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선비 (1)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라고들 한다.
나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치통이 사라지자 다시 늪 같은 무료함에 빠져 들었고 게시판을 끝도 없이 새로 고침하고 인기글을 기웃거리며 왜 나는 안 될까 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숙제와도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최근 게시판의 화두라고 하면 단연 부활한 선비일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해대던 그 녀석이 이제 사람 말을 하기 시작했다.
SUNBI : 왜 글이 이상하게 써지나 했더니 키보드를 이상하게 해 놨네. 세벌식이 뭐야? 대체? 늙은 새끼들은 키보드도 이상하게 쓰는 모양이네.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죽음보다 크게 나을 건 없겠지만 선비의 죽음은 시각에 따라 다채롭게 해석될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어떻게 포장하든 간에 선비의 죽음에 여자가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SUNBI : 오빠, 아저씨들 안녕?
선비가 여자로 변했다.
퀴퀴한 방공호 안에서 이른바 얼짱 각도로 찍은 흐릿한 사진 안에 담긴 얼굴은 십대 중후반의 앳됨이 남은 소녀였다.
SUNBI : 님들 A.I 뭐 그런 거 아니지? 진짜 사람맞지?
게시판이 발칵 뒤집어졌다.
최근엔 휴전이다 뭐다, 개척자도 오지 않고 조용한 겨울을 보냈으니.
게다가 새로운 선비는 이른바, 어그로를 끌 줄 아는 유저였다.
SUNBI : 순비 화장 중~
SUNBI : 순비 배고파
SUNBI : 순비 어디서 왔냐고? 궁금하면 직접 와 볼래?
SUNBI : 순비 평택 쪽에 살아. 가까이 사는 오빠 아저씨 있어?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게시판의 반응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니.
unicorn18 : 순비쨩~ 얼굴 더 보여줘. 사진 더 없어?
익명848 : 나도 평택 쪽인데(눈치)
DragonC : 흠.
keystone : 오늘 점심 인증(feat. 소고기)
익명458 : 순비 못 생겼어
...
...
어째서인지 난 이 화제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곧 그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감이다.
우리처럼 멸망에 대비해서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미래를 묵묵히 대비한 것도 아닌 사람이 멸망주의자의 전당에 태연하게 무임승차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만났던 덴티스트킴이 그러한 생각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반감을 가진 건 나만이 아니었다.
아니, 진정으로 반감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선비다.
선비는 곧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 드러냈다.
SUNBI : 니들 참~ 개새끼들이네 ㅋ
그 사진 속엔 여러 명이 있었다.
남자 셋과 여자 둘.
모두 십대 중후반의 앳된 얼굴들이다.
SUNBI : 나라가 망하는데 싸우지도 않아, 남들을 돕지도 않아, 오직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쥐새끼처럼 굴 파고 들어가 먹을 거 입을 거, 태울 거 잔뜩 쌓아놓고 한가롭고 인터넷이나 하고 자빠졌어?
그들은 이방인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와 달랐고 우리와 만나서도 우리를 조롱하고 저주하는, 우리와 섞일 수 없는 존재다.
연령대가 다르다는 것도 집단적인 이질감에 부채질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 이방인에 대해 게시판 유저들이 내릴 수 있는 조치는 집단 무시가 전부였다.
하지만 집단 무시라는 게시판 유저의 세련된 문법은 이방인이 모르는 언어다.
SUNBI : 오늘 발견한 얼어 죽은 시체(feat. 단란한 가족)
SUNBI : 목 매달린 시체.jpg(feat. 군단파)
SUNBI : 귀여운 아기 보고 가라
SUNBI : 강아지와 가족
...
...
이방인은 집단 무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찍은 사진으로 게시판을 도배했다.
저마다의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같았다.
죽음이다.
귀여운 아기 사진이라는 건 얼어 죽은 아기의 시체고 강아지와 가족도 개가 있는 사람들의 시체다.
그의 사진엔 오로지 비참한 죽음만이 있었다.
SUNBI : 집단 강간당해 죽은 여자와 목매단 남편.jpg
그중 하나를 우연찮게 보았다.
“······.”
새로운 선비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건 단지 혐오스러운 시체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려는 건 시체 너머에 있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것, 보지 않으려는 것들.
바로, 멸망기의 구체적인 현실을 말이다.
SUNBI : 역겨운 새끼들. 사람이 이렇게 죽어가는데 자기들은 이런 데서 시시덕거리나 하고 ㅋ 재밌어? 응? 세상이 망하는 게 재밌냐고?
이 이방인의 행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유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Dies_irae69 : 선비 죽이러 갈 사람?
선비가 드러낸 건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선비는 우리의 본성을 드러냈다.
익명848 : 나도 좀 거들어 볼까?
익명458 : m9는 귀엽기라도 했지. 저건 죽여야 돼.
ROKA_hun : 눈팅유전데 저도 가도 될까요?
keystone : 나도 가고 싶긴 한데, 바깥에 있는 새끼들 몇 남아 있어서. 거의 다 얼어 죽긴 했는데 거슬리긴 하네~
chouchou : 그간 눈팅만 했는데 용기내서 적어 봅니다. 여자는 어떻게 할 건가요?
...
...
유쾌한 닉네임에 감춰진 우리들 멸망주의자의 민낯을 말이다.
*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흐르며 비슷한 것끼리 모이고 부딪치던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한 이방인의 등장으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했다.
Foxgames : 가짜 선비가 평택에 산다고 하는데 믿기 어려워. 지난 글을 보면 진짜 선비는 경기도 광주 쪽에 살았거든.
익명242 : 광주 맞을 거야. 오리지날 선비가 예전에 찍은 벚꽃 사진 그거 신시가지 아래 쪽에서 찍은 거거든. 그 아랫동네 임야 쪽이 아닐까?
ROKA_hun : 탄약이 좀 있으니 챙겨갈게요. 100발 정도면 충분하겠죠?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게 했을까.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
소속감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보다 세련된 표현으로 연대의식이라고 하야 하나.
내가 처음 선비를 보고 느꼈던 반감도 그런 집단의식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이 커뮤니티가 좋고 우리 유저들을 소중히 여기니까.
아무튼 조용한 겨울의 막바지에 게시판은 혹서의 여름날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왜냐하면 이방인이 우리 게시판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유저를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SUNBI : 이딴 것도 만화라 그렸냐? 좆같이 못 그렸네. 뭐? 렘넌트? 지랄 똥을 싸네.
SUNBI : 내가 그려도 새끼야. 너보단 낳아.
“?”
이놈들 내 흉내는 왜 내는 거지?
설마 진짜 낳, 낫 구분 못하는 친구들인가?
아무튼 선비의 그 행동은 안 그래도 민심이 좋지 않았던 게시판에 기름을 끼얹었다.
익명424 : 우리 쪽에 군인들의 수상한 움직임이 있어서 직접 지원은 못하겠는데 응원은 해줄게.
tntn_Orthopedics : 거 어린 친구들이 선을 넘어도 심하게 넘네. 나 선비 어디쯤에 사는지 알 거 같은데.
berkut_break : 물질만능 풍조에 찌든 영혼없는 인간들이 그들을 닮은 끔찍한 피조물을 낳았네. 전쟁이 없었어도 저런 것들은 똑같은 레일 위를 걸었겠지. 망해가는 공장에서 찍혀나온 피조물이니.
평소 커뮤니티의 주제에 관심이 없거나 글을 거의 쓰지 않는 유저들마저도 새로운 선비를 규탄했다.
이제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선비는 죽어야 한다.
그것이 커뮤니티의 의지다.
수많은 유저가 동참할 뜻을 피력했고 총기나 근육, 장비 같은 전투력을 어필하는 인증 사진이 줄을 이었다.
이 격류 속에서 나는 한 발 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단지 약간의 놀라움과 흥미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멜론 마스크가 이 모습을 보면 뭐라고 말할 것인지.
그는 커뮤니티가 그가 원했던 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락거리로 소일거리 하는 것까진 예견했다.
위성 장비를 개통하고 커뮤니티에 처음 입장할 때 제공되는 웰컴 영상 속에서 멜론 마스크는 당부의 말에 적당히 세상이 망하더라도 마음껏 즐기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뛰어난 통찰력의 소유자도 자신이 만든 커뮤니티가 이런 집단제재의 장으로 활용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목줄이 죄여 드는 데도 새로운 선비는 여전히 우리를 조롱하고 있다.
SUNBI : 틀딱새끼들이 뭐? 뭉치면 강해져? 좆같은 소리하고 자빠지네. 와봐. 피 볼 것도 없이 발가벗긴 다음 물 뿌려 죽여 줄게.
SUNBI : 인증1.jpg
SUNBI : 인증2.jpg
SUNBI : 왜 말이 없어? 다들 쫄았어?
이 흐름에 내가 동참한 건 선비를 죽이고자 함은 아니었다.
디펜더의 부탁이 있었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미안한데 요즘 내 구역에 군인들이 어슬렁거려서 말이야. 네가 대신 가주면 안 될까?
SKELTON : 내가 굳이? 니가 가면 안 되냐? 나는 둘 다 끼기 싫은데.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솔직하게 좀 위험한 상태야. 군단파 새끼들, 서울 쪽에서는 선비 행세하는데 주력 부대 아닌 잡부대 새끼들은 이미 약탈자로 변했거든.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너도 조심해라. 우린 두 명이지만 있지만 넌 혼자잖아?
웃음기를 싹 뺀 디펜더의 글 안엔 암울한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약탈자로 변한 군인 집단.
이보다 더 현실적인 공포가 달리 있을까.
디펜더는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이 얻은 대략적인 정보를 제공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마 그 정보라는 거, 군인을 잡아 심문을 해서 얻는 게 아닐런지.
SKELTON :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뭐, 일주일간 소식 없으면 죽은 거로 생각하고 명복이나 빌어줘라.
“······.”
평온한 겨울이라.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 고요 속에서도 세상의 멸망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하나씩 하나씩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어쩌면 우리 커뮤니티의 이런 집단 행동도 붕괴의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방공호를 나서기 전에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SUNBI : 언제 오냐고? 틀딱새끼들아!
SUNBI : 늙은 새끼들은 왜 그리 뻥이 많냐? 학교 다닐 때 내내 처맞고 다닌 새끼들이 나이 좀 처먹으니 용감해진 거 같아?
iamjesus :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 마태복음 5:39
SUNBI : 걍 내가 찾아갈까? 지금부터 검색해서 하나씩 잡아서 죽여볼까나~?
...
...
여전히 선비는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난의 강도나 횟수가 전보다 늘어난 걸 보니 단순한 조롱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들도 어렴풋이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들이 우연찮게 발견한 이 커뮤니티가 그리 만만한 곳을 아니라는 것을.
다수의 어른이 철 없는 소년소녀들을 죽이기 위해 방공호를 나서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것을 말이다.
나도 그중 하나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죽일 의도가 없더라도 죽이는 무리에 합세했으니.
실제로 저 선비 패거리가 사실은 고도의 책략을 구사하는 약탈자 무리이고 우리를 위해 죽음의 함정을 파놓았다면 기꺼이 나도 그들을 죽이는데 동참할 것이다.
디펜더가 부탁한 게 바로 그거니까.
적당히 장비를 챙기고 집결지로 향했다.
집결지엔 이미 저마다의 총기와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이 다수이긴 하나 이쪽도 총을 들고 있기에 내가 나타나자 먼저 도착한 너댓명의 사람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고 일부는 총기에 손을 올리기까지 했다.
“닉네임.”
뺨에 커다란 흉터가 새겨진, 구레나룻이 짙게 발달한 사내가 형형한 눈을 번득이며 날 노려보았다.
“스켈톤.”
“아. 당신이 스켈톤 님입니까?”
“그쪽은?”
“디에스 이라에 식스티 나인인데, 디에스 이라에 혹은 디에스 정도로 불러주세요. 솔직히 별 활동도 안 해서 듣보인데다 생각없이 지은 닉네임이라.”
디에스 이라에.
이 사람이 집단 제재를 제안했다.
그는 내게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가 흥미를 가진 건 내 총기였다.
“오. 중국제네요. 어디서 구하셨어요?”
“어쩌다 보니. 어둠의 루트라고 할까요?”
“그렇군요. 전투 경험은 풍부하신가요?”
“그리 많진 않습니다.”
“그럼 뒤로 빠져서 구경만 하세요. 우리가 다 처리할 테니.”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속속 길목에서 유저들이 모였다.
그때마다 디에스이라에가 나서서 신원을 직접 확인했다.
혹시 배신자 하나 있으면 가장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데 두둑한 배짱이다.
유저들은 모두 서쪽에서 왔다.
정확히는 남쪽에 치우친 서쪽에서 왔는데 동쪽에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디에스이라에가 신원을 물을 때마다 닉네임을 댔다.
“익명848.”
“로카 훈요.”
“초초.”
“익명1001.”
게시판에서 자주 본 친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연령대는 30대 초반부터 무려 60대 초반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20대는 거의 없었는데 20대 초반은 물론 중반조차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멸망을 대비했을 땐 이십 대였겠지만 전쟁이 시작된 지 2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모두 30대가 되어버렸겠지.
나처럼 말이다.
현장에 모인 유저의 숫자는 모두 합쳐 열 명.
작은 숫자가 아니다.
솔직하게 이렇게까지 많이 모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새로운 선비는 우리의 역린을 제대로 긁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가 더 있다.
현장에서만 볼 수 느낄 수 있는 현장감이라는 게 있다.
선비를 족치는 모임은 맞다.
하지만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서로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눈빛.
정중하면서도 신중히 서로의 상태를 묻는 말들.
현재 상태의 괴로움, 특히 외로움과 점점 커지는 위협에 대한 호소.
집단, 단체를 의미하는 수많은 은유들.
디에스이라에가 이 모임의 성격을 확실히 했다.
“다들, 끝나고 정보나 교환합시다. 어차피 다들 그러려고 모인 거 아닙니까?”
주최자 본인이 이 기묘한 집회의 숨겨진 목적을 확실히 했다.
게시판의 인맥을 현실로 끌어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기묘한 모임의 또 다른 목적이리라.
“자, 그럼 일단 선비 죽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