잖아?”
“그건 그렇지.”
“솔직히 이야기꾼 재능으로는 내가 필크럼보다 위라고 생각해. 게다가.”
툭
드래곤씨가 가볍게 내 팔을 쳤다.
“최고의 모델도 있고.”
“내 콜사인은 프로페서가 아니라 댄디. D.A.N.D.Y.”
“알아. 알아. 하지만 비밀로 할 거야. 당연히 자료조사에 적극 응해주신 모델분 신상은 비밀로 보호해줘야지.”
“댄디하군.”
“타이푼 어때?”
“······타이푼?”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댄디보다 수천 배는 더.
그야말로 프로 작가의 날카로운 센스가 느껴지는 작명이라고 할까.
“가드 출신 현역 헌터 타이푼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단편을 그릴 거야. 리얼리티와 심리묘사 이런 걸 팍팍 섞어서.”
드래곤씨가 굳은살이 배긴 오른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놈 본진에서 승부할 거야.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거지.”
“오호.”
“자, 잠까만! 어억! 어으으으윽!!!”
그토록 강렬한 자신감을 내비치던 드래곤씨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더니 고통을 호소했다.
상당한 격통으로 보인다.
발끝까지 부르르 떠는 걸 보면.
“······씨발.”
달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드래곤씨가 중얼거렸다.
“뭐냐?”
“······아니, 그냥 발작이야. 지병 같은 거지.”
방공호에 잔뜩 쌓여있던 술병이 내 눈앞을 덮어나갔다.
그 많던 독주들.
아마 어쩌면 그것이 평생 그저 그런 상태를 살아야했던 한 사내를 버티게 한 원동력일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그를 좀 먹는 죽음의 병이었을지도 모른다.
“많이 안 좋은 거 아니냐? 처음부터 진짜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던데.”
“괜찮아. 아직 버틸 만 해. 약도 있고. 환갑까지는 못 살겠지만 내가 5년 정도 버티고 죽는다고 치면 그땐 다들 다 죽어있지 않을까?”
“3년도 못 버틸걸?”
“내가?”
드래곤씨가 반감을 드러냈다.
즉시 오해를 풀었다.
“아니. 우리들.”
“전직 헌터 출신 의견이라 더 믿음이 가네.”
드래곤씨는 찡그린 얼굴 위에 애써 미소를 떠올리며 먼 바다를 보았다.
멀리 작은 섬에서 불빛이 일렁거린다.
중국군의 것일까.
아무튼 이별의 시간이 왔다.
드래곤씨는 알약을 몇 개 물도 없이 씹어 삼키고는 날 향해 엄지를 세워 보였다.
“고마워. 스켈톤. 덕분에 펜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됐어.”
그가 내게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이번에 필크럼과 대결을 펼칠, 나를 모델로 한 단편의 시놉시스가 휘갈겨 쓴 필체로 적혀 있었다.
“페일넷 불판. 꼭 보고 있으라고!”
그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에게 엄지를 세워보이며 대답했다.
“······내 콜사인은 댄디.”
“그만하라고!”
잠시 후, 드래곤씨가 알약을 삼키고 내게 돌아왔다.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명랑한 얼굴로 내게 묵직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내 작은 선물이야. 내 소품집이지.”
“소품집?”
“단편 모음? 아이디어 같은 것도 있고. 심심할 때 읽어 봐. 재밌진 않겠지만 시간 때우기로는 충분할 테니까.”
“이런 귀한걸?”
“그거 카피본이야.”
“파일로도 충분 할 거 같은데.”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난 만화를 손으로 넘기면서 읽는 그 감각이 좋다고. 뭐 인쇄한 거나 모니터로 보는 거나 그게 그거겠지만.”
“오, 고마워.”
“아.”
드래곤씨가 갑자기 탄성을 내뱉었다.
그가 날 돌아보며 소년같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한데 나중에 보면 안 될까?”
“?”
“지금 보면 스포일러 같아서 말이야.”
“흠.”
“부탁할게. 스켈톤.”
나보다 연장자고 네임드인 유저가 부탁하는데 거절 할 순 없지.
“내 콜사인은······.”
“댄디!”
*
한 편의 만화가 페일넷의 만화 연재 게시판에 올라왔다.
작성자는 DragonC.
단편은 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구식 헌터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실력은 충분하지만 늘 2% 모자란 모습 덕에 만년 A급으로 머문 그는 S급이라는 등급에 대해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위기가 찾아왔다.
상정하지 않은 구역에서 중형 몬스터가 출현했고 퇴로는 순간이동으로 뒤를 장악한 네크로맨서 타입과 그것이 일으켜 세운 좀비로 막히고 말았다.
전투는 등급 따위가 아닌 삶과 죽음의 문제로 변했다.
동료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이제 싸울 수 있는 건 그 하나. 그는 도로를 장악한 좀비 떼를 상대하다간 결국 탈진이 된 상태로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걸 알아차리고 대로를 막아선 중형종 몬스터를 노려본다.
살아 남은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 헌터, 타이푼은 이미 S급을 아득히 넘어섰다고.
“······흠.”
역작이라고 부른 것 치고는 2% 부족해보인다.
작중의 주인공 콜사인 “타이푼”처럼.
하지만 진중하고 말 없는 주인공, 철저한 로맨스의 배제, 무엇보다 현실에 기반한 고증과 리얼한 전투 묘사는 까탈스러운 페일넷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드래곤씨는 시간 차를 두고 신작 “타이푼”을 우리 게시판에, 고화질 버전으로 업로드했다.
반응은 당연하게도 열광적이었다.
익명848 : 와
keystone : 헌터 전투 그렇게 리얼한 건 처음이야.
Dies_irae69 : 전투 고증이 장난 아닙니다.
THE_LAST_MAN : 죽이네
익명458 : 필크럼한테 한 방 먹고 칼 갈고 나왔네 ㄷㄷ
kimcic : 역시 드래곤씨다. 우리 드래곤씨가 최고여!
unicorn18 : 여캐 없네... 노잼이네....
gijayangban : 고증 리얼하네. 올드스쿨 출신한테 자문이라도 받은 거야?
James_Catterer : wow
James_Catterer : Can somebody translate this to English? :)
“야. 스켈톤. 방금 드래곤씨가 올린 만화 봤냐?”
디펜더가 내게 연락했다.
대체 스서방과 스켈톤의 기준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교신에 응했다.
“봤지.”
“100%야. 분명 아는 헌터 있어. 조금 올드한 것도 있긴 한데 이건 현장을 뛰어본 놈밖에 모르는 내용이야.”
이에 나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기밀유지 서약을 한 건 드래곤씨만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