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34화 (34/183)

27. 충치 (1)

소복소복 쌓이는 눈.

벽돌을 쌓아 만든 화로.

잔잔한 나뭇가지와 자박하게 타들어 가는 불.

김을 내며 끓는 주전자와 포장을 뜯을 준비가 된 믹스커피.

적당히 스테인리스 컵에 정량의 물을 부어 커피믹스를 넣으면 그게 내 오늘 아침이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올 겨울은 평온했다.

격렬했던 가을까지 갈 것 없이 작년 겨울하고 비교해도 확실히 평온한 나날이니.

내전의 긍정적 효과라고 할까.

서울에선 하루에도 수천 명이 죽어 나가고 수백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건 내게 먼 세상의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그때만 해도 “최후의 탐험가” 제이슨 초이의 말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80억 인류 중 최초로 균열 너머에 들어가 이계의 대지를 밟았다는 그는 세계 언론의 주목을 한 눈에 받으며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균열은 닫을 수 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제이슨 초이는 미국 사회에서 재미교포의 평가를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그는 균열 안에 들어간 적도 없고 심지어 몬스터를 상대한 적조차 없었으니.

그가 묘사하는 균열 너머의 풍경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고 그가 균열 너머에서 보았다던 우호적인 소동물은 오직 그 앞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소형종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 균열 너머에서 나타나 인간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균열에 가장 먼저 들어갔다던 남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줄행랑을 쳤다.

제이슨 초이는 감옥에 가진 않았지만 천문학적인 소송에 휘말렸고 소송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린 채 핵폭발의 후폭풍에 쓸려 없어졌다.

미국 게시판에서는 여전히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진지한 의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유행인 “밈”이라고.

제이슨 초이가 살아 있는지 살아 났는지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 게시판엔 예수처럼 부활한 인간이 하나 있다.

SUNBI : ㅎ곈디? 1234

선비.

누구보다 욕정에 충실하지만 또한 예와 멋을 아는 이 풍류남은 한때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Yuri 사건 때 데미안04와 함께 살해당했다.

이는 당시 현장을 수습했던 디펜더가 확인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 죽은 선비가 죽음에서 부활해 게시판에 버젓이 나타났다.

이미 살아 있는 시체가 걸어 다니는 세상이지만 그의 부활은 게시판 유저에게 섬뜩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이 박규조차 밤에 불을 켜고 잘 정도로.

내가 아니더라도 공포를 느낄 것이다.

죽은 놈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사람이 쓴거라고 보기 어려운 메시지를 보내온 걸 보면 말이다.

SUNBI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ㅎ뉘곕누? ㅎ눟누후누

얼마 지나지 않아 선비가 나 말고도 다수의 유저에게 기괴한 메시지를 보낸 게 알려지고 한 유저가 날카로운 의견을 제시하기에 부활한 선비가 몰고 온 공포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익명848 : 선비 방공호 놔둔 채 죽었잖아? 다른 놈이 걔 방공호 차지해서 게시판 접속 한 거 아니야?

나도 이 의견이 타당하다고 본다.

Defender : 선비는 내가 직접 묻었어. 죽은 거 확실해.

디펜더도 선비의 죽음을 재확인해주었고.

그런데 줄곧 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소수 의견을 줄기차게 주정했다.

berkut_break : 선비 본인 맞는 거 아닐까?

딱히 접점이 없는 친구다.

게시판 구석에서 작가주의 영화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뭔가 현학적인 이야기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끼리 주고받던 있는 척하던 친구였으니.

그래도 드래곤씨의 만화와 폭스게임의 게임은 열심히 즐겼던 것 같다······.

아무튼 이 베르쿠트라는 친구가 이례적으로 게시판에 핏대를 세웠다.

berkut_break : 선비의 안 사람이 달라졌다고 치자고. 하지만 그게 선비가 아닐 꺼라는 이유가 될까? 우리가 아는 선비는 계정 ID가 viva112578이고 닉네임은 SUNBI를 쓰는 비바! 아포칼립스! 이용자잖아. 안 사람이라는 요건이 달라져도 절반 이상은 여전히 선비가 아닐까?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아마도 본인은 키보드 배틀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기들끼리도 뭔 일본어 그대로 중역한, 특히 독일어권 철학가가 만들어 낸 해괴한 용어를 써가며 허구한 날 “담론”이란 걸 교환했으니.

하지만 그의 의도는 나와 비슷한 생태적 지위를 지닌 유저의 일침에 의해 분쇄됐다.

unicorn18 : 미친 새끼가?

유니콘18의 일침이 인기글에 오른 건 어찌 보면 시대가 낳은 결과겠지만 그가 인기글에 오르는 걸 보고 약간의 질투를 느낀 건 사실이다.

그 질투감이 독이 된 모양이다.

“······크윽.”

이가 아프다.

충치가 생겼다.

*

멸망주의자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치아 관련 질환도 그중 하나다.

이가 약한 편이라 나름 준비를 하긴 했다.

110볼트로 돌아가는 싸구려 핸드피스, 강의 교보재, 제법 광량이 높은 조명 등등.

그런데 혼자 거울을 보고 입안에 드릴을 넣어 쑤신다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방도를 찾았다.

그 다른 방도란 바로 “비바! 아포칼립스!”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실 이쪽이 창시자 멜론 마스크의 의도한 커뮤니티의 순기능이다.

멸망기의 인간끼리 전파에 구애받지 말고 협조하며 살라고 만들어 놓은 게 비바! 아포칼립스!라는 위성인터넷망이다.

SKELTON : (스켈톤 아파) 충치가 생겼는데 치과 의사 출신 있냐? 사례는 할 테니 좀 봐주면 안 될까?

본래의 기능에 맞는 도움 글을 작성한 지 10분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었지만 곧 나의 유일한 인터넷 친구가 내 비참한 부름에 응답했다.

Defender : 치과의사? dolsingman 한테 부탁해보지?

돌싱맨?

그놈은 또 누구지.

닉네임에서 인생역정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담백한 친구긴 한데 나도 한때 그러했듯 눈팅만 하는 유저는 제법 된다.

아마 그런 눈팅맨이 아닐까.

그 돌싱맨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스럽게도 돌싱맨은 살아 있었다.

dolsing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치료는 가능한데 니가 생각하는 장비는 없어. 핸드드릴 같은 걸로 파야 하고 충전재도 없어 구멍 난 상태 그대로 방치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아, 가장 중요한 거. 수술 전에 묶어놓을 거야.

“······.”

잠시 고민했다.

대충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말하는 수술이 어떤 것인지.

치료의 탈을 쓴 고문이다.

다른 의사는 없냐고 물어보았다.

dolsing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다른 의사? 장비 빵빵한 친구라면 있어. 요즘 시국에 보기 드물게. 그런데.

SKELTON : 그런데?

dolsing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 새끼 돌팔이 같단 말이야.

SKELTON : 돌팔이?

dolsing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전쟁 전에 잠깐 활동했는데 치과의사 어필을 좀 하더라고? 해서 작년 봄에 그 새끼한테 같은 치과의사라고 하니 좋아하더라고. 그 녀석이 뭐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집으로 초대하더라고?

SKELTON : (스켈톤 궁금) 초대까지?

dolsing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생각은 모르겠어. 지 무덤 판 거지. 아니 나랑 같은 학교 학위증 걸어 놨더라고. 그래서 친한 마음에 이야기해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 학교에서 배운 건 까먹을 수 있다 쳐. 까탈스러운 교수 이름도 잊을 수 있다 쳐. 그런데 같은 학교 다닌 새끼가 6년 동안 밥 처먹던 건물 이름도 모르는 게 말이 돼? 100% 학위 사칭이지.

그런데 그 돌팔이 장비가 좋단다.

실제로 이 게시판에 활동하기도 했고.

dolsingman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새끼가 맞는 말은 했어. 결국 의사는 장비 빨이지. 관심 있으면 DM 보내보던가. 편하게 진료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결과는 책임 못 지겠지만.

돌싱맨이 알려준 또 돌팔이의 닉네임은 무려 “Dentist_Kim”이었다.

닉네임만 보면 돌싱맨보다 훨씬 더 믿음이 간다.

덴티스트킴의 과거 이력을 조사해보았다.

돌싱맨의 말대로 덴티스트킴은 전쟁이 일어나기 무려 3년 전부터 이미 활동을 시작한 고참 유저였다.

Dentist_Kim : 반갑습니다. 이런 사이트에 가입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Dentist_Kim : 전쟁이 났을 때 치과의사가 롱런 할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Dentist_Kim : (영문 게시판 펌)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치과의사가 살아남는 법.

Dentist_Kim : 존내논님. 프랑스 유저 글 그대로 복사해 붙이셨던데. DM으로 질문을 드렸는데 답변이 없어서 공론화하겠습니다.

Dentist_Kim : (직찍) 중고로 산 유닛 체어입니다.

총게시글 5건.

이것이 덴티스트킴이 올린 글이 전부다.

뜨문뜨문 글을 올리던 그의 활동 내역은 정확하게 전쟁이 시작되기 전 한 달 전에 끊겼다.

그다지 글을 많이 작성한 건 아니지만 그가 진지하게 멸망주의자를 목표로 한다는 것 정도는 글의 내용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 아마도 본의는 아니겠지만 - 존내논의 몰락을 가지고 온 장본인으로 보였다.

그 덴티스트킴이 올린 글 하나를 클릭해보았다.

Dentist_Kim : (영문 게시판 펌)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치과의사가 살아남는 법.

-모든 의학이 현대 기술의 발달에 힘입었겠지만 치과만큼 드라마틱한 수혜를 입은 과목도 없다.

핸드피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당신은 피트니스센터에서 수백 킬로그램의 쇠를 들며 환자를 제압할 근육을 단련해야 할 것이고 발광하며 따지는 환자에게 지지 않는 드센 성정을 단련해야 하는 건 물론, 치료 중에 환자가 죽었을 때 닥쳐올 각종 법적 리스크와도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

...

치과의사의 시점에서 본 재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준비물을 기록한 번역글이다.

다른 글도 클릭해보았다.

Dentist_Kim : 전쟁이 났을 때 치과의사가 롱런 할 방법을 생각해봤습니다.

-재난 영화를 보면 의사는 항상 필요한 존재로 취급받고 악당 밑이건 생존자 집단이건 그럭저럭 의사라는 바운더리를 유지한 채 살아가더군요. 반면 치과의사가 비슷한 룰을 맡은 건 보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장비 때문입니다. 멸망기에 세련된 유닛 체어를 갖추고 핸드피스를 다루는 치과의사가 등장하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치과 질환은 대부분의 질환보다 보다 삶에 맞닿아 있고 고통 또한 지대합니다. 사람이 입으로 밥을 먹지 항문으로 먹는 건 아니잖습니까?

여기, 현대 장비를 갖춘 치과의사가 멸망기에 존재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전기가 끊어져도 자가발전으로 가동하는 유닛체어와 핸드피스, 흡입기를 갖춘 치과전문의가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떨까요?

그 자체로 대단히 유니크한 존재가 아닐까요?

첫 번째 번역글과 달리 두 번째 글은 끝까지 읽었다.

나와 다른 배경과 지식을 가진 멸망주의자가 스스로의 살길을 고민하고 제시하는 게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이런 종류의 유익한 글이 많이 올라왔었다. 지금은 미친 놈 취급을 받는 몇몇 유저도 정상인이었고.

나 박규 또한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보다는 이미지가 좋았던 것 같다······.

아무튼, 이 덴티스트 킴이라는 유저가 치과 쪽에 지식이 있고 경륜이 있는 건 확실하다.

인증에 나온 판교에 있다는 주택만 봐도 그가 그 많은 치과의사 중 상위권에 자리 잡은 고소득자 출신이라는 것 또한 확실해 보였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온 건 그로부터 3일이 지나서였다.

덴티스트킴은 내게 한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곳은 어느 건물의 지하실로 보였는데 거기엔 내가 전쟁 전에 보던 치과병원의 의자와 장비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틀림없다.

이건 완벽한 멸망기의 치과 의료 시설이다.

약 5년 전, 덴티스트킴이 작성한 글에서 야심을 드러낸.

Dentist_Kim : 대충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고요, 모처럼의 게시판 유저니 싸게 해 드릴게요.

그가 조건을 제시했다.

Dentist_Ki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봉인을 뜯지 않은 싱글몰트 위스키 한 병 혹은 전쟁 전에 생산한 담배 한 보루(맨솔은 반 보루도 가능~). 단, 위스키는 전쟁 전 10만 원 아래 안 받아요~ // 명품도 환영(시계, 빽, 옷) 단, 사넬, 구치급 이상이어야 하고 상태가 좋아야 함!

뭔가 요즘 세상과는 동 떨어진 요구다.

뭐랄까, 지금은 사라져버린 부유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할까.

그런데 나한텐 그가 찾는 물건이 없다.

담배가 조금 있긴 한데 예전에 거의 처분해서 한 보루만큼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네고를 해봤는데,

Dentist_Kim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에누리 안 받습니다~

택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친구를 호출했다.

물론 내 친구는 한 명뿐이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명품? 있어. 아니 있을 거야. 뭐? 헤르메스? 사넬?

친구 하나 잘 뒀네.

그런데 이 친구. 의외의 제안을 한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대신 우리도 진료해달라고 해 봐. 물건은 준비할 테니.

SKELTON : (스켈톤 깜짝) 뭐? 우리?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동생도 이가 아프대.

SKELTON :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냐?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디펜더 정색) 내 이름 대면 진료 안 해 줄 거 뻔히 알잖아?

“······.”

우문현답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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