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골드 (2)
카일도스에게 우선 감사를.
그의 방공호에서 챙겨온 다량의 의약품이 없었다면 이 녀석을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한 치료는 아니다.
갈비뼈가 드러난 부위에 가루형 소독약을 도포하고 거즈를 덮었다.
영물은 영물인지 골드는 치료 도중 고통에 잠깐 으르렁거린 걸 빼면 내게 어떠한 적대행위도 하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한 후엔 먹이를 공급했다.
녀석의 먹이는 직접 만들었는데 냉동고에 있던 고기 중, 윤중령 사건 당시 해동이 된 고기 중 상태가 안 좋아 악취가 나 따로 빼두었던 걸 삶아 영양제와 먹는 항생제를 함께 섞어두었다.
골드는 냄새를 맡고 눈을 찡그렸다.
“크르릉!”
“어허.”
개도 편식을 한다.
하긴 항상 고라니니 멧돼지니 맛난 걸 먹고 사니 이딴 반쯤 썩은 냉동식품 같은 게 성에 차겠냐만은.
그래도 이걸 먹어야 낫는다는 걸 아는 모양인지 녀석은 억지로 음식을 입안에 넣어 씹어 삼켜 위장 안으로 흘려보냈다.
내가 마련한 사료를 꾸역꾸역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사람들이 동물을 키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뭐랄까.
그릇이 비워지는 만큼 내 마음이 어딘가가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캣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녀석의 경과를 계속해서 살폈다.
야생의 짐승답게 골드는 대단히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3일이 채 되지 않아 느리게나마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녀석을 메인 방공호 위쪽의 산지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왔다.
똑똑한 놈답게 그 녀석은 내 말을 따르면서도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있는 걸 대단히 꺼리는 눈치였다.
“없어. 없어. 나뿐이다.”
“크르르르르.”
“속고만 살았나.”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자식, 대체 인간의 말을 어디까지 알아듣는 거지?
오싹함을 느끼며 녀석의 집을 만들어주었다.
아랫마을에서 주워온 창고용 슬레이트를 적당히 이어붙여 땜질해 지붕을 만들고 그 안에 폐가에서 건진 이불과 요를, 공업용 포장재를 듬뿍 깔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자, 네 집이다.”
집이 완성되자 골드는 기다렸다는 듯 그 앞에 쏙 들어가 몸을 둥글게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골골대는 소리를 냈다.
날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느 정도 나를 신뢰하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의 보람도 느껴졌고 무엇보다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것. 뮤테이션을 길들인다는 위업을 달성한다는 생각이 오래 전에 식었던 피를 가볍게 달구는 걸 느꼈다.
하지만 녀석의 상처가 아물고 점차 기력을 되찾자 내 뿌듯함은 점차 불안으로 변해갔다.
뮤테이션 개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근접전에서 뮤테이션 개는 대부분의 몬스터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다.
녀석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날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으면 총기를 겨눠 당장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충동이 때때로 올라온다.
이 녀석이 갑작스럽게 날 덮쳐 뼈째로 씹어먹는 그림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충동이 올라올 때마다 녀석이 날 따르고 녀석이 인간의 노래를 흉내 냈던 걸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엇보다 큰 영감을 준 건 백승현이 폭사시킨 여인이다.
자기보다 몇 배나 큰 고양이 앞에서도 태연하게 굴 수 있던 여인의 믿음이 그녀가 뮤테이션을 길들인 진정한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충동을 다스리고 믿음을 주려고 해도 나 박규는 방어적인 인간이다.
골드가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루가 다르게 머릿속에서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또 다른 손님이 내 영역을 찾아왔다.
한 대의 버스였다.
K-워키토키가 치직거리며 공용 전파를 수신했다.
“이 주변에 생존자 있습니까? 우리는 약탈자도 군대도 아닙니다. 평범한 민간인이며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이 목소리.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있으면 제발 회신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단지 약간의 정보를 얻고자 합니다. 무선으로 회신 해주셔도 됩니다만 소정의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기름입니다. 기름.”
떠올랐다.
지창수다.
조금 늙고 여위긴 했지만 제풍호를 따라 죽으려던 그 충신 지창수가 맞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보니 지창수만 온 게 아니다.
그 옆엔 나에게 부친의 자살을 말리려던 여인이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지영희였나.
그녀는 불만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부친의 뒤를 어색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
어떻게 할까.
기름 한 통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딱히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지만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무장한 남성 다섯 명을 더 끌고 오긴 했는데 딱히 내게 볼 일이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먼 데서 굳이 찾아올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잠시 머무르다 남동쪽으로 가는 걸 보면 말이다.
“조용히 숨어 있어라.”
골드에게 넌지시 일렀다.
“잠깐 볼일 좀 보고 오마.”
그 녀석은 날 물끄러미 보다 슬레이트 지붕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여기 생존자 있습니다.”
K-워키토키를 꺼내 응답했다.
그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박규입니다.”
예상한 대로 그들은 내게 볼 일이 있는 게 아니었다.
간단하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초대했다.
골드가 으르렁거리지만 잠깐 시험해 볼 게 있다.
*
“······이런 곳에 살고 계셨나요?”
지창수가 놀란 얼굴로 내 위장 하우스를 응시했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녹이 슨,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컨테이너 하우스는 객관적으로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니까.
“가져갈 게 없으면 사람들도 찾지 않는 법이죠. 무소유라고 할까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내 위장 하우스는 바깥에서 볼 때 잘 보이지 않았고 가까이서 확인해도 도저히 들어가고 싶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그들이 위장 하우스 안에 들어가는 걸 꺼리기에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영원히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지창수를 이곳에 데리고 온 건 과거의 그늘이었다.
그가 내게 프린터로 뽑은 사진을 보여줬다.
“이걸 봐주세요.”
커뮤니티에서 본 적이 있는 사진이다.
제풍호 회장의 사진이다.
좀비가 되고서도 수천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다니는 시대의 기업가가 조잡하게 인쇄된 A4 용지에 담겨 있었다.
“저에게 모든 걸 주시고 베풀어주신 회장님이 그런 모습으로 이승을 돌아다니는 걸 지켜볼 수 없습니다. 회장님 장례를 치러드리고 싶습니다.”
사정은 이러했다.
골드 무리가 지배하는 영역 너머에 버려진 도시가 있는데 거기서 제풍호 회장으로 추정되는 좀비 무리가 살고 있단다.
그런데 도시의 진입이 만만치 않다.
도시 주위로 정주형 몬스터의 소굴, 약탈자의 본거지, 가까스로 상륙한 중국군 잔당등 좀비보다 더 위험한 게 득실거린다.
중국군 잔당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따로 물어보았다.
“아산 쪽에 일개 대대 규모가 가까스로 상륙하긴 했는데 죄다 알보병입니다. 중장비는 아군 잠수함이 함선째로 가라앉혔죠. 거기다 본국이 멸망했는데 어디서 뭘 하겠습니까? 그대로 눌러 앉아 버린 거죠.”
내 시선은 줄곧 서울만 향했는데 남쪽에서도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위험지대를 제외하고 도시로 갈만한 진입로가 남서 루트가 전부인데 그쪽엔 골드 무리가 있다.
골드 녀석은 서울에선 나보다 훨씬 유명한 놈이다.
예전부터 현상금이 걸렸다.
몇 번이고 토벌대가 갔지만 허탕만 쳤고 일부는 패배해 골드 패거리의 먹이로 전락했다.
당연히 지창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골드 영역 근처에 와보니 덜컥 겁이 나고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인근의 생존자를 찾은 것이다.
골드만큼은 아니지만 인근의 유명인인 저격수 모녀 쪽으로 향한 것도 일단 교신을 통해 정보라도 얻을 요량이었단다.
“사람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박규 헌터님이 이런 곳에 은거하고 계시다니. 마치 하늘이 내린 계시 같습니다.”
지창수는 연신 기도를 하며 하늘에 감사했다.
“박규 헌터님이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시려고 이런 곳에 자리 잡고 있다니 말입니다.”
“네?”
이 사람, 김칫국 마시는 게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도와준다는 말도 안 했고 도와줄 생각도 없는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는 현역을 오래 떠나 있었고 제대로 싸울 형편도 아닙니다. 저한테 예전만큼의 실력이 있다면 이런 곳까지 내려와 거지처럼 살고 있겠습니까?”
대충 정보만 전달해주는 선에서 그에게 도움을 줬다.
지창수가 자리를 떠나자 그의 딸, 지영희가 내게 다가왔다.
전부터 느낀 바지만 지창수보다는 딸 쪽이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이다.
“괜찮아요. 제가 생각해도 미친 짓처럼 보이는데 박규 헌터님을 끌어들일 순 없죠.”
지영희는 입에 담배를 문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버스로 돌아가는 부친을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제풍호 제풍호 거릴 건지. 정말로 이해 할 수가 없네요.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그녀의 약지엔 반짝이는 반지가 있었다.
예전엔 없었던 것이다.
“이거요?”
그녀는 내 시선을 알아채고는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결국 파풍 그룹 쪽 사람과 결혼하긴 했는데······.”
약간의 정적 후, 담배 연기가 진한 한숨과 함께 하늘을 향해 후련하게 퍼져 나갔다.
“죽었어요.”
“안타깝군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너무 유약했죠. 지금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남편의 죽음을 말하는 것 치고 그녀의 얼굴엔 별 다른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최소한의 사랑조차 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녀가 날 힐끗 쳐다봤다.
“그쪽은 혼자세요?”
“네.”
“이혼?”
“총각입니다.”
“헌터들은 빨리 결혼한다고 들었는데.”
“예외도 있기 마련이죠.”
“안 외로우세요?”
이 여자, 예전엔 개인사는 일절 안 물어본 거 같은데.
미래가 없다고 해도 파풍 그룹이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추고 있을 때는 내게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나라는 남자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는 태도였다.
그런데 세상이 변해서 그런지 시선도 그렇고 목소리의 음색도 그렇고 전보다 끈적이는 느낌이 난다.
싫지는 않지만 그녀와 나는 여전히 타인이다.
위장 하우스 쪽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엔 외로움을 느끼긴 했습니다. 하지만 욕심을 버리니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더군요.”
“마치 스님 같네요.”
“그럼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뮤테이션은 만만치 않은데.”
“무장은 충분해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버스에서 무장한 남자들이 천정에 커다란 기관총을 올리고 있었다.
12.7mm 중 기관총이다.
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충분하네요.”
“약속대로 기름 한 통 두고 갈게요. 합성유긴 하지만 나름 쓸만해요.”
“경유 대신 쓸 수 있나요?”
“우리 버스는 잘 돌아가더라고요. 기계에 얼마나 무리가 올 진 모르겠지만, 그, 그런데. 저기!”
갑자기 지영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개를 돌리기 전부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고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듯이 드리워졌다.
메인 방공호 옆, 사자에 버금가는 크기를 가진 거대한 맹견이 우뚝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골드다.
“골드.”
철컥
이름을 부르면서 총을 겨눴다.
“물러나라.”
골드가 지영희를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지영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내게 물었다.
“혹, 혹시 기르는 건가요?”
“기르는 건 아니고요.”
“그러면?!”
“어쩌다 보니.”
다시 골드에게 경고했다.
“이 사람은 적이 아니야. 좀 있다 갈 거야. 널 해치지 않아.”
골드는 적어도 내 쪽엔 적의를 드러내진 않았다.
녀석이 선명한 적의를 드러낸 건 지영희다.
“골드.”
재차 감정을 담아 말하자 버스 쪽에서 웅성임이 일었다.
“무슨 일이야? 영희야!”
지창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드는 지영희를 노려보다 홱 하고 몸을 돌리더니 빠른 속도로 내 영역을 벗어났다.
“골드······.”
틀림없다.
골드가 떠나고 있다.
내가 집을 만들어주었던 야산을 넘어 그 너머의 비탈진 급경사를 뛰어내려 꽤 깊은 개천을 넘어 그 너머의 벌판으로 사라지고 있다.
녀석이 향하는 곳은 남서쪽.
녀석이 지배했던 벌판이다.
철컥
지영희가 골드 쪽에 총을 겨눴다.
그녀의 총을 강제로 아래로 내렸다.
지영희가 항의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멀어지는 골드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놔두세요. 총알 낭비일 뿐입니다.”
“설마 저런 괴물을 키우려고 시도한 건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헌터가?”
“키운다기보다는 잠시 돌봤죠. 심한 상처를 입었더라고요. 그 뭐 짐승도 은혜를 안다지 않습니까?”
“박씨를 물어다 줄 것같진 않은데요.”
지영희가 조종간을 안전으로 놓으며 총을 어깨에 걸쳤다.
“박씨를 바라고 한 건 아닙니다.”
저 너머 벌판의 끝자락에 시커먼 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굳이 쌍안경을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뮤테이션 개들이다.
놈들이 골드의 하울링을 듣고 나타난 모양이다.
그중엔 못 보던 녀석이 있다.
쌍안경으로 확인했다.
역시 처음 보는 놈이다.
핏불테리어를 연상케 하는 검고 짧은 털과 악마처럼 일그러진 두상을 가진 놈으로 거의 황소에 버금가는 크기를 가진 놈이다.
저놈인가.
골드를 상처입히고 무리에서 쫓아내고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놈이.
생긴 것도 덩치도 일반 뮤테이션 개와 격을 달리한다.
수많은 뮤테이션 개를 봤지만 저 녀석은 독보적이다.
지영희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진짜 가기 싫어지네.”
그나저나 골드 녀석이 왜 검은 녀석에게 돌아간 것일까.
설마 다시 재도전하려는 건가.
잃어버린 자신의 무리와 땅을 되찾기 위해서?
무리다.
뛰어다닐 정도로 몸이 회복된 건 맞지만 저런 거대한 녀석을 상대로 드잡이질 할 정도로 몸이 회복된 건 아니다.
검은 놈 덩치와 인상을 보니 정상 컨디션에서 싸워도 상대가 안 될 거 같은데.
며칠간 공을 들인 녀석이 허무하게 죽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내 손을 떠난 일이다.
골드가 검은 놈 앞에 우뚝 섰다.
다른 개들, 전에 골드가 거느리던 부하들이 새로운 무리로 보이는 녀석들과 함께 검은 놈 뒤에 서서 골드를 지켜보고 있다.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것을 보니 이미 그것들은 골드를 자신의 무리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놈이 골드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크르르릉!”
놈의 으르렁거림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여기서도 생생히 들릴 정도로 컸다.
충격파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짖음 앞에서도 골드는 태연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뺏어간 검은 놈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골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녀석이 내게 돌아온다면 잘해줄 용의가 있는데.
멀쩡한 고기도 내어줄 생각이 있는데.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급박하게 진전됐다.
검은 놈이 아가리를 벌리며 톱날 같은 이를 드러냈다.
“······.”
이대로 끝나는 건가.
골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무언가 잊은 것이 있는 양.
어째서인지 나는 그 녀석이 날 보고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골드가 꼬리를 내리며 움찔거리더니 갑자기 검은 놈 앞에서 몸을 뒤집으며 배를 드러내는 게 아닌가?
개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저 자세는 알고 있다.
복종의 자세다.
한때 무리의 리더였던 골드가 자기보다 크고 강한 놈의 서열을 인정하고 무리에 다시 받아들여 지길 원하는 것이다.
“······후.”
절로 한숨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왔다.
골드에 대한 실망감과 더불어 내 열병과 같은 호기심이 꺾이는 걸 느껴서다.
역시 뮤테이션은 길들일 수 없는 것인가.
어쩌면 실패는 예견됐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개라고 부르는 동물의 본질은 회색늑대다.
녀석이 동료를 죽인 토벌대를 씹어먹었을 때 그 본성을 보았다.
모든 회색늑대가 개가 되길 원한 건 아니다.
일부는 길들었지만 일부는 늑대인 채 죽었다.
“······.”
녀석은 개가 아닌 늑대의 길을 선택했다.
단지 그뿐이다.
“개도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꿀 줄 아는데.”
지영희의 빈정거림이 옆에서 들려왔다.
“아버지는 저 개만도 못한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