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사 (2)
디펜더 이사 계획의 핵심은 트럭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5톤짜리 냉동 탑차를 구했다.
트럭 안엔 모든 짐이 실려 있었는데 동생도 그중 하나였다.
[ 안녕. ]
동생이 태블릿 화면을 내게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그녀가 날 보자마자 타이핑을 쳐서 내게 보였다.
[ 몸이 많이 줄어들었네? 무슨 일 있었어? ]
“농담이었어. 존내논을 흉내 내봤지.”
그 말을 들은 디펜더 동생이 정색하며 날 쳐다보았다. 곧 그녀의 손가락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 그런 이상한 사람 흉내를 내니 자꾸 욕을 먹는 거야. 좆내논 부계정 닉네임이 183cm83kg3cm였지? 어휴. 진짜 투명하다. 투명해. 정말로 한결같네. ]
신나게 존내논을 디스하던 디펜더 동생이 다시 태블릿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내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기 스켈톤.”
그녀가 육성으로 말했다.
자세히 보니 동생의 얼굴은 꽤 지쳤고 힘도 없어 보였다.
그녀가 직접 말을 건다는 게 기억 상으로 처음인 거 같아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주 잠깐 눈을 맞췄지만 이내 시선을 돌린 채 뭔가를 망설였다.
할 이야기라도 있는 걸까.
잠자코 지켜보고 있자니 그녀가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197cm100kg30cm님. ]
“아니, 그건 존내논식 강한 자아의 표출이라고.”
[ 오빠한테 가봐. ]
“저기.”
그냥 갈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도 또 한 명의 디펜더다.
“고민 있으면 털어나 봐.”
고민이 있는 건 확실하다.
다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말하길 주저할 뿐.
내가 모든 걸 해결해줄 순 없겠지만 들어줄 순 있을 것이다.
“고민 없냐?”
과거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고민이 있는 걸 넘어 고통받고 있고 거의 절망한 걸 알면서도 후배나 동기, 선배들을 내버려 뒀었다.
그들의 괴로움을 나약함으로 치부했고 몬스터를 마주할 자질의 부족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수많은 동료를 잃고 떠나보냈다.
내가 구할 수 있었던, 나의 인연들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건 어쩌면 디펜더 동생과 나, 둘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디펜더는 응접실에서 프린터 용지 4장을 이어붙인 지도를 펼친 채 경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오, 스켈톤. 뭐 마실래?”
“물이면 충분해. 지도나 한번 보자.”
디펜더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지도와 경로를 관찰했다.
디펜더의 계획은 인터넷에서 고지한 그대로였다.
좀비 – 광신도 + 몬스터.
군인들을 피해 2개의 덜 위험한 영역을 통과한다.
그 영역을 통과하면 일단은 안전하다.
개척자가 종종 있겠지만 군인과 광신도, 몬스터에 비하면야 애교겠지.
한편, 지도에 표시된 도착 지점은 내 영역을 지나 서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버려진 땅이다.
핵폭격을 받은 미군기지와 가까워 핵폭발의 후폭풍은 물론이고 미군기지를 향한 수백 발에 달하는 순항 미사일을 신나게 얻어맞은 곳이다.
거기에 사람이 살 곳이 있긴 할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어디쯤 정착할 거냐.”
“네 방공호.”
“안 되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농담이지.”
어느새 슬그머니 나타난 디펜더 동생이 타블렛에 뭔가를 띄우더니 그걸 내게 내밀었다.
화면 안에 떠오른 곳은 버려진 전원주택이었다.
소위 말하는 중정식 주택인데 몇 없는 창이란 창은 모두 깨지고 외벽 일부분이 무너져 깨진 계란처럼 내부의 모습을 휑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집이 괜찮아 보이더라고.”
“그리 괜찮아 보이진 않는데.”
“안은 이래도 지하가 잘 되어 있어. 전 주인이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는데 쓸데없이 지하에 괜찮은 주거 시설을 구축해놓았더라고.”
“방공호?”
“아니, 도박장.”
“언제 보고 간 거냐?”
“꽤 됐어.”
“꽤?”
옆에 있던 동생이 불쑥 답했다.
“우리 오라방, 집 보러 다니는 게 취미거든.”
디펜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가 터가 안 좋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여기저기 부동산을 보러 다녔지.”
“처음부터 터를 잘 정하지 그랬냐?”
“그럴 형편이 안 됐거든.”
“그래?”
“여기 우리 집 아니야.”
디펜더가 동생 쪽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생은 야릇한 표정을 지은 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정말이냐?”
남매가 동시에 날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일이다.
그럼 이미 한 번 이사를 했다는 소린가.
비바! 아포칼립스!는 어떻게 가입한 걸까.
남매의 반응을 보니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가능성은 단 하나.
디펜더 남매가 처음부터 약탈자일 가능성이다.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된 시점에서 디펜더 남매는 누구보다 빠르게 약탈자로 변신했고 이름 모를 이 집의 주인을 죽이고 그의 모든 것을 뺏었다는 소리다.
향후 디펜더라는 네임드가 될 비바! 아포칼립스! 계정과 위성 장비를 포함해서 말이다.
내게 의혹을 던진 디펜더는 천연덕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뜨기 전에 슬슬 가보자. 하룻밤 묵고 갈 것도 아니잖아?”
디펜더 동생이 떠나가는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지금 간다고?”
“어. 차에 타 있어.”
“아빠는?”
처음 보았다.
디펜더 동생이 정색하는 걸.
목소리는 여전히 작지만 그 안엔 쉽사리 물러설 수 없는 날카로운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순간 아까 그녀가 내게 은밀하게 내비쳤던 힘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빠 놔두고 갈 거야?”
디펜더가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네가 수습하던가.”
“난 싫어.”
“나도 싫어.”
디펜더가 고개를 돌려 동생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살인으로 얼룩진 비정한 눈빛이지만 동생도 만만치 않았다. 조금도 꿀리지 않고 오빠의 시선을 마주 노려보았다.
남매 싸움인가.
역시 이사는 집안의 중대사다.
남매의 치열한 눈싸움에서 패배한 건 놀랍게도 오빠 쪽이었다.
“······알아서 해. 난 모르겠어.”
디펜더는 그답지 않게 맥빠진 표정을 지으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오빠를 노려보던 동생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응접실 소파에 맥없이 기대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냐?”
동생에게 다시 물었다.
동생이 지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스켈톤.”
내 닉네임을 부르고 그녀는 다시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대신 그녀가 집어 든 건 그놈의 태블릿이었다.
검은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이 현란하게 화면을 두드리고 완성된 메시지를 내게 공개했다.
-솔직히 우리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잘 아네.”
-스켈톤 여자 사귀어본 적 없지?
“나 좋다는 여자는 많았지.”
-도대체가 사람이 왜 그러냐?
“······.”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집에서 좀 더 나가면 테마파크가 보이는 낭떠러지가 있을 거야. 그 앞에 목을 맨 시체가 있어.
목을 맨 시체?
아까 그걸 말하는 건가.
남매와 비슷한 선을 가졌던 시체를.
-우리 아빠야.
“······부친이었나.”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 힐난과 추궁이 섞여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디펜더 남매가 어떤 사람인진 알겠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의 행동은 어떤 의미로 선을 넘은 것이었으니.
동생은 내 시선을 받지 않았지만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충분히 아는 눈치였다.
“무슨 생각 하는 줄 알고 있어.”
그녀가 육성으로 말했다.
작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그러나 그 안엔 터질듯한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다.
“정말로 미안한데, 시체의 유품을 살펴 봐줄 수 있겠어?”
“직접 하지 그랬냐.”
내 말투는 나 스스로 걱정할 정도로 싸늘했다.
동생이 몸을 움츠리며 당황한 얼굴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공처럼 몸을 감싸며 고개 숙인 채 간신히 한마디를 토해냈다.
“······무서워서.”
“뭐?”
“나만은 아니야. 오빠가 그걸 더 두려워해.”
순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시체가 무섭다니.
늘상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만지고 영상으로 올리던 그들 남매가 두려워하는 시체가 있다는 게.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인용 소파 위에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만 그녀는 맨발을 드러낸 채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번 뿐이다.”
“스켈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녀의 눈빛은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맑아 보였다.
“스켈톤. 준비 다 끝났어. 차에 가 있을게.”
디펜더가 책상에 널어놓은 무기들을 능수능란한 움직임으로 쓸어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화장실? 화장실은 저쪽인데?”
답하지 않고 저택을 나서 아까 그 시체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망자가 할 이야기가 있는지, 내가 다시 시체 앞에 설 땐 구름들이 만월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사막에 있는 어떤 유적의 명물을 연상케 하는 시체의 상태와 그 사막을 연상케 하는 색채를 흩뿌리는 달빛 아래서 나는 아마 100년 전쯤 피라미드를 발굴하던 고고학자의 기분으로 시체를 뒤졌다.
툭
“웁스.”
팔 하나가 떨어졌다.
다시 붙여놓기엔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다행스럽게도 발굴은 결정적인 유물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상의 포켓 안에 유서로 보이는 봉투가 있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유서를 획득했는데 그 유서야말로 남매가 존속살해라는 중죄를 저지르지 않은 결정적인 증거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서는 읽을 수 없었다.
시체의 진물과 세월의 풍화, 비와 눈이 하나로 뒤섞여 유서에 적혔던 감정과 글귀를 마치 저 오지만디아스의 유적처럼 지워버렸다.
지워져 버린 글귀의 마지막엔 그나마 해독할 수 있는 문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 최후의 글귀는.
[ 미안하고 사랑한다. ]
너무나 상투적인, 자살자의 상용구였다.
*
불길한 침묵 속에서 트럭이 출발했다.
운전은 디펜더가 맡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디펜더 동생은 좌석 뒤편에 평판 시트를 깐 조막만 한 틈새에 쪼그리고 앉았다.
“썩은 시체 냄새가 나네.”
쿠궁!
트럭이 경사길을 내려오며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아마 꽤 큰 돌을 밟은 모양.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디펜더는 헤드라이트 하나 켜지 않고 급격한 비탈길을 요령 좋게 내려갔다.
“와.”
감탄할 때가 아닌 건 알고 있지만 그 재주가 워낙 좋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냄새야?”
디펜더는 시체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동생 쪽을 보았다.
그녀는 나를 가만히 보다 이내 결심한 듯 자신의 오빠의 묵묵한 뒷모습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켈톤이 아빠 유서 챙겨줬어.”
“그래?”
디펜더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썼대? 설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딴 흔해 빠진 말 쓴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냐!?”
나도 모르게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나 나라는 불순물은 남매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듯했다.
마치 우리 게시판에서 씨몽키파파의 군무에 뒤지지 않는 비장의 컨텐츠 “스켈톤의 비트박스 (3)”을 올렸지만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그냥 화장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동생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기 영원히 내버려 둘 순 없잖아.”
“테마파크 좋아했잖아. 우리 어릴 때 생각난다며. 죽어서도 보니 얼마나 좋아.”
“오빠.”
트럭이 거칠게 흔들거렸다.
디펜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배어들었다.
“참, 우리 아버지. 여전하네.”
그가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 중요한 시기에 또 살아나서 발목 잡는 거 보면.”
지긋지긋한 요동이 멈췄다.
트럭이 도로에 진입했다.
가장 위험한 군인의 영역을 벗어나 이제 좀비 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측면을 부탁해.”
디펜더가 헤드라이트를 켰다.
밝혀진 불빛은 트럭 전면에 장착한 모서리가 매끄러운 각양각색의 철봉을 드러냈다.
대 좀비 방지책이다.
한때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각광받긴 했지만 스파이크는 약점이 많다.
시체가 달라붙기 때문이다.
게다가 좀비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날카로운 건 결국 좀비 접착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반면 놀이터에서 볼법한 둥글둥글한 장애물은 좀비를 상처입히지 못할지언정 놈들을 버둥거리다 제풀에 떨어지게 만든다. 당연히 시체가 달라붙는 일도 없다.
멀리 웅웅 거리는 좀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지도를 떠올렸다.
좀비 영역은 엄밀히 말하면 상당히 돌아가는 길이다.
도보나 자전거라면 결코 지나치지 않을 북쪽 지역이니까.
하지만 도로가 있고 군대를 피하려면 이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있다.”
좀비 소리가 가까워지자 디펜더가 차량을 정지했다.
불빛 너머로 하나둘 사람들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좀비다.
버려진 도시의 주민이 우리를 환영하러 버선발로 뛰쳐 나왔다.
철컥
총탄을 장전했다.
철컥
뒤에서도 소리가 났다.
동생도 이번엔 총을 들었다.
뒤를 보니 동생이 혀를 살짝 내밀며 샐쭉하게 웃었다.
“좀비한텐 미인계가 안 통하더라고.”
진짜 시도한 건 아니겠지?
아니, 저 남매라면 왠지 시도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안이나 밖이나 시체 냄새가 진동한다.
“간다.”
만연한 시취(屍臭) 속에서 트럭이 급가속했다.
좀비들이 불빛 아래 생생하게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붉은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들은 살점과 동료를 갈구한다.
쿵!
트럭이 강화된 범퍼로 좀비 몇 마리를 날려 보내고 몇 놈을 깔아뭉갰다.
“하!”
동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디펜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스켈톤! 측면!”
확실히 이 남매 죽이는 거 좋아하는구나.
탕! 탕!
두 정의 총이 측면에서 달라붙는 무리를 강타했다.
보다 효과가 있는 건 동생이 든 펌프액션 샷건이었다.
탕! 탕! 탕!
산탄의 비가 뿌려질 때마다 달라붙던 좀비들이 너덧 마리씩 고꾸라졌다.
“하하!”
동생의 높아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디펜더는 휘파람을 부르며 액셀을 가열차게 밟았다.
부아아아아앙-
트럭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짓밟고 지나갔다.
속이 시원할 정도로 완벽한 돌파극이었다.
그 시원한 활극이 닫혔던 남매 사이의 문을 연 건 확실하다.
회백색으로 물들어가는 광신도의 영역 앞.
디펜더는 차를 멈추고 차량을 점검했다.
특히 그는 나와 여동생 쪽에 부착된 장갑판의 결합 상태를 신중하게 확인했다.
“오라방.”
동생이 달라진 목소리로 디펜더를 불렀다.
“이야기 해줘.”
그녀가 날 보았다.
“스켈톤이 궁금해 하잖아.”
디펜더는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치열한 고민이 수려한 미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여러 차례.
곧 디펜더가 고개를 들어 우리가 온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가 있던 집 말이야.”
“어.”
“주인댁이야.”
“주인댁?”
순간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잘못 들은가 싶었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백만 광년이나 차이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리는 다음에 이어진 한마디가 순식간에 좁혔다.
“어. 아버지가 그 집 머슴이었거든.”
기이한 살기로 번들거리던 디펜더의 시선이 차갑게 정돈됐다.
그의 시선은 흐릿한, 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