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8화 (28/183)

24. 마법의 약 (1)

오랜만에 꿈을 꿨다.

짧지만 완벽한 숙면을 지향하는 내가 꿈을 꾼다는 건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꿈 자체는 흥미로웠다.

박규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미래를 준비했다.

총기를 쉽게 구하고 방대한 대자연 속에서 재벌집 회장에 지지 않는 거대한 성채를 구축했다.

그 성채의 가장 높은 탑에서 침입하는 양키, 카우보이, 슈퍼 히어로, 미친 마우스 등을 모두 쏴 죽이고 바퀴가 18개 달린 트레일러로 몬스터를 깔아뭉개고 어째서인지 미국 대통령과 만찬을 가졌다.

꿈의 절정에서 대통령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뭘 말해야 할지는 알고 있지만 그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려는 표현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내 말문을 막은 것이다.

순간 나는 그 땅에서 이방인이라는 걸 깨달았고 김이 새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개꿈이다. 재밌는 개꿈.

하지만 그 꿈의 배경과 상황은 곧 내게 펼쳐진 앞으로의 미래를 희미하게 예고하는 듯했다.

곧 만나게 될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요즘 부쩍 총성이 잦다.

일방적인 사격인 걸 보면 전투 상황이 벌어진 것 같지 않은데 지나치게 총성의 빈도가 높다.

문제라도 생긴 걸까.

딱히 교신까지 할 상황은 아닌 거 같아 관망하고 있지만 걱정이 앞선다.

어쩌면 저 잦은 총격은 단순히 침입자가 있어서가 아닌 광기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전쟁이 시작된 지 이미 2년이 흘렀다.

사람 하나가 미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전부터 저격수는 늘 내게 마약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떤 마약이 그녀의 공허한 심장을 달랠 수 있을까?

마법의 약이 있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마법의 약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

사람은 평판이 좋고 볼 일이다.

여전히 게시판에서는 카일도스를 찾는 친구들이 있다.

익명848 : 카일도스! 살아 있냐? 어디에 있냐?

익명458 : 카일도스! 미안. 웹툰 주인공 된다는 말 듣고 흉 좀 봤어. 이렇게 용서를 빌 테니 제발 돌아와 줘!

오늘 드래곤씨가 램넌트 최신화를 업로드했다.

최신화엔 침입한 탈영병을 상대로 아내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하는 카일도스의 마지막 이야기가 그려졌다.

마지막 순간 그는 중과부적인 걸 깨닫고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최후의 키스를 나눈 뒤 방공호로 밀고 들어오는 적을 노려보며 수류탄의 핀셋을 잡아 당겼다.

쾅!

폭발 엔딩.

반응은 대단히 뜨거웠다.

익명458 : ㅠㅠ

roka3218 : ㅠㅠ

keystone : ㅠㅠ

THE_LAST_MAN : ㅠㅠ

익명848 : ㅠㅠ

kimcic : ㅠㅠ

gijayangban : ㅠㅠ

Defender : ㅠㅠ

James_Catterer : TT

James_Catterer : Can somebody translate this to English? :)

..

...

모두가 키보드로 눈물을 흘렸다.

디펜더마저도.

하지만 나와 또 한 명만큼은 그러지는 않았다.

SKELTON : 흠....

unicorn18 : 처녀였음?

객관적으로 묶어서 패기 좋은 놈들이다.

한 놈은 노잼에 디펜더 친구고 다른 한 놈은 1년 차부터 맛이 가더니 닉네임대로 진짜 유니콘이 되어버린 괴인이니까.

익명848 : 스켈톤. 너무 한 거 아니냐?

익명458 : 이번에 컨셉 좀 잘못 잡은 느낌이야.

DragonC : 스켈톤님?

roka3218 :

kimcic : 님

keystone : 흠밖에 없는 놈이 맨날 흠흠 거리네...

...

...

아니나 다를까 세트로 묶여 신나게 뭇매를 맞는데 어째 나만 맞는 느낌이다?

심지어 디펜더마저도 눈치를 줄 정도였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디펜더 경악) 스켈톤 너······ 그거냐? 사이코패스······?

억울한 누명을 쓰긴 했지만 나 자신은 떳떳하다.

카일도스의 방공호를 직접 찾아가고 진실을 확인하려고 노력했던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까놓고 말해서 폭발 엔딩은 아니었잖아?

게시판에 카일도스의 소식은 알리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주느니 폭발 엔딩의 주인공으로 놔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좌우지간,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가끔 생기는 모양이다.

램넌트 최신화 댓글란에 반가운 얼굴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기자 양반이다.

내전이 시작되고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가 당당하게 살아나서 웹툰에 감상을 은근슬쩍 달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네임드 유저의 귀환이 게시판에 풍파를 몰고 온 건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었다.

gijayangban : 운이 좋았지. 국회파가 우리 아파트 일대를 포기하고 주저항선을 뒤로 쭉 뺐거든.

gijayangban : 그동안 접속을 못한 이유는 바로 아래 대 드론용 재머가 돌아가고 있어서. 게다가 바로 아래에 지휘소가 있는데 발전기 같은 거 돌렸다간 바로 팬저파우스트 몇 발이 베란다 뚫고 날아왔을 거야.

확실히 기자 양반은 네임드가 될 자격이 있다.

생존 보고만으로도 가볍게 인기글 목록을 채우던 그는 그간의 공백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페일넷에서 퍼 온 최신 정보를 우리에게 한 보따리 풀어놓았다.

gijayangban : 파괴된 전차.jpg

gijayangban : 동두천에서 목격됐다던 대형 몬스터

gijayangban : (비보) 더 호프 아직 안 무너짐

gijayangban : 강동구 현재 상황.jpg

gijayangban : 최근 작업 중인 제주도행 화물선.jpg

...

...

꽉 막힌 방공호에 갇혀 있던 우리에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하나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시선을 잡아끄는 이야기도 있었다.

gijayangban : 석주그룹 회장집 현재 상황.jpg

전쟁이라는 극한 변수 앞에서는 재벌도 별수 없었다.

교외에 그들만의 성을 쌓고 미래에 대비하던 재벌가도 이제 공격이 대상이 됐다.

그 대표격인 박철주 회장의 성채도 그중 하나.

헬기 포트 위에 우아하게 서 있던 헬기도, 루브르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미려한 온실도, 호화 컨트리클럽을 옮겨놓은 듯한 미니 골프장도 파괴를 피할 수 없었다.

재벌집 기사 반응이 뜨거워지자 기자 양반은 직접 댓글로 설명을 달았다.

gijayangban : 군단파 소속 부대 하나가 좌표를 찍고 포격을 가한 모양이야. 큰 이유 없이 단순히 재미로.

나도 기자 양반의 의견에 동의한다.

저 포탄 구덩이는 155mm급 야포가 파헤친 흔적이다.

서울도 아니고 춘천에 있는 아무 전략적 가치가 없는 재벌집을 군단급 포병이 포격한다? 재미 말고 달리 무슨 이유가 있을까.

무너진 성채엔 여전히 재벌 일가가 자리 잡고 있지만 벽이 무너지고 기반이 파괴된 상태에서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제풍호 회장이 현명했는지도.

좌우지간, 기자 양반의 부활은 잠시 침체했던 게시판에 커다란 활력을 몰고 왔다.

네임드 유저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할까.

그런데 나라는 남자, 의외로 샘이 많은 모양이다.

“······.”

카일도스의 관한 글을 적고 싶은 욕망이 손가락 말초신경까지 퍼졌다.

SKELTON : (스켈톤 르포) 카일도스의 방공호를 찾아가 보다 (1)

머릿속에서 이미 그럴듯한 제목까지 정해졌다.

나면서부터 인기 글의 숙명을 타고난 잘생긴 제목이다.

하지만 쓰지 않는 게 좋겠다.

게시판 유저의 감동을 깨고 싶지 않다.

내가 본 현실은 여러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으니.

우리 게시판 친구들의 마음속에서 카일도스는 폭발 엔딩으로 끝나는 게 가장 나으리라.

“······.”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생각이 점차 바뀐다.

굳이 이 좋은 소재를 아껴놓는 게 최선일까?

드라마틱한 최후도 좋지만 사실의 전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을까?

솔직히 내가 기자 양반보다 정보원은 딸려도 현장 취재력은 월등한 거 같은데.

나의 치열한 내적 갈등은 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의해 급작스럽게 종식됐다.

-치지직!

K-워키토키가 전파를 수신했다.

“스켈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격수의 목소리다.

“지원이 필요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쪽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

멸망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건 여전히 인간이라 생각한다.

침식이 피할 수 없는 재난인 건 맞지만 카일도스 경우엔 운이 없었다.

그는 균열과 너무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았다.

침식 속도 자체는 그다지 빠른 편이 아니다.

하루에 반경 1cm 정도를 물들일까 말까 할 정도로 느린 편이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가 있다.

정확한 조건은 알 수 없지만 하루아침에 광범위한 지역이 통째로 침식되는 경우가 있다.

정주형 몬스터가 범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주형 몬스터는 자기 영역을 만들 뿐이지 그 자체로 침식 속도를 빠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지 않는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다른 원인이 있겠지만 대체로 몬스터가 있는 곳은 침식이 빨리 퍼져 나간다.

구 시대의 헌터를 그토록 많이 양성했던 것도 경험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정주형을 살려두지 마라, 놈들이 소멸하는 걸 기다리지 마라, 군대가 놓친 한 마리를 최후까지 추적해서 죽여라.

학교에서 배운 가르침이다.

아무튼, 모종의 원인이 카일도스를 덮쳤고 그를 게시판에서 탈퇴하게 만들었다.

나 같은 경우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절대적인 거리가 있다.

그 중간에 서울이 있다는 것도 포인트다.

서울이 무너진다고 해도 거기에 터를 잡고 살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울의 가치는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폐허가 된다고 해도 그 폐허 아래 필요한 모든 것이 있을 테니까.

내 지역이 침식될 지경이면 방공호를 포기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다.

아마 그때쯤 대한민국에 돌아다니는 인간들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가장 치명적인 적이 사라진다는 소리다.

탕!

왜 인간이 가장 두려운 적인가.

그건 저격수의 영역에 침입한 약탈자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탕!

저격수의 빌딩에서 약 1.2km 떨어진 능선에 약탈자 한 무리가 진을 치고 있다.

옷을 전부 벗은 발가벗은 남성 두 명이 마치 두더지게임의 두더지처럼 능선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뛰어 다닌다.

이 한겨울에 그런 미친 짓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저격수를 조롱하기 위해서다.

탕!

아무리 저격수가 뛰어난 명사수라고 해도 1.2km나 떨어진 거리의 빠르게 움직이는 대상을 쉬이 맞출 순 없다.

총성이 덧없이 올릴 때마다 발가벗은 사내들이 주먹감자나 중지를 세워 보이며 저격수를 조롱했고 그때마다 뒤편 능선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탕!

또 하나의 신경질적인 탄환이 허공을 갈라보지만 탄환은 허공 속에서 삼켜질 뿐이다.

“······.”

멀리서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에겐 극한의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다.

명백히 나를 죽이고 모든 걸 뺏을 녀석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지점에서 나를 조롱하고 있으니.

자연계로 치면 고슴도치를 발견한 포식자가 포기하는 대신 이리저리 고슴도치를 관찰하며 어떻게 저걸 죽이고 잡아먹을까 궁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간을 보면서 신경을 갉아먹으며 상대방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괴롭히겠지.

“끼야핫!”

한 녀석이 아예 능선 위로 뛰쳐 나와 큰 대자로 몸을 펼치며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다.

탕!

신경질적인 총성이 울려 퍼지지만 총성이 울려 퍼지기도 전에 나체 약탈자는 부리나케 엄폐물로 뛰어 들어가지만,

탕!

또 다른 탄환이 사내의 몸에 적중했다.

“끼야호우!”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사내는 괴성을 지르며 엄폐물로 들어갔고 뒤에서는 더욱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같은 인간을 죽이려 한다.

몬스터는 그런 목적성이 없다.

그 치명적인 강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몬스터를 인간보다 아래에 두는 이유다.

멀찌감치 돌아가서 저격수의 영역에 도달했다.

발밑에 3구의 시체가 굳어 있는 게 보였다.

팔에 찬 완장을 보니 개척자 무리로 그들이 기승을 부린 시점인 가을 경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

시체를 치울 여유도 없는 건가.

늘 마약을 찾던 저격수의 칭얼거림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는 한계 상태일지도.

나름의 각오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곧 빌딩 위에서 거울로 반사한 빛이 번득였다.

모스 부호다.

기다리라는 내용.

굳은 얼굴로 접선인이 오길 기다렸다.

곧 내 앞에 나타난 건 저격수가 아닌 그녀의 딸이었다.

아이들은 정말 쑥쑥 자란다고 전에 봤을 때보다 또 머리 하나가 커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 위에 쓴 미군 헬멧은 머리보다 커 보였고 둘러맨 총 또한 그녀의 몸엔 어울리지 않았다.

“스켈톤.”

저격수의 딸이 수심에 찬 얼굴로 날 응시했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걸.

영양 상태도 위험한 수준까진 아니지만 풍족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자.”

위로의 말을 건네진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문제의 해결이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러 왔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마약을 건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약은 마법의 약의 줄임말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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