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25화 (25/183)

22. 잔재 (1)

1986년에 문교부에서 고시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외국 인명은 현지의 발음에 따라 표기되어야 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나는 이 고시를 지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당시 나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환영받지 못할 손님이었고 실제로도 환영받지 못할 목적으로 왔으니까.

우리의 목적은 중국의 구원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정부에서 받은 명령은 강도 높은 균열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와 행동 양식, 균열 일대에서 일어나는 변화, 특히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같은, 데이터의 수집이었다.

그 결과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전투는 갖은 핑계를 대서 회피했고 우리가 원하는 지역이나 전투만을 선택했다.

거기서 얻은 방대한 경험과 데이터가 이후 한국 방위에 큰 도움을 준 건 사실이고 나를 멸망주의자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중국에 마원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침식 지대의 평범한 주민에 불과하던 그는 몬스터가 자신 옆을 지나가는데도 아무런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걸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고,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

그 새로운 종교의 이름은 나와 함께 일하던 중국인에게 큰 비웃음을 샀는데 평소 직업도 없이 빌빌거리며 방구석에서 선협물이나 무협물이나 보던 인간이 지을 법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웃음과 달리 만류귀종교(萬流歸宗敎)는 침식 지대에서 빠르게 퍼져나갔고 청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이비 종교와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한국 파견 헌터 중엔 몬스터보다 이 사이비교도를 더 많이 죽인 기수도 있었다.

아마 디펜더가 그 정도 기수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마원갑도 그의 종교도 그의 신도도 모두 멸망이라는 불길 속에 타 없어졌지만 불에 타는 것들은 비슷한 속성을 지닌 법이다.

이를테면 숲의 나무처럼 도망치기보다는 그 자리에 지키고 선 채 자신이 불타기를 기다리는.

내가 아는 사람도 그러한 가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

쿵! 쿵! 쿵!

먼 곳에서 포성이 들려 온다.

또 시작인가.

라디오에서는 협상한다더니.

전쟁이 시작된 후 2년 하고도 2개월이 흘렀다.

여전히 김다람에겐 연락이 없다.

바깥 날씨를 재보니 영하 5도.

지난해 전 지구적으로 벌어진 핵전쟁 때문인지 날씨가 평년보다 낮은 기분이다.

난방 텐트 안에서 몸을 일으켜 세수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아침은 얼마 전에 수확한 배추 반 포기.

대충 잘라 하나씩 손으로 찢어 먹었다.

전쟁 전엔 배추 하나로 끼니를 때운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는데 통조림이나 보존식에 질린 현재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신선한 제철 별미다.

적당히 우걱거리며 배를 채우면서 쌍안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한 무리의 피난민 무리가 골프장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저 방향은 저격수 모녀가 사는 곳일까.

조만간 총성이 들릴지도.

식사를 마친 후 소화도 할 겸 영역 일대를 가볍게 순찰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다.

지나치게 섣부른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도 평온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평화로운 우리 동네와 달리 서울에선 내전이 한창 중이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꿀 전쟁이 수백만에 달하는 시민을 볼모로 잡고 지금 이 순간에도 불과 비를 서로에게 토해내며 살육극을 벌이는 것이다.

내전이 악영향만을 끼친 건 아니다.

적어도 내겐 단기 호재다.

내전이 시작되자 피난민은 보일지언정 그 지긋지긋한 개척자는 싹 사라졌으니.

개척단이라는 것이 군 관리하에 있었으니 전장에 끌려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작 커뮤니티 안에선 내전에 관한 이야기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간혹 집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서 인증 사진을 찍은 게 전부.

내전이 일어나기 전, 내전 이야기가 게시판을 뒤덮다시피 한 것을 생각하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다.

직접적인 원인은 서울에서 정보를 전해주던 기자 양반이 침묵한 것이겠지만 사실 지금 시점에서 내전은 굳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는 주제긴 하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내전은 우리의 무거운 현실과 맞닿아 있으니까.

누가 이기든, 누가 정권을 잡고 누가 서울을 장악하든 그 후폭풍은 우리의 삶을 크게 흔들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커뮤니티에선 내전과는 관계없는 밝고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현실 외면이라고 할까.

나도 별 의미 없는 게시글을 올리며 그 집단적인 외면에 동참했다.

SKELTON : (스켈톤 사운드) 스켈톤의 비트박스 23

그런 무료한 나날이 이어지던 중 게시판 전체를 뒤흔들만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역시 큰 일은 큰 놈이 하는 법이다.

게시판 사대천왕 중 하나, 전직 웹툰 작가 드래곤씨가 신작 연재를 예고한 것이다.

DragonC : 최신작 “The Remant"를 시작하려 하면서.

잔재, 찌꺼기를 의미하는 드래곤씨의 최신작 램넌트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들, 멸망주의자의 이야기다.

창작에 발을 들이고 그걸 업으로 삼은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드래곤씨는 이제 자신을 불멸으로 만들어 줄 최후의 역작을 준비했는데 그 주제로 곧 죽어가거나 사라질 최후의 인류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게시판 전체가 뒤집히고도 남을 터인데 드래곤씨는 한발 더 나아갔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걸 실천하기라도 하듯 드래곤씨는 우리 커뮤니티 멤버 중에서 주조연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DragonC : “The Remnant” Casting 공고

1. 이야기 화 할 만한 개성과 배경을 보유할 것.

2. 가족이나 이웃이 있고 거기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가점 부여

3. 여성 우대

4. 얼굴은 못생겨도 관계없음 알아서 각색할 테니

*허언은 자제 바람

“······훗.”

이 공고를 처음 본 순간, 실로 오랜만에 득의만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수밖에.

이거 완전, 나를 위한 조건이잖아?

물론 3, 4번은 빼고 말이다.

나에겐 이야기 화 할 만한 개성과 배경, 이웃이 있고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현재 비인기 유저로 낙인찍혀 빌빌거리고 있지만 드래곤씨의 최신작에 나올 수만 있다면 게시판 내에서의 입지는 물론이고 나 또한 불멸이 될 수 있을지도.

나 박규의 신상 명세는 1급 비밀이지만, 나라가 망한 판국에 그게 무슨 소용일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새로운 1급 비밀 자료를 작성해서 드래곤씨에게 전송했다.

-헌터 양성 기관 “가드” 13기 출신(수석졸업)

-전직 S급 헌터(레벨제로 변경되기 전 최고 등급)

-중국 베이징 반면에서 5년간 활동, 콜사인은 ”프로페서”

-뮤테이션 변이 기전 발견에 지대한 공헌

-존나 쌤

-이웃도 보유(귀여운 여자아이 포함)

...

...

지원서를 메시지로 전송했을 때만 해도 주연은 따놓은 당상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느 정도로 여유가 있었냐면 디펜더 남매라는 자극적인 주제를 제외하고도 빈칸을 빼곡 채울 정도였다.

답장은 1분 만에 왔다.

너무 이른 거 아닌가.

아니, 어쩌면 내 화려한 경력에 감동을 받아 자료를 보자마자 컨택을 해왔는지도.

DragonC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장난?

“?”

SKELTON : 장난 아니야. 진짜야.

DragonC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 허언을 믿으라고? 초딩이 써도 그거 보단 낳겠다.

SKELTON : 낳이 아니라 낫.

DragonC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이상한 머리글과 “낳”이 너의 유일한 개성 아니냐? 아무튼 지원 고마운데 허언은 하지 말아줘.

SKELTON : (스켈톤 억울) 아니 진짜라고.

DragonC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억지 부리지 마. 너 이야기로 쓸 거리 단 하나도 없잖아?

SKELTON : 나, 사실 여자다······

DragonC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차단한다?

석연치 않은 사유로 나의 출연은 불발됐는데 사실 빠꾸를 먹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유저가 캐스팅에서 떨어졌고 그중엔 내가 잘 아는 녀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Defender : 나 정도 개성이면 조연 한 자리 넣어줘도 되잖아? 그래 안 그래?

디펜더도 렘넌트 출연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지만 드래곤씨는 국민 포탈 사이트에서 연재를 한 사람답게 심의 기준을 준수하고, 학교 폭력을 제외한 자극적인 소재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디펜더는 당연히 아웃이겠지.

그런데 디펜더가 꽤 끈덕지게 달라붙었는지 드래곤씨는 그답지 않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었다.

DragonC : 디펜더 자꾸 DM 보내는데 넌 출연시키면 안 돼. 니가 나오면 장르가 바뀐다고.

Defender : 무슨 장르로?

DragonC : 사이코패스 스릴러물, 아니 스플래터 물인가?

Defender : ㅠㅠ

드래곤씨에게 한 방 먹은 디펜더가 내게 메시지를 보내온 건 당연한 순서였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스켈톤. 나 여자라는 거 밝히면 큰일 나겠지?

SKELTON : 동생이냐?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나 보고 싶었어?

SKELTON : 니네 오빠는?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 오빠가 만화에 나오고 싶어 해. 나는 걔 만화 보지도 않거든. 솔직하게 드래곤씨. 걔 만화 개노잼이잖아.

SKELTON : 재미없는 건 사실이지.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그치?

디펜더가 이상한 놈이긴 하나 자신의 정체성까지는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디펜더 동생을 공개한다는 건 남성과 여성, 2인 1조로 활동하는 살인 남매의 필살기 하나를 버리겠다는 소리니까.

아무튼, 렘넌트 출연이 영영 막힌 디펜더와 달리 나에겐 비장의 필살기가 남아 있다.

그 필살기는 드래곤씨에게 보낸 캐스팅 신청서에도 적혀 있는데 다름 아닌 남동쪽에 사는 저격수 모녀다.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나름 감동 있는 사연을 보낸다면 드래곤씨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즉시 저격수 모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스켈톤? 무슨 일?”

“잠깐 볼 수 있을까?”

“약, 이써?”

“무슨 약?”

“몰핀, 펜타닐 등등.”

서당개 3개월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저격수의 한국어도 상당히 늘었다.

맨날 하는 일이 건물 옥상에서 라디오나 무전기 듣는 게 일이니 안 늘 수가 없겠지만.

“스켈톤!”

딸이 날 반겨주었다.

못 본 지 꽤 된 거 같은데 곧 보게 될지도.

얼마 후면 크리스마스니까.

“스켈톤 오늘 뭐 먹었어?”

“배추.”

“배추? 그게 뭐야?”

“그러니까 원시 김치?”

“원시 김치?”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화를 하고 있자니,

“약.”

모친이 가로 막는다.

“약 업쓰면 안 만나.”

“1초만. 사진 찰칵. 오케이? 초콜렛!”

교신이 끊겼다.

작전은 실패.

어쩔 수가 없다.

마약은 어디까지나 수술이나 극한의 고통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때 쓰는 최후의 보루다.

나조차도 어렵게 구했고 소량밖에 없는 물건인데 그걸 별 것도 아닌 이유로 턱턱 내줄 수는 없지.

그나저나 저 모녀, 이번 겨울은 제대로 날 수 있을까?

식량은 그렇다 치고 한국의 겨울을 두 번이나 난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텐데.

좌우지간, 이렇게 해서 나의 야심 찬 웹툰 출연은 실패로 끝맺었다.

*

그로부터 3일 뒤.

그러니까 내 머리 위를 지나가던 전투기가 미사일을 맞고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 서쪽으로 추락하던 날이었다.

드래곤씨가 렘넌트의 주인공을 발표했다.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내가 잘 아는, 커뮤니티에서 얼굴을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DragonC : “The Remnant”의 주역은 Kyle_Dos로 결정!

카일도스다.

그는 평소 게시판에서 자주 활동하면서도 평판이 나쁘지 않았고 익명848, 익명458과 같은 친목 패밀리에 속해 있기도 했다.

그런데 딱 그 정도의 유저다.

딱히 반감 가질 만 한 구석은 없는데 그렇다고 큰 장점도 없는.

캡슐을 가지러 직접 만났을 때도 그는 평범한 대한민국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헌터는 절대 아니고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리 특별하게 만들어 드래곤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그 이유는 카일도스가 직접 작성한 게시글에 나와 있었다.

Kyle_Dos : 나 사실, 얼마 전에 아내를 주웠어.

이야기는 내가 방공호 주변에서 캡슐을 수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된다.

걱정거리를 덜어낸 카일도스는 노련한 멸망주의자답게 매일 방공호 주위를 돌며 작은 변화 하나조차 허용하지 않는 강도 높은 순찰을 실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 늦은 봄이라고 카일도스는 추억한다.

카일도스는 잊고 있었던, 그러나 늘 생각하던 것과 마주쳤다.

여자다.

젊고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나지 않은 성격을 가진 카일도스와 매력적인 여성이 운명적으로 만나 서로 어려워하면서도 친해지고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은 보편적인 이야기의 덕목은 물론 외로운 남자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강렬한 페로몬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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