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53화 (53/183)

36. 변신 (1)

느닷없이 떠오른 생각이 나를 홍안의 소년으로 만들었다.

발단은 페일넷이었다.

뭔가 큰 목적을 가지고 페일넷에 접속한 건 아니었다.

늘 그렇듯 별생각 없이 대체로 무의미한 정보들을 여과 섭식하던 중 한 게시판에 시선이 꽂혔다.

[ 가드 수험생 게시판 ]

이 게시판은 그러니까, 내 후배가 되려는 친구들의 모임이다.

게시판 순위는 무려 8위.

대형 게시판이다.

이용자는 십 대 중후반의 청소년 집단.

이들은 정부 청사나 군시설 벽에 붙어 전파를 구걸하며 간신히 페일넷에 접속해 시답잖은 글을 올리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는데 이 게시판의 대외적인 평판은 순도 99%의 “앰창인생”들이 모인 곳이란다.

실제로 나도 이전에 이 게시판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지나칠 정도로 이용자의 수준이 낮고 유치해서 잠깐 있다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 게시판에도 나름 흥미로운 문화가 있었다.

그 문화란 다름 아닌 리트지 인증 – 우리 집에도 걸려 있는 정신감응 테스트지를 인증하고 품평을 받는 것이다.

가드 수험생 게시판에서 인증 태그로 검색하면 이 어린 친구들의 시기심과 승인 욕구, 음험한 험담과 가뭄에 콩나듯 보이는 진솔한 칭찬을 볼 수 있다.

ㅇㅇ : 리트지 떴냐? (34)

ㅇㅇ : 리트지 인증 ㅋㅋㅋ (12)

ㅇㅇ : 희, 흰색 떴냐?! (8)

ㅇㅇ : 이 정도면 제주도 갈 수 있나요? (31)

ㅇㅇ : 엄마 뒤진 날에 흰색 떴네 ㅋㅋ (131)

...

...

검색만 하면 개나 소나 흰색을 받은 거 같은데 실제로 열어보면 죄다 검은 색이다.

흰색도 간간이 있긴 했는데 리트지가 아니라 백지를 리트지처럼 찢어 엉터리로 인증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이 장난과 낚시로 가득 찬 게시글 중에서도 진짜 인증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리트지가 색채에 따라 시험자의 사이킥 잠재력에 차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각각의 색채에 정확히 어느 단계를 의미하는 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게시판에서는 어렴풋이나마 색채가 의미하는 어웨이큰 레벨을 암시한 글들이 꽤 보였다.

한 게시글에서 나는 청색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냈다.

1레벨이란다.

그러니까 싸이킥 능력의 최소한에 눈 뜬 정도라고.

회색은 5레벨 이상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백색이 몇 레벨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레벨과 별 개로 흥미로운 현상도 찾을 수 있었다.

그건 이 게시판에 애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 교육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답게 이 순도 99%의 앰창인생 게시판에도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 다수가 상주하고 있었다.

ㅁㅁ : 회색이면 좋은 건가요? 일가족 전부 제주도 갈 수 있는 건가요? (43)

창민엄마 : 우리 아이 리트지 색깔이 이렇게 나왔는데 어느 정도인가요? (88)

쉐프파덜 : 어떻게 하면 검은색에서 흰색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례 있습니다 (132)

...

...

그러나 이곳은 그들의 교육열이 통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싸늘한 곳이었다.

ㅇㅇ : ㅁㅁ님 색맹이세요? 색깔 구분 못하세요? 검은 색이잖아! 이 미친년아 ㅋㅋㅋ (9)

창민엄마기둥서방 : 내연녀 아이 리트지 색깔이 이렇게 나왔는데요(인증) (33)

쉐프파덜님보세요 : 아이 가챠 다시 돌리세요 (13)

일말의 거리낌 없는 원색적인 조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진짜 중요한 “어른”은 따로 있었다.

수많은 사칭꾼과 어그로꾼, 시비쟁이, 저학력 정신병자로 넘쳐나는 이 게시판에서 그 어른은 아주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REDMASK : 안녕하세요? 가드 입학사정관이에요. 링크 줄 테니 클릭하세요.

레드마스크.

이 게시판의 절대자다.

누구도 레드마스크에게 악플이나 비아냥, 시비를 걸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레드마스크는 이 게시판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걸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레드마스크라는 닉네임.

나에게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민희······?”

처음 그 닉네임을 본 순간 나는 바로 의수와 의족을 찬 혐오스러운 여성을 떠올렸다.

우민희가 쓰는 개인식별번호와 똑같다.

그녀의 연구 시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우연의 일치라고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 연구시설엔 제주도에 가고 싶은 아이들이 백 명도 넘게 좁은 방에 감금되어 있었고 일부는 죽어서 해부대 위에 놓여 있었다.

“······.”

이 레드마스크.

틀림없다.

우민희다.

그녀는 나와 달리 SNS를 즐겨 하던 사람이었다.

특히 인싸그람이라는 SNS를 즐겨 했는데 글을 통한 심경 표명보다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은근히 드러내는 걸 즐겼다.

나는 그녀가 헌터 신분을 암시하는 글을 SNS계정에 올려 국위원 컴플라이언스 부서에 주의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팀장인 내가 직접 쓴소리를 들었다.

팔로워 만 명 넘는 계정을 가진 헌터가 헌터라는 걸 드러내는 건 기밀유지서약 위반이라고.

이토록 인터넷에 친한 그녀가 페일넷이라는 멸망기 최대 인터넷 게시판에 발을 안 담글 이유는 없다.

다만 그녀의 작성 글만을 보고 정체를 추측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글을 작성하는 대신 늘 댓글만을 달았다.

그 댓글의 내용은 한결 같았다.

REDMASK : 안녕하세요? 가드 입학사정관이에요. 링크 줄 테니 클릭하세요.

대화는 그 링크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양.

메시지 기능이 없는 페일넷의 약점을 사적 네트워크에 연결을 유도하여 해결하는 발상은 내가 아는 우민희의 번득이는 창의성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우민희.”

그 시점에서 나는 수험생 게시판의 슈퍼 네임드 REDMASK가 우민희일 거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 여자는 대체 그 연구시설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제주도에 생겼다는 새로운 학교 학생을 선발하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외에도 잡다한 연구를 하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우민희는 12레벨 어웨이큰이다.

대한민국에 10레벨을 넘는 어웨이큰은 열 명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을 통틀어 10명도 안 되는 인재가 제주도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강한민과 나혜인에 대한 반감을 이유를 들었지만 그것만으로 그 교활한 우민희가 안전한 제주도를 버리고 위험으로 가득 찬 수도권에 남을 리가 없다.

“······.”

분명 뭔가 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 여자의 속을 알 수 있을까.

무심코 책상에 붙여놓은 은사의 로켓 도끼 그림을 보며 쓴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였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래, 직접 접촉하면 되잖아?

박규, 스켈톤, 프로페서가 아닌 ㅇㅇ이라는 페일넷의 익명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가드 수험생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소년 중 하나가 되어 그녀가 나에게 접근하게 만들어 내가 원하는 정보를 캐내는 것이다.

우민희를 낚을 미끼는 있다.

은사의 하얀 리트지다.

리트지엔 마치 지폐처럼 기믹이 있는데 리트지의 기믹은 미리 검정색으로 인쇄된 학교의 마크를 인쇄해놓고 리트지가 변할 때 그 마크가 드러난다.

은사의 하얀 리트지는 그가 직접 고안한 학교의 마크 – 해골과 반쯤 부서진 방패가 순백색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 정도 인증이면 우민희의 관심을 끌고도 남겠지.

그녀는 제대로 된 회색 인증만 해도 직접 출현해 모두가 원하는 “간택”을 했으니까.

다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바로, 그녀와의 대화다.

아무리 익명을 사용한다고 해도 나는 지난 2년간 인터넷 경험으로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나 글, 거기서 드러나는 미묘한 사상이 상상 이상으로 특정성을 가진다는 걸 발견했다.

가령 나를 예로 들면 나의 특정성은 존내논 스타일의 머리글과 낳낫 드립, 그리고 다소 사람들의 취향을 앞서간 하이 개그일 것이다.

이곳 가드 수험생 게시판의 이용자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내가 쓰는 언어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 상황에서 우민희와 대화를 시도하면 최악의 경우 내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다.

디펜더가 말하길 나는 인터넷을 못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변신을 결심했다.

최후의 인류가 될지도 모르는 이 프로페서 박규가 가드 수험생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10대 초반의 소년이 되기로.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인터넷이 얼굴이 안 보인다고 나이를 속이기 쉽다고들 말한다.

절대 아니다!

자판이라고 해서 늙은이 냄새가 안 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신의 거울인 활자야말로 나이와 세월의 냄새가 어느 것보다 강하게 묻어 나오는 법이다

시험 삼아 수험생 게시판에 글을 올려보았다.

ㅇㅇ : 우리 동년배들 재밌게 노시네 ㅎㅎ (3)

3개의 댓글.

한 번 읽어보자.

ㅇㅇ : 뭔 동년배 ㅇㅈㄹ?

ㅇㅇ : 몇 살이세요?

ㅇㅇ : 아재요 가서 정치 이야기나 하러 가세요;;

“······.”

30대 초반의, 갖가지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하드보일드 남자가 10대의 경솔하고 경박한 소년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각오와 더불어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탁 탁 탁

작성자 닉네임 : ㅇㅇ

먼저, 스켈톤이라는 개성 있는 닉네임 대신 다른 사람과 똑같은 ㅇㅇ라는 가면을 쓰는 것.

탁 탁 탁 탁

ㅇㅇ : 이야! 섺쓰!

개성과도 같은 머리글을 지우고 글로서 아무 의미 없는 헛소리를 적는 것.

탁 탁 탁

ㅇㅇ : 여기 30대 이상 없지...?

내 나이를 속이는 것.

탁 타탁

-왜 있는 거야...?

30대의 나를 잊는 것.

“······.”

이 정도면 완벽하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제 우민희와 접촉할 때가 왔다.

탁 탁 타닥

출사표를 던지는 제갈량의 심정으로 글을 썼다.

201cm120kg28cm : 리트지 테스트 해 봄 핑까 좀

-ㅍㅌㅊ?

글은 최대한 짧게.

제대로 된 문장은커녕 글자조차 아닌 초성을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구사하는 것.

이 게시판 소년들의 언어를 흉내 내면서 동시에 내 은사의 리트지를 옥외의 위장 하우스의 햇빛에 노출한 상태로 촬영해 올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201cm120kg28cm : 리트지 테스트 해 봄 핑까 좀 (103)

“오.”

댓글이 100개나 넘게 달렸다.

ㅇㅇ : 뭔데 이거?

ㅇㅇ : 도용아니야?

ㅇㅇ : ㄹㅇ 같은데

ㅇㅇ : 이 새끼 미술 좀 했네

ㅇㅇ : 야, 이거 진짜 같은데?

영민아빠 : 저기 실례지만 어디 사세요? 닌텐도, 노트북, 먹을 거 잔뜩 있어요

ㅇㅇ : 합성 아니야?

ㅇㅇ : 키에 비해 구추가 작으시네여...

...

...

어린 친구들도 진품을 알아보는 모양이군.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건 이들의 반응이 아니다.

내가 낚으려는 건 단 하나.

레드마스크다.

*교신기가 울렸다.

“스켈톤.”

누군가 했더니 다정이다.

“뭐냐? 갑자기.”

“페일넷 수험생 게시판에 올린 글 이거 스켈톤이 올린 거야?”

“뭐? 무슨 글?”

“2미터 어쩌구 저쩌구.”

“너 수험생 게시판 하냐?”

“아니? 불판에서 봤는데?”

불판?

설마 내 게시글이 페일넷의 인기글 리스트에 올라갔단 소린가.

어떻게 할까.

굳이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이건 나와 우민희의 문제니까.

“내가 올린 건 아니야.”

“하긴 스켈톤이 올린 것 같진 않더라고. 혹시나 싶어서 연락해봤어.”

“그,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닉네임은 전에 본 그 존내논 스타일이긴 한데, 글 올린 것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다른 사람이 올린 느낌?”

디펜더 동생의 말을 듣고 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른 건 당연한 결과다.

저 디펜더마저도 나를 인정하고 있다.

나를 10대 소년으로 인지한 것이다.

스켈톤의 변신은 무죄.

이제는 우민희의 연락만 기다리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입질이 왔다.

REDMASK : 안녕하세요? 뉴 가드 입학사정관입니다. 링크 줄 테니 클릭하세요.

REDMASK : <링크>

링크를 클릭했다.

그러자 인터넷 브라우저가 갑자기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트에 자동으로 접속됐다.

게시판에서 떠도는 이야기처럼 극도로 단순한 인터페이스.

사이트는 예전에 유행하던 인터넷 채팅방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 REDMASK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REDMASK : 안녕하세요? 뉴 가드 입학사정관을 맡고 있는 레드마스크라고 합니다.

REDMASK : 자기소개 부탁할게요~

REDMASK : 하단 작성자에 이름과 나이 적어주시고(예: 민희20) 입장 버튼 눌러주세요오~~~

우민희가 먼저 채팅을 쳤다.

그것도 한 번에 세 번이나.

이 여자, 채팅은 어떻게 치는 거지?

팔 하나가 없는데. 물결무늬까지 칠 줄이야······.

어웨이큰은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음성 인식 채팅을 이용하는 모양이다.

최근에 나온 음성인식 기술은 신뢰도가 매우 높으니까.

아무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마음을 비우고 10대의 소년을 마음에 그린다.

프로페서 박규가 아닌, 10대의 장난꾸러기 스켈톤을.

그리고 타이핑을 친다.

타닥 타닥

-엄창11님이 입장하셨습니다.

REDMASK : ?

REDMASK : 어, 엄창?

엄창11 : 안녕요

REDMASK : 뭐니. 그거 혹시 이름이니?

엄창11 : 네. 엄뒤 엄에 노래 부를 창. 김엄창요. 11살임니당.

REDMASK : 아하.

엄창11 : 왜요?

REDMASK :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냥 특이한 이름이다 싶어서.

엄창11 : 네

REDMASK : 엄창이 나이 열한 살 맞지? 만으로?

엄창11 : 네

REDMASK : 엄창이 진짜 키가 2미터니······?

엄창11 : 크다는 소리 많이 들어여

REDMASK : 요즘 아이는 정말로 빨리 크는구나. 몸무게는 그거 맞아?

엄창11 : 아니오 사실 구라에여 마지막 빼고 전부 다 뻥을 쳤어요

REDMASK : 마지막이 진짜라고?

엄창11 : 왜요?

REDMASK : 아, 아니야.

엄창11 : ?

“하!”

우민희 이 녀석 당황하는 꼴 봐라.

이런 놈은 처음 만나봤겠지.

나이 서른이 넘는 놈이 막 나가는 초등학생 연기를 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나.

좀 더 놀려주고 싶긴 한데 이번 기회에 몇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게 있다.

오래전부터 궁금하던 것도 있었고.

이를테면 “제주도행 피난선”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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