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9화 (29/183)

24. 마법의 약 (2)

“스켈톤 여기.”

저격수의 딸을 따라 도착한 낮은 빌딩에 들어선 순간 나는 생각지도 못한 풍경과 맞닥뜨렸다.

미국 프랜차이즈 간판들, 치킨을 잘 튀기는 대령의 동상, 코믹 히어로 영화 포스터, 미국의 도로판 표지, 갖가지 형태의 영문 타이포그래피, 불 꺼진 영어 네온 간판, 영어 신문, 어떤 히어로의 방패.

쓸데없이 넓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빌딩 안엔 지극히 미국적인 것, 미국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위층, 바람이 훤히 들어오는 잡다한 엄폐물로 가득한 방에 저격수는 포복을 한 채 총을 겨누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격수가 스코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적. RPG. 있어.”

저격수의 딸이 쌍안경을 두고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아래를 훑어보았다.

“안 보여.”

“숨었어.”

저격수가 덧붙였다.

“RPG 위험. 우리 노리고 있어.”

어눌한 한국어지만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저 앞에서 시선을 끄는 놈들은 미끼 역할이다.

휴대용 로켓을 든 녀석이 어딘가에 숨어서 저격수 모녀를 통째로 날려 보낼 셈이다.

저격수가 날 부른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격수의 판단.

내 기준으로도 상황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

전장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실제보다 상황을 과하게 포장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잠시 맡을 테니 간단한 지도를 그려줘.”

저격수를 대신하여 저격용 총을 맡았다.

손잡이가 땀으로 미끈거렸다.

자리를 잡고 고배율 스코프를 통해 보니 확실히 보인다.

저것들은 평범한 약탈자가 아니다.

수많은 약탈자 중에서 다른 놈을 짓밟고 죽이고 기어코 살아남아 레벨 업한 놈들이다.

앞에서 설치는 놈들은 마약에 취한 채 미친 듯이 웃고 떠들고 있지만 그 뒤, 총격이 미치지 않는 엄폐물 너머엔 차가운 살인자의 눈빛을 한 완전 무장한 약탈자들이 날카롭게 사방을 주시하고 있다.

아마 저 놈들이 약탈자의 정규 멤버겠지.

앞에서 설치는 놈들은 총알받이고.

여자도 다수 섞여 있었는데 전투원처럼 보이진 않았다.

“스켈톤.”

저격수가 내게 지도를 내밀었다.

그녀의 왼쪽 발을 보았다.

영하의 바람이 들어오는데도 붕대만 감은 채 엉거주춤하게 뒤로 들어 올린 상태다.

아까 자리에서 일어날 때 부자연스럽게 일어난 원인도 이 왼발에 난 상처 때문이리라.

그녀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걱정했던 광기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우울함과 불안감, 짙은 피로의 그늘이 느껴질 뿐이다.

“다리 어떻게 된 거냐?”

“약 필요해.”

저격수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왼발을 원망스럽게 응시했다.

“······내 다리 썩어.”

“나중에 한번 보자.”

그녀가 그린 지도를 보았다.

군 출신답게 일목요연하게 필요한 포인트만 짚어서 그렸다.

잠시 살펴본 결과 결론이 나왔다.

이 숫자, 이 무장으로는 무리다.

무엇보다 적은 교활한 사냥꾼이다.

이쪽이 소수라는 걸 알고 다수의 힘으로 천천히 느긋하게 질식해 죽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RPG를 보인 것도 당장 RPG를 쏘겠다는 뜻은 아니리라.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 이쪽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알고 한 짓이다.

불안에 빠져 갖은 상상을 자아내게 만들고 빠른 붕괴를 가속하려는 것이 놈들이 진정한 목적일 것이다.

저격수를 보며 말했다.

“어려운 싸움이다.”

“그래서?”

“내 방공호에 자리가 있어.”

저격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지만 그녀도 군인이다.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슬픈 눈으로 자신의 다리를 응시했다.

“스우.”

저격수가 자신의 딸을 불렀다.

스우.

그것이 딸의 이름이었다.

극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모녀는 사이가 돈독해 보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을 이해하는 단계라고 할까.

스우가 저격수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격수에게 안겼다.

그녀가 영어로 뭐라고 속삭였다.

아마 가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딸은 껴안은 채 저격수가 날 젖은 눈으로 응시했다.

“미안해. 스켈톤. 위험한 거 알고 있었어. 아는데 불렀어.”

뒤늦게 속내를 말하는 그녀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다른 무기 있냐?”

“다른 무기?”

“전에 험비 안에 중화기 잔뜩 있던데. 그거 다 어디 있냐?”

저격수가 딸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눈을 마주했다.

“스우.”

딸이 고개를 끄덕이고 헬멧을 고쳐쓰며 민첩하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스켈톤. 따라와.”

자리를 떠나면서 저격수를 응시했다.

저격수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짓했다.

딸을 데리고 가라는 뜻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격수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놀라움을 뒤로 한 채 스우의 뒤를 따랐다.

무기는 2층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역시 내가 본 게 옳았다.

무반동총, 7.62mm 기관총, 크레이모어, 수류탄, 재블린까지.

무기 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중화기가 쌓여 있다.

하지만 저격수가 그 무기를 안 쓰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녀가 가진 최강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재블린은 두 기가 있었는데 둘 다 배터리가 나갔고 나머지 무기들도 화력은 강하지만 사거리나 정확도에 문제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몸이 된 이상 이제는 쓸 수 없는 무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하지만 나한텐 관계없는 이야기다.

쓸 만 한 무기를 찾았다.

미제 무반동총이다.

파주에 있을 때 쏴본 적이 있다.

가볍고 신뢰성이 높고 화력도 우수하다.

유효 사거리는 200미터 안짝.

썩 괜찮은 대화 수단이다.

“두 개만 빌리자.”

“두 개나?”

저격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그 물음에 저격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날 보며 대답했다.

“레베카.”

*

이제 강력한 화기가 내 손에 있다.

두 기를 챙겼지만 효율적인 타격 기회는 한 번 뿐이리라.

결론은 단순하다.

최대한 한 번에 많은 놈들을 죽여야 한다.

특히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완전 무장한 베테랑을 쓸어버려야 한다.

마약에 취한 총알받이들은 그다음이지만 그것들도 숫자가 많으면 곤란하다.

고로 내가 선택한 방식은 이웃인 저격수와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조용히 매복한 채 때를 기다리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저 약탈자들은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다.

테마파크에서 상대했던 개척자와 달리 느슨하게 대오를 벌린 채 경계병을 사방에 세우고 있다.

기다려보았다.

약탈자들은 마약과 술에 취한 총알받이를 내세운 채 저격수의 신경을 갉아댔다.

그때마다 저격수와 딸이 총격을 가해보지만 별 다른 소득은 없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대지로부터 올라오는 한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밤이 오길 기다렸다.

“야 이 개새끼야. 똑바로 안 해! 눈 뜨고 있으라고 했잖아!”

적진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우두머리급이 내지르는 소리로 몽둥이로 총알받이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며 모든 이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약탈자는 초주검이 된 채 실려 나가 바닥에 버려졌고 누구도 그를 돌보지 않았다.

야간이 되어도 그들의 경계는 흐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소수의 소총병을 보내 저격수가 매복한 빌딩에 주기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낮도 밤도 제대로 쉬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물러나 저격수와 교대하고 그녀로 하여금 눈을 붙이게 했다.

다음 날에도 도발은 이어졌다.

한층 대담하게 그들은 장갑차를 덧댄 차량을 앞세워 거리를 좁힌 다음 아예 스피커로 노래를 틀었다.

잠시 노래가 그쳤을 때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멀찌감치 뒤에 숨은 채 마이크로 떠들었다.

“거기 숨은 놈. 몇 마리 있는 줄 다 알아. 기껏해야 둘이겠지. 아니 셋인가? 무전기로 도움 요청하던데 다 들었어. 그런데 뭐가 달라져? 나도 시간 끄는 거 딱 질색이니 간단하게 딜하자고. 총알 많지? 좀 내놔 봐. 많이도 안 바래. 5백 발만 내놔. 그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해가 어둑해지자 다시 놈들에게 접근했다.

전날 바깥에 내던져졌던 사내는 눈을 부릅뜬 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경계는 여전히 삼엄했다.

무리하게 빈틈을 파고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또 하루가 허무하게 지났다.

저격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 방법이 안 보여?”

“음.”

그녀에게 초콜릿을 내밀며 답했다.

“기다려 봐.”

그녀가 망을 보는 동안 눈을 잠깐 붙였다.

잠결에 몇 발의 총성을 들었지만 굳이 깨진 않았다.

또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젠 내 방공호를 걱정해야 될 시점이긴 한데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이 싸움, 먼저 흔들리는 놈이 지는 싸움이다.

말려 죽이려는 놈과 말라 죽어가는 놈 중 먼저 삐끗하는 놈이 죽는다.

기회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늦은 저녁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눈이 내려야 할 계절이고 온도인데 어째서인지 비가 내렸다.

약탈자들이 천막을 치고 천막 아래 모였다.

생각은 알 것 같다.

이 싸늘한 날씨에 비를 맞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싸움이란 건 늘 각오 덜 된 놈들이 먼저 뒤지는 법이다.

주루룩-

영하에 가까운 빗물이 이마를 타고 흐른다.

옷은 이미 진흙과 냉기와 빗물에 범벅이 되었고 강가를 타고 불어오는 찬 공기는 옷의 물기를 기화하며 폐부마저 얼어붙게 할 추위를 몰고 왔다.

그 모든 걸 감수하고 포복으로 전진했다.

내가 내뿜는 입김 사이로 놈들이 보인다.

텐트 안에서 시시덕거리는 놈들이.

가늠쇠를 겨누고 안전장치를 풀고 놈들을 향해 무반동총을 겨누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내 쪽을 바라봤지만 이미 굉음과 함께 격발된 로켓이 그들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콰쾅!

폭발 엔딩이다.

내가 싫어하지만 가장 간편한.

*

내 방공호에 사람을 부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저격수 레베카와 그 딸 스우를 내 방공호로 데리고 왔다.

목적은 레베카의 수술이다.

왼발이 괴사하고 있었다.

한때 봉와직염이라 불렸던 연조직염이 그녀의 다리와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약 타령을 하는 것도 자신이 직접 어떻게 수술을 해보려고 한 모양.

“잠깐 기다려. 동영상 좀 보고.”

나도 돌팔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그리고 전장에서 간단한 외상 처치 정도는 배웠다.

동영상 교재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스켈톤!”

스우는 내 방공호가 마냥 신기한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방공호를 보면 눈이 돌아갈 법 하겠지.

“변기가 왜 중앙에 있어?”

“······엄마 옆에 있어라.”

수술을 시작했다.

고름을 짜내고 상처를 절개, 소독하고 연고를 발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최선.

남은 예후는 카일도스가 남긴 항생제의 약발과 레베카의 의지에 달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레베카가 날 보며 물었다.

“제대로 한 거 맞아? 엉터리, 아니지?”

“동영상 보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약이나 잘 챙겨 먹어라. 다리 자르기 싫으면.”

그녀는 피투성이 붕대를 감은 자신의 왼발을 보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천정을 바라보았다.

“약, 있어?”

“아직도 필요해?”

“힘들어.”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쓸쓸히 말했다.

그야, 힘들겠지.

힘든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약은 안 된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다.

“약을 먹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고향이 그리워.”

고향.

얼마 만에 듣는 말인가.

“······그리고 사람들. 우리 말이 통하는 사람들. 떠들고 싶어. 이 말이 아닌 우리 말로.”

어눌한 말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떤 미사여구보다 내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비슷한 일을 꿈에서 겪은 일이 있었다.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막연하고 낯선 것인지.

그녀에겐 그 막연함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우리 말이라······.”

어쩌면 그 누적된 막연함이 육체의 병보다 그녀의 마음을 더 병들게 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방법이 없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그녀를 미국으로 돌려놓는단 말인가.

체념하며 입발린 말로 그녀를 위로하려 할 때였다.

“!”

아니, 잠깐.

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마법이.

“헤이. 레베카.”

그녀를 불렀다.

“컴온.”

노트북을 열고 커뮤니티를 열었다.

<비바! 아포칼립스!>

“뭐야? 이건?”

스우도 흥미를 느끼고 다가왔다.

이제 마법을 부릴 시간이다.

나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마법을.

그 마법은 대단한 영창도 마법진도 없이 클릭질 몇 번으로 시전 가능하다.

마법이 시작됐다.

버벅거리는 스크롤과 함께.

anonymous45 : Is it actually hard to look of protein-rich plants in the wild to eat if one is starving?

In_domini_LK : it depends on season and place.

PennKIX1978 : Wild Amaranth is pretty high in proteins.

anonymous71 : meet my WAIFUs.

...

...

어색한 영어 제목들.

그렇다.

이곳은 비바 아포칼립스 영문 게시판이다.

사실 이쪽이 메인이고 이용자도 우리보다 몇 배는 많다.

번역 기능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사용한 경험은 손에 꼽는다.

한국어 게시판이 나에겐 고향이니까.

하지만 나와 다른 세계에서 온 이 맹수에겐 같은 맹수들의 으르렁거림이 더 마음에 맞을  테지.

“뭐야. 이거? 설마, 살아 있는 사람?”

그야, 같은 고향의 울림이니까.

“당연하지.”

소녀처럼 환해지는 레베카의 얼굴을 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격수는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매만졌고 이윽고 흉중에 담았던 자신의 언어를 세상에 전송했다

SKELTON : Hi guys :)

*

“나가.”

인정한다.

이 박규, 양반은 아니다.

“나가라고.”

“조금만 더 하고.”

“아니 밤새 했잖아. 언제까지 할 거냐고?”

“조금만 더.”

저격수도 문제지만 그 딸도 만만치 않다.

“스켈톤 이거 뭐야?”

“야야야! 그거 집어 넣어. 애들이 보면 안 되는 거야.”

치욕스러운 물건을 찾아내는 귀신이다.

누나가 키우던 페릿을 보는 기분.

재앙과 같은 모녀를 쫓아낸 건 정오에 가까울 무렵이었다.

“······고마워 스켈톤.”

“고마워! 스켈톤!”

뒤늦게 모녀는 내게 감사를 표했다.

저격수가 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스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법 유창한 한국어로 내게 물었다.

“엄마가 그때 왜 도와줬냐고 물어.”

“그때?”

“처음 도망치자고 했을 때 말 바꿨잖아?”

“그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스우를 안고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던 레베카의 모습이 죽기 직전 누나를 안고 죽어가던 어머니의 모습과 거짓말처럼 닮아 있다는 건.

“이웃이니까.”

절반의 진심이다.

당장 메인 방공호에선 매몰차게 쫓아냈지만 더미 방공호 하나를 내어준다는 제안도 해보았다.

이러나저러나 이 모녀도 슬슬 한계에 온 거 같으니.

아직까지 레베카는 자신의 영역에 미련이 남은 눈치였다.

굳이 말리진 않았다.

겨우 반나절 남짓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생활 공간을 공유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좀 더 준비가 필요하다.

모녀에게나 나에게나.

“그냥 컴퓨터 딱 1시간만 더.”

“나가.”

버려진 빌딩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모녀를 트럭 옆에서 지켜보았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레베카가 날 보며 목례했다.

그녀에게 불쑥 물었다.

“지금도 약 필요하냐?”

레베카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우가 그녀에게 달라붙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한동안 자리를 지킨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법의 약이라는 건 존재했다.

내게 맞는 마법의 약이 있기를 바라며 자리를 떠났다.

“······.”

크리스마스엔 무전만 주고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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