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39화 (39/183)

30. 골프 (1)

Defender : 인증

오랜만에 나타난 디펜더의 살인 인증에 나타난 사람은 전부 군인이었다.

마치 2차 대전 나치 독일군 마냥 갖가지 약장과 훈장을 주렁주렁 찬.

입으로는 모병제로 전환했다고 사실상 징병제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의 애환이 깃든 산물이라고 하지만 제삼자 입장에선 썩 보기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약장이 크면 클수록 그 병사가 고참병이라는 건 군인은 물론 민간에도 널리 퍼진 상식이다.

디펜더가 죽인 군인들은 하나 같이 약장이 어깨를 덮을 정도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필경, 전선을 지키던 기간병이었겠지.

Defender : 한파가 날 살렸지.

디펜더의 인증에 나타난 군인들의 몸엔 외상이 없었다.

모두 얼어 죽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잠이 들었고 그것이 죽음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처럼 예고도 없이 몰아닥친 한파는 엄청난 사상자를 낳았다.

난방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단열조차 기대할 수 없는 열악한 생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격타를 맞았다.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동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파가 덮치기 전 봄을 예감케 하던 포근한 나날도 피해를 키우는데 한몫했다.

이를테면 내 영역에서 죽어간 사람들처럼.

서울에선 한 집 건너 한 집 동사자가 나왔다고 한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집마다 연통에서 하얀 수증기를 피어 올렸던 서울엔 이제 검은 연기가 도처에서 피어오른다.

모퉁이마다 광장마다 무더기로 쌓인 시체를 태우고 있었고 얼어 죽은 망자를 위로라도 하듯 다수의 사람이 불타는 시체 옆에서 온기를 쬈다.

서울의 몰락은 예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번 한파는 어떤 의미에서 치명타를 가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멸망주의자들은 이번 한파를 꿋꿋이 이겨냈다.

평소 활동이 뜸하던 유저 몇 명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내가 아는 유저 중엔 죽은 사람이 없었고 게시판의 인구도 크게 줄어들진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점점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군단파 탈영병들이 소규모 약탈자 그룹으로 변해서 사방을 털고 다니고 있어.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슬슬 터를 옮겨야 될 거 같아.

동쪽에선 군단파 탈영병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의 위협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어떤 적보다 치명적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선 주위에 살고 있었던 유저들은 그들의 영역이 반쯤 몬스터와 뮤테이션의 영역이 됐다고 고백했다.

lifeismagic : 군인들이 전선을 안 지키니 북한에서 몬스터와 뮤테이션이 프리패스로 넘어오고 있어.

익명213 : 여기 속촌데 외곽에 몬스터 한 마리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그 일대가 점점 이상하게 변하지 뭐야? 회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도 손을 못 대.

qwer740128 : 여기 하남인데 뮤테이션 생전 처음 본다. 너희들 저런 거 보고 살았다는 거구나.

내가 속한 서쪽 권역은 비교적 안전하다.

인천과 서울 서부권역을 중심으로 국회를 위시한 군대가 전력을 보존하고 있고 그럭저럭 정부 기능이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곽 지대에서는 해묵은 문제가 터져 나왔다.

Boss_domingo : 개척자 새끼들 또 설치는데?

keystone : 아니 전에 있던 놈들 다 얼어 뒤져서 한숨 놓고 있었는데 또 한 무더기 기어 왔네.

익명848 : 날 따뜻해지면 더 많이 올 거 같아. 말이 개척자지 나라에서 내팽개치는 거지.

군단파가 약해진다는 건 국회파가 다시 여유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전선에 투입했던 개척자를 다시 일선으로 돌리는 모양이다.

평온했던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새해가 가혹한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내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치지직--

K-워키토키가 잡음 섞인 주파수를 잡았다.

“박규씨? 박규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누구의 목소리였더라.

분명 기억에 있는 목소린데.

“백······ 입니다······ 여기······.”

노이즈가 다수 발생했다는 건 주변에 전파 간섭이 있거나 아니면 흑점 활동이 활발한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거리가 멀어서다.

감도를 원거리로 조정하자 흐릿하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백승현입니다. 들리시면 대답해주세요.”

역시 이 사람이었나.

나의 한 기수 선배.

국위원 밑에서 갖가지 더러운 일을 도맡았던 사람인데 대체 내게 무슨 볼일이지?

마지막 봤었을 땐 까마득한 후배 아래서 아저씨라 불리며 잡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게 조금은 기쁘지만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하다.

특히나 저렇게 먼 거리에서 날 찾는 걸 보면.

“김다람씨에게 들었습니다. 이 주변에 사시죠? 있으시면 연락 바랍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다람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안에서 뭔가가 울컥했지만 이내 차가운 이성이 내 마음을 군홧발로 짓밟듯이 찍어 눌렀다.

꾹 참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김다람씨가 이 주변에 계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지금 김다람씨가 대단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구조를 청하고 있어요. 박규씨가 있어야 구명이 가능합니다. 주변에 안 계십니까? 이 주변이라고 들었는데.”

백승현이 계속해서 떠들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진정성이라고 할까, 말에 담긴 정성이 빠르게 희석되는 느낌이다.

곧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투덜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스피커 너머로 울려 퍼졌다.

“여기가 아닌 거 같은데?”

백승현의 목소리가 아니다.

또 다른, 신원미상 남자의 목소리다.

두 명 이상이 있다.

교신은 곧 끊어졌지만 먼 곳에서 기억에 있는 모터사이클의 엔진음이 길게 이어지는 것이 들려왔다.

백승현이 떠나고 있다.

소름 돋는 오싹함과 꺼림칙한 의문을 남긴 채.

“······.”

예전에 읽은 책에서 멸망의 단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가 도래한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진입한 것 같다.

*

일이 터진 건 골프장에 집단 동사자가 발생한 지 3일이 지난 후였다.

“여기는 제22 개척단 본부. 여기는 제22 개척단 본부. 제333 개척대 중에 생존자 있으면 응답 바람. 반복한다. 제333 개척대 중에 생존자 있으면 응답 바람.”

개척자가 다시 내 영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제22 개척단 ]

저 멀리 보이는 5톤 트럭에 휘날리는 깃발은 기억에 있는 깃발이다.

아마 캣맘의 아파트에서 보았던 건가.

노인들이 단체로 버려지고 죽임당하던.

“전부 죽은 모양이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시체와 장비는 우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무전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단히 유쾌했다.

“어라라라?”

기괴한 혀굴림을 끝으로 무전기가 침묵했다.

잠시 후 무전기 너머에서 비웃는 듯한 웃음과 더불어 또렷한 사내의 음성이 음울하게 퍼져 나왔다.

“이 주변에 사람 있지? 응? 사람 새끼 있지? 허접한 총은 공이만 쏙 빼놓고 상태 좋은 건 싹 가져갔네?”

사람의 통찰력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결국은 일인칭 시점에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

쓸 만한 총기를 회수하고 챙길 수 없는 건 공이를 빼놓았다.

또 다른 피난민이나 약탈자가 그 자동소총을 손에 넣는다면 가장 가까이 있는 나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테니까.

그런데 한파의 기세가 수그러들자마자 이렇게 빠르고 신속하게 개척단이라는 무리가 몰려올 줄 누가 알았나.

골프장에서 죽은 그들은 깃발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깃발이라는 생존에 하등 쓸모없는 물건은 사람을 죽이는 한파 속에서 던져버렸는지도.

“1분 줄게요.”

무전기 너머의 사내가 나지막한 어조로 출석을 요구했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나 22개척단 단장 조성용 대령이야. 치와와 조성용~ 한번 물면 절대 놓치지 않지!”

골프장의 능선으로 여러 대의 드론이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는 걸 필두로 각기 다른 트럭을 타고 온 개척자들이 사방으로 퍼져 인근을 수색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황량한 고분군처럼 보이는 내 영역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드론 한 대가 저공비행으로 다가왔지만 곧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모든 전력을 끄고 모든 배관을 차단한 상태에서 오직 무전기만을 켜둔 채 그들의 무전을 엿들었다.

“대령님. 고민수입니다. 미군기지 쪽 샅샅이 훑었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 하충수임다~. 신화 아파트 전 호실 뒤져봤습니다만. 특별한 사항 없습니다~.”

“필승! 강민재 중사입니다. 동일리 폐허 수색 완료했습니다만 생존자는 찾지 못했습니다. 계속 수색을 할까요?”

이번 개척자는 무장 상태도 좋고 장비도 뛰어나다.

트럭만 3대, SUV 한대, 신식 경량형 장갑차 한 대까지 끌고 왔는데 차량별로 팀을 이뤘는지 수시로 무전을 주고받았다.

그래서일까.

딱히 보안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공용 주파수로 떠들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강제로 침묵을 강요당하는 입장에서 무전기가 터져나가라 들려오는 다수의 무전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조성용은 자신의 유리함을 잘 알고 사람을 심리적으로 몰아세우는 재주가 있었다.

“인근 하천 수색 요망. 사람이 숨어 사는 곳이면 똥오줌 냄새가 나는 곳이 있겠지. 그 많은 멸망주의자 새끼들 중에 정화조 갖춘 새끼는 단 하나도 못 봤으니. 본성부터 나만 살면 그만인 빌어먹을 새끼들인지라 환경 같은 건 좆까라하고 그대로 흘려보낼 꺼야. 똥 찌꺼기 묻은 하수관 찾아봐.”

아마 조성용의 말에 해당하는 멸망주의자라면 그 무전을 듣고 발밑부터 무너지는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해당사항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생존자의 행태를 지켜봤고 방공호를 건설하면서 주도면밀하게 타국의 사례를 연구해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조성용이 찾는 똥 냄새나는 하수관도 그중 하나.

나는 정화조를 갖추고 있다.

힌트를 얻은 건 인도에서 발생한 케이스였다.

폭도 약탈자들이 분변 냄새를 근거로 부자들의 방공호를 찾아내 끌어내 죽였다는 사례를 들은 적이 있다.

정화조 공사라는 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공사에 슬러지를 청소할 장비까지 갖춰야 해서 돈도 많이 깨질뿐더러 나 같은 개인 생존주의자는 홀로 침전물을 퍼내는 수고까지 감수해야 하니까.

그 노고는 톡톡하게 보상받았다.

“없습니다. 대령님. 아주 깨끗합니다. 농업용으로 쓰는 취수관 몇 개를 찾긴 했는데 딱히 인분 흔적은 없습니다.”

하천을 뒤지던 무리가 내 메인 방공호가 자리 잡은 언덕 바로 아래 계곡까지 접근했지만 그들은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래?”

무전기 너머에서 조성용의 탄식이 들려왔다.

“이 주변에 약탈자가 있었나?”

“아니오. 읍내 하나 장악한 미군 잔당과 뮤테이션 개 무리 정도가 이쪽에 보고된 사항입니다. 남동쪽에 유랑 약탈자 한 무리가 기승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들 소행이 아닐런지?”

“드론 회수해서 충전한 후 접근 가능한 도로 싹 뒤져. 차량으로 이동하는 새끼들이면 흔적이 있겠지. 애들 불러 모아.”

사방을 뒤지던 개척자들이 다시 골프장으로 모였다.

굳이 무전 내용을 듣지 않았더라도 개척자들이 어중이떠중이처럼 모이는 모양새만 봐도 알 수 있다.

적은 나를 찾지 못했고 빈손으로 내 영역을 떠나려 한다.

나의 승리다.

아니, 개인 생존주의의 승리라고 부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디에스이라에를 필두로 한 집단 생존주의가 최근 게시판에서 힘을 얻고 있지만 그건 아마도 그들이 이 정도로 강력한 적을 상대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겠지.

당장 동쪽의 탈영병들이 내려오면 그들도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까?

긴장이 풀려서인지 슬슬 배가 고파 온다.

하드택이라 불리는 벽돌 같은 식감의 건빵 하나를 꺼내 그릇에 넣고 정수기로 미지근한 물을 부었다.

살기 위해 먹는 인간 사료 중 하나다.

적당히 풀어진 건빵을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죽처럼 끈적하게 풀고 있자니 다시 무전기가 울렸다.

“고민수는 애들 데리고 시체를 치워.”

“네. 갑니다.”

“강중사는 남은 총기 중에 제일 안 좋은 것들 추려서 새로 오는 친구들한테 쥐여줘.”

“네. 알겠습니다.”

“필재야. 본부에 연락해서 개 좀 보내라고 해.”

끊임없이 이어지던 무전의 마지막은 조성용의 싸늘한 협박으로 끝맺음했다.

“어이. 도둑놈? 듣고 있지? 다 알아. 기다려 봐. 곧 개들을 풀 테니. 3일 정도 걸릴 거야. 그전에 훔친 총기랑 손해배상금 정성껏 준비해서 골프장 잘 보이는 곳에 갖다 놔라. 이건 경고가 아니라 통지다.”

골프장에 나타난 트럭이 경적을 울리자 완전무장한 남성들이 호로를 씌운 짐칸에 올라탔다.

조성용은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차량에 타고 있는 모양인지 모습을 보지 못했다.

곧 사람을 태운 트럭이 굉음을 내며 능선 너머로 사라졌다.

“······후우.”

어떻게든 위기를 넘긴 모양이다.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자리를 떠나는 척하면서 감시를 남겨두는 방법은 꽤 고전적인 방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즈음 드론의 비행음이 내 방공호 위를 스칠 듯이 날아가며 북쪽으로 향했다.

역시 드론을 남겨뒀었다.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고공에 올려두고 이 지역 전체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겠지.

물론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조성용은 3일 뒤에 개를 푼다고 했다.

나름의 대비를 했다.

냄새를 지우고 곳곳에 미국에서 수입한 개 퇴치 스프레이를 뿌리고 모든 방공호의 입구를 흙과 바위로 틀어막았다.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메인 방공호 1층에 있는 생활용품을 발전실에 옮기고 그 자리에 레베카가 선물한 크레이모어를 간격을 두고 설치했다.

방공호를 공략하려는 사람들이 최루탄을 즐겨 사용하는 것 같기에 환기구 개폐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총탄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두 자루 도끼를 날카롭게 갈았다.

3일 뒤, 골프장에 두 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

버스 두 대 분의 수색견을 데리고 온 거라도 한 건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린데.

하지만 현실은 내 상상보다 더 기묘했다.

조성용이 말한 개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라고 할까.

어디서 볼 수 있었던 이웃 같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영하 12도의, 칼바람이 부는 황야에 두리번거리며 나타났다.

골프장 너머에서 확성기 스피커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여기에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인 범죄자가 이곳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해주셔야 할 일은 그 나쁜 놈을 찾는 겁니다. 찾는 분에겐 제주도행 피난선 1등실 가족동반행 티켓을 보상으로 드리겠습니다!”

나 박규, 하나를 찾기 위해서. 100명이 넘는 사람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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