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집들이
골드가 가지고 온 멧돼지를 손질했다.
내장을 빼내고 피만 뽑은 채 냉동실에 넣어 두었는데 이거 말고도 멧돼지 한 마리, 고라니 두 마리, 닭 두 마리가 있다.
닭은 내가 먹을 것이고 고라니는 솔직히 손님상에 내놓기엔 좋은 고기가 아닌지라 암퇘지 한 마리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고기를 해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도축 영상을 켜놓고 흉내 내보았다.
생각한 만큼 가죽이 잘 벗겨지지 않았지만 천천히 꾸준하게 하다 보니 어느새 멧돼지는 정육점에서 보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았다.
딱히 구미를 당기는 냄새는 아니다.
누린내가 있다.
멧돼지는 갈비 쪽이 그나마 먹을 만 하다고 한다.
갈비를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눴다.
하나는 디펜더 남매, 하나는 저격수 모녀, 나머지 하나는 나의 몫이다.
중국에 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우리에 있다가 탈출한 집돼지를 내 동료가 포획했고 그걸 중국인과 함께 솜씨 좋게 해체하여 돼지고기를 파티를 벌였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북방이 침식되고 있다지만 엄청난 물자가 후방에서 공급됐고 그에 못지않은 인력들이 전선을 빼곡하게 채웠으니.
한 달에 충원되는 헌터만 천 명에 달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1년에 간신히 천 명을 배출하던 헌터를 그 짧은 시간에 뽑아낸 것이다.
솔직하게 훈련 수준은 그리 높진 않았는데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초짜라고 하나 기본적인 훈련은 되어 있었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속에서 빠르게 베테랑으로 거듭났으니까.
실제로 그들은 한 대도시를 장악한 몬스터 무리를 몰아내고 침식된 지역을 정화하기도 했다.
아마 인류가 몬스터에 거둔 최대의 승리였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연을 극복한 인류가 몬스터마저 극복할 것이고 그 선봉엔 중화가 있다고 흥에 겨워 소리치고 다녔다.
그러나 멸망은 막을 수 없다.
균열 너머에서 나는 보았다.
무한이라는 이름의 절망을.
*
개척자는 이제 삶의 일부다.
무전기를 켜고 있노라면 여기저기서 개척자들의 무전이 들려온다.
살려달라는 소리, 실없는 농담 따먹기, 누군가의 뒷이야기,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찬가.
북쪽에서 대치하던 개척자의 소식은 알 길이 없지만 딱히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또 다른 개척자들이 그들이 대치하던 도로를 지나 남쪽으로 뻗어 나갔으니까.
한 가지 염려스러운 건 그들 대부분이 저격수 모녀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 마을에 미군 출신 잔당이 있으니 접근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었다.
당장엔 저격수 모녀에게 도움 되는 일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불러올 것 같진 않다.
개척자들의 압력이 점점 높아질수록 그녀의 영역은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전처럼 모녀를 노리던 강력한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이를테면 조성용 패거리 같은.
조성용 패거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런 놈일수록 오래 살아남는 세상이다.
아마 다른 데서 신나게 사람들을 황야로 내몰고 있지 않을까?
개척자의 두서없는 무전을 들으며 자전거를 끌고 서쯕으로 향했다.
커다란 포탄 구덩이가 곳곳에 팬 황무지가 나타났다.
중국 군함이 서해를 장악하고 미사일 세례를 가하던 곳이었다.
디펜더의 새 집은 그 움푹 팬 황야의 모서리에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집에 다가가면서 무선 장비에 대고 말했다.
“나 왔다.”
폐허 속에서 젊은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서방!”
디펜더와 동생이 나와 손을 흔들었다.
“뭔 놈의 스서방이야.”
“그러게. 오빠도 성질 급하네. 아직 상견례도 안 했는데.”
“아니. 뭔 놈의 상견례냐고? 둘 다 부모님도 없는데?”
동생이 빤히 짐칸을 응시했다.
“이거 뭐야?”
“아? 이거?”
입가에 절로 뿌듯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 박규가 직접 해체한 멧돼지고기, 그것도 제일 맛있다는 갈비 부위다.
“무슨 고기야?”
디펜더가 고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돼지고기?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멧돼지.”
“멧돼지? 스서방? 사냥도 잘해?”
“아니, 사냥이라기보다는 뭐, 그럴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뮤테이션 개가 물어줬다는 걸 말해봐야 믿어줄 리 없겠지.
“난 사냥은 잘하지 못하겠던데.”
“그건 놀라운 일이군.”
“인간 사냥과 짐승 사냥은 결이 다르거든.”
“새 집은 어때? 살 만하냐?”
주변엔 폐허가 된 다른 주택들이 사이 좋게 서 있었다.
어느 집도 삶의 흔적은 희미했다.
오래 전에 버려졌고 아무도 찾지 않은 폐허다.
“한 번 보고 갈래? 집들이 하러 온 거잖아?”
“지금 시국에 무슨 집들이냐. 그냥 걱정돼서 온 거지.”
“한 번 보고 가.”
“으음.”
멸망기에 남의 집을 구경하는 건 죽음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 이벤트지만 디펜더 남매는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다.
“좋아.”
친구 집에 간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이상훈네 집에 놀러 갔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딱히 친하진 않았다.
아니, 우린 친한 적이 없었다.
한 치맛바람 하는 이상훈네 어머니가 이상훈 탄신제를 한답시고 이상훈의 친구 일부를 초대했는데 거기에 내가 덜컥 포함된 것 뿐이다.
이상훈과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내가 초대받은 건 아마 내가 녀석보다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이겠지.
당시 나이로 고교 1년생 정도였던 나와 나의 친구들은 소위 말하는 서울 상류층의 삶의 편린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어디에 쓰는 지 알 수 없는 물건이 가득했고 내가 보지 못했던 것, 하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시선이 닿는 곳마다 당연한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별 생각은 없었다.
남들의 부와 윤택함을 보고 질투심이나 자괴감을 느끼기에 내 안에서 타오르는 증오의 불길이 너무나도 뜨거웠으니까.
적당히 맛있는 걸 먹고 적당히 선물 교환도 하고 - 나는 빈손으로 갔었다 - 적당히 생일 축하 합니다 노래도 불렀다.
아무튼 그때와 달리 나도 나이를 먹고 이상훈도 죽었고 이상훈의 화려한 아파트도 무너졌지만 어째서인지 오랜만에 다시 찾는 “친구의 집”에서 나는 이상훈의 향수를 느꼈다.
아마 그 이유는 내부의 화려함 때문이리라.
“야. 여기 뭐냐?”
이상훈의 집에서 보았던 물결치는 대리석의 무늬, 광택, 잘 마감된 세련된 가구와 오브제가 황량한 폐허 아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보존된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말했잖아. 여기 도박장이라고.”
디펜더가 카지노에서 볼법한 룰렛을 핑그르르 돌려 보였다.
“딱히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군.”
디펜더 남매와 함께 지하 도박장을 둘러보았다.
꽤나 큰 규모의 도박장엔 다수의 안마의자와 수면실, 샤워실까지 완비하고 있었다.
수도를 틀어보니 물이 나온다.
물에선 과할 정도의 락스 냄새가 진하게 묻어 나왔다.
“동생이랑 물탱크 청소 한다고 욕 좀 봤지. 스서방도 부를까 했는데.”
“절대 안 가.”
“그럴 거 같아서.”
침실은 수면실을 개조했는데 침대가 하나 뿐이다.
디펜더가 도박장 구석을 가리켰다.
“나는 입구 쪽에서 자.”
과연 거기엔 매트릭스 하나가 가지런히 정리된 이불과 함께 모로 세워져 있었다.
“전기는?”
“일단 축전지가 남았어. 발전기도 가지고 오긴 했는데 연료가 딱히 풍족하진 않아. 올겨울, 꽤 길었잖아?”
연료도 그렇고 식량도 그렇고 딱히 풍족하진 않다.
여름이 오기 전에 다 밑천을 드러내겠지.
디펜더는 대수롭지 않은 눈치다.
“슬슬 조달해야지.”
“탄환 남는 거라면 있다.”
“역시 스서방!”
그 이후에도 천천히 새 집을 보며 필요하거나 부족한 걸 확인했다.
방어에 딱히 유리한 지형은 아니지만 은폐하긴 좋은 곳이다.
디펜더에게 말했다.
“여기서는 많이 죽일 필요는 없겠네?”
“그럴지도. 물론 우리 쪽 입구를 찾아내면 전부 죽여야겠지? 그래도 여기 지은 놈들은 올 것 같진 않더라고. 진즉에 죽은 거 같으니.”
“그러게 말이야.”
떠나기 전에 화려한 도박장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꽤 많은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어쩌면 내 방공호 시설 두 배는 증축할 수 있 정도로 많은 돈이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쓰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데.
“그럼 이만 난 돌아갈게.”
“가려고? 고기 같이 안 먹고?”
“개척자들이 워낙 많아서.”
“차나 한잔 하고 가.”
디펜더 동생이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나 찻잔을 흔들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잔도 그렇고 손에 들린 깡통도 값비싼 홍차다. 아마 이 도박장에 숨겨졌던 물건인 모양.
“나, 차 잘 타. 카페에서 잠시 일했거든?”
“그럼 한잔하고 가지.”
집들이로 시작해서 스켈톤 시찰로 이어졌던 모임이 즉홍적인 티파티로 변했다.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간이 테이블을 깔고 3개의 캠핑 의자를 설치했다.
곧 디펜더 동생이 차를 내왔다.
향기만 맡아도 알 수 있다.
좋은 차다.
내 방공호에 있는 레몬홍차와는 급이 다른.
후루룩
맛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차는 향으로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곁들일 과자는 없지만 멸망기에 만연한 죽음과 공포의 악취를 몰아내는 차의 향기와 고급스러운 쓴맛과 텁텁함, 식도를 타고 위장을 덮이는 따뜻한 온기는 충분히 오래 기억될 정도로 좋은 경험으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한동안 아무 말 하지 않고 이름 모를 호인이 남긴 홍차를 음미했다.
침묵을 깬 건 디펜더였다.
“나중에 말이야.”
그가 저 멀리 개척자들이 피워놓은 불빛을 응시했다.
“세상이 좀 조용해지고 지금보다 살만해지면 말이야.”
“······.”
“그땐 뭘 할 거냐?”
디펜더는 날 먼저 쳐다봤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
나 대신 동생이 손을 들었다.
“나 뉴욕에 가보고 싶어.”
“뉴욕?”
나의 물음에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전보다 커진 목소리로 내게 육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나 해외여행 가 본 적 한 번도 없거든.”
“뉴욕이라.”
디펜더가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듯이 쥔 채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집을 만들어보고 싶어.”
“집?”
“어릴 때 아버지랑 저 경치 좋은 교외에 땅을 사서 집을 짓기로 했었거든. 박공이 있는 지붕이 있고 스페인식 채광이 있으며 미로 같은 정원이 있고, 그리스식 기둥이 있는.”
“어떤 집인지 상상이 안 가는데?”
동생과 디펜더가 함께 입을 가리고 웃었다.
사이 좋은 남매의 모습을 보며 찻잔을 가볍게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미래라.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인가.
단지 그 정도의 선택 사항만 있겠지.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같은 어두운 시기를 살면서도 수많은 죽음과 슬픔을 마주하면서도 하고 싶은 것을 여전히 메말라 가는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뭐랄까, 나에게 없는 걸 누가 가지고 있는 걸 보면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스서방.”
디펜더가 날 불렀다.
“스서방은 하고 싶은 거 없어?”
“글쎄.”
솔직하게 말하기 부끄럽다.
그저 남들보다 오래 살다 죽는 게 목적이라면 지나치게 황량해 보이지 않을까?
“여보.”
동생까지 가세하자 나는 결국 어떻게든 내 황량한 소망을 포장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잠겨들었고 곧 오래 전에 생각했었던, 동시에 즉홍적인 변명을 생각해냈다.
“······일기를 쓸 생각이야.”
“일기? 그거 당장이라도 쓸 수 있는 아냐?”
“아직은 안 썼어.”
“그럼 언제부터 쓸 거야?”
이번엔 동생이 묻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 하늘의 별빛들은 사실 수만 년에서 수억년 전의 빛이며 그만한 시간을 지나 지구에 도달했다는.
인간이 별처럼 영원할 수 있을까.
“세상이 좀 더 조용해지고 회백색으로 물들 때, 그러니까 모두가 없어지고 게시판에도 나만이 남고 그런 날이 오면.”
영원해지고 싶다.
“그때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거지.”
“글자로?”
“아니, 아니 컴퓨터로. 죽기 전에 프린터로 내가 쓴 출력해서 최후의 인류인 내가 산 하루하루를 내 머리맡에 놔두는 거지. 혹시 알아? 외계인이나 아니면 인간을 대신한 뮤테이션 같은 게 나타나서 내가 남긴 기록을 보는 거야. 아, 최후의 인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최후의 나날을 보냈구나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벙찐 얼굴로 날 쳐다보는 남매의 시선을 의식했다.
“스켈톤.”
디펜더가 정색했다.
“너, 확실히 우리와 조금 다르긴 하다······.”
“······.”
이제는 스서방이 아닌 건가.
“깬다.”
동생도 놀라긴 매한가지.
“그래도 낭만 있어. 외계인 부분부턴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디펜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과 다기를 정리했다.
“일기를 적더라도 좀 더 희망찬 내용을 적어보는 건 어때?”
희망이라.
이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이미 끝이 정해진 세계에서 희망을 품어본들 무슨 소용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은 경솔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 희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전부 다 죽을 운명이지.”
말하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다.
어쩌겠나.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인데.
그런데 디펜더 동생, 다정이의 표정이 묘하다.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더 호프에 사는 m9도 너보다는 긍정적으로 살겠다.”
“뭐?”
방금 뭐라고 했나.
m9?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 스켈톤을 그런 놈과 비교하다니.
그보다 그 녀석 올 겨울에 얼어죽지 않았을까.
“m9? 걔 죽었지 않았냐?”
99% 확률로 얼어 죽었을 거 같은데.
“걔 살아 있어.”
디펜더 동생이 내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페일넷 마크가 선명하게 뜬 사이트엔 기울어져 가는 것도 모자라 유리창이 다 깨져 훤히 안이 보이는 아파트가 담겨 있었다.
그 안엔 허리에 동아줄을 묶은 채 목숨을 걸고 빨래를 너는 사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틀림없다.
저 궁상맞은 옆모습.
우리의 게시판 전 동료 m9다.
“쟤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충격 속에서 m9가 과거에 쓴 글이 불현듯 눈앞에 떠올랐다.
mmmmmmmmm : 봐라! 이 로얄 조망의 위엄을!
모두가 절망 앞에서 주저앉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 비참한 멸망 속에서 일부는 여전히 치열하게 절망이라는 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곧 뒤져도 조망이라니.”
세상은 넓구나.
조금은 반성해야겠다.
*다과회가 끝나고 떠나려는 날 향해 디펜더가 다가왔다.
“어이 스켈톤.”
“이제는 스서방 아니냐?”
“마음이 바뀌었어.”
“······.”
“그거 아냐? 학교 허무는 거?”
“학교를 허물어?”
“교장의 장례씩도 함께 하는 모양이더라고.”
“교장?”
나에게 프로페서라는 콜사인을 지어준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