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주사
이 세상에 좀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있다.
과학자들이다.
몬스터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생포가 불가능하고 사체를 남기지 않기에 인간이 자랑하는 분석과 연구가 불가능한 반면 좀비는 사체를 남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절반 정도 주저앉은 현재 시점에서 좀비한테 톱질을 하든 총질을 하든 문제 삼는 이는 없지만 멸망 초반기엔 놀랍게도 좀비의 인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그들은 좀비 그 자체를 걱정한다기보다는 좀비가 될 자신의 미래를 걱정해서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뮤테이션 인자가 죽은 인간의 뇌에 영향을 미치는 건에 관한 연구 논문 중 가장 많이 인용된 J. 캐터러 교수의 자료의 실험체는 그러한 좀비 인권 운동가 출신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 좀비는,
쩍!
지긋지긋한 무언가다.
특히 지금처럼 피곤한 때 만나면 정말이지 먼저 간 동료들처럼 눈을 감고 싶어진다.
“크르르르르!!”
쩍!
하지만 내가 치열하게 도끼를 휘두르며 놈들을 뿌리치는 이유는 죽기가 두렵다기보다는 잃을 게 많아서다.
내 방공호. 나의 피와 땀이 들어간 나만의 안식처에 다른 놈이 들어앉는 걸 볼 바에 차라리 세계의 멸망을 보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악착같이 좀비 놈들을 뿌리치고 안전지대에 도착했다.
“······후.”
한숨 돌리고 상처를 확인했다.
좀비한테 물리면 좀비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낭설이다.
좀비의 원인인 뮤테이션의 인자는 오직 죽은 인간의 뇌에만 영향을 미친다.
고도의 정신작용이 가능한 인간의 뇌에 침투해봐야 지구에 침입한 몬스터처럼 사멸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소수 의견은 네크로맨서 타입이 없는 곳에도 종종 좀비가 나타나는 걸 반례로 드는데 그건 좀비가 되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 뮤테이션 인자를 몸 어딘가에 묻혔고 죽어서 그 인자가 죽은 뇌에 변이를 일으켜 좀비로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는 법.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더듬고 움직여본 결과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나의 교통수단인 짐 자전거도 건재.
디펜더 남매의 선물도 무사하다.
초콜릿 하나를 입안에 까 넣으며 열량과 에너지를 보충했다.
“······하아.”
집 밖에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그래도 지나고 보면 집구석에만 있는 것보다 정신 건강에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커뮤니티를 확인하기 전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디펜더 남매가 게시판에 저지른 만행을 알기 전의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다가올 비참한 미래도 모른 채 나는 초콜렛의 당분이 기분 좋게 지친 심신에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어슴푸레 속에 솟은 산과 지형을 보며 주변 풍광을 가늠했다.
위치는 대충 파악했다.
몇 번이고 눈으로 확인하고 기억한 곳이다.
다만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버려진 아파트에 불이 켜졌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던 여인이 홀로 살던 곳이다.
그녀가 폭사한 이후 저곳엔 사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새 입주민이 들어온 것일까?
저 아파트는 직선거리로 6km 가량으로 내 영역에서 그리 멀진 않은 곳이다.
다만 중간에 낮은 산과 개천이 가로막고 도로도 주요 도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지선과 연결된 곳으로 험지를 가로지르는 교통수단이 없는 한 실제 거리는 꽤 먼 편이다.
딱히 전략적인 가치는 없지만 내 영역 일대에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흥미를 자극했다.
*
사람은 뭐로 움직이냐는 질문에 대부분은 밥심을 택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엔 호기심이다.
게으른 성격은 아니지만 호기심을 느낄 때와 아닐 때의 몸놀림은 내가 생각해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두드러진 차이는 행동력이라고 할까.
집으로 복귀하지 않고 곧장 버려진 아파트로 간 것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내 성격에 힘입은 바 크다.
<제22 개척단 산하 제218 개척대>
아파트 입구 쪽엔 이들의 소속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예상대로 개척자다.
총탄의 잔량을 점검했다.
권총탄은 넉넉하지만 소총탄은 많지 않다.
몸 상태도 베스트 컨디션은 아니다.
장기간의 이동과 전투의 피로가 회복되지 않았다.
그 말은 결정적인 순간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평소 전투를 기피하는 내가 전투를 입에 담은 건 개척자라는 집단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빨간 바지를 입은 패거리가 워낙 악독한 것도 있겠지만 예전에 경험했던 최중령 패거리가 그들의 본질을 말해줬다.
나라가 인정한 합법적인 약탈자.
어쩌면 그 정당성이 그들에게 도를 넘는 억지와 잔혹성을 부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영역과 관계가 적은 곳이지만 가까운 곳에 개척자가 있다는 건 신경이 쓰이는 일.
가벼운 정찰만이라도 해둘 요량으로 아파트에 접근했다.
“!”
뭔가 있다.
어둠 속에.
피로 탓에 감각마저 둔해진 것인가.
숨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자책하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사람, 비슷한 것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노인이다.
칠십은커녕 팔십에 가까운 노파가 낡은 공업제품 같은 모습으로 차가운 바위 위에 앉아 날 노려보고 있었다.
“할머니?”
노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내가 그녀를 불러도 그녀는 단지 이가 별로 없는 입안을 드러내며 입맛을 다셨을 뿐, 계속해서 무의미한 시선을 내게 보낼 뿐이다.
머리 위에서 느닷없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씨발놈아! 야! 야! 씨발놈아!”
“뭐? 뭐? 뭐? 뭐 이 쌍놈새끼야!”
아파트다.
복도식 아파트의 개방형 복도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백한 등불 아래 두 노인이 멱살을 잡고 다투고 있었다.
지하철이나 노인들이 모이는 광장에서 볼 법한 볼썽사나운 광경이 멸망기의 폐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노파에겐 대답을 기대할 수 없기에 아파트에 들어갔다.
싸움은 3층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문이 열린 두 호실을 사이에 두고 두 노인이 멱살을 잡고 있었고 다른 노인들은 팔짱을 끼고나 혀를 차면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숫자는 열 명 정도였는데 올라가는 도중 다른 층에서도 소리가 들린 걸로 보아 꽤 많은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으로 짐작됐다.
그런데 전부 노인이다.
적어도 현장에 모인 사람 중 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딱히 총을 가진 사람도 없고 싸울 사람도 없는 거 같아 과감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나타나자 노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날 향했다.
앞에서 싸움판을 벌이던 노인들도 멱살을 놓고 날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정적이 아파트 복도에 찾아왔다.
뭐부터 물어야 할까 생각하고 있자니 한 노인이 내게 다가왔다.
“미안해요. 시끄럽게 싸워대서.”
싸우던 노인 중 하나다.
관상은 볼 줄 모르지만 젊었을 때 참 능글맞게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척단 사람이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 손을 잡으려 했는데 나는 손사래를 치며 싫다는 의사를 확실히 피력했다.
노인은 내 손을 놓친 손가락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이전에 같이 온 개척단 사람이 호실 배정을 해줬는데 아니 이 양반이 자기 방이 춥다고, 난방이 안 들어 온다고 남의 호실을 뺏고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고요.”
뒤에 서 있던 노인이 버럭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뭐가 어쩌고 저째? 302호는 내 호실이라고. 제비뽑기로 내가 땄잖아! 거 보소! 젊은 양반! 이 새끼 말 아주 쌩 구라야! 쌩 거짓말이라고!”
아무래도 그들은 나를 그들을 이곳에 데리고 온 사람과 한패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딱히 군복 같은 걸 입진 않았지만 군복 비슷한 바지를 입긴 입었고 총기를 들고 있었고 무엇보다 젊었으니까.
젊음이 특권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실로 그러했고 심지어 일종의 권력과 연결되는 느낌마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내 소관이 아니에요.”
대충 둘러대고 노인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얼추 이유는 알 것 같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문제다.
“뭐긴, 뭐여. 씨발. 나라에서 보내니까 왔지. 좆같은 대한민국에서 보내니까 온 거 아니야. 병신 같은 국민 새끼들이 정치인을 잘못 뽑으니 나라가 이딴 식으로 망하는 거라고.”
뒤편에 서 있던 입이 걸걸한 노인이 욕설을 섞어 말했다.
그가 날 빤히 쳐다보며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말했다.
“다음 배급은 언제여?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겠네. 쌀밥 준다고 해서 왔더니 쓰레기 같은 영양바나 주고 있고. 더는 그거 못 먹어.”
아무래도 저 노인은 싸움을 부르는 성격처럼 보였다.
아주 짧은 시간 말을 섞었을 뿐이지만 성격의 모남이 어김없이 드러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마 우리의 김노인이 이곳에 있었다면 저런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툴툴거리는 노인의 얼굴에 목을 맨 채 죽은 시신이 겹쳐 보이는 걸 보며 얼른 뒤돌아섰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서.”
“씨발. 그럼 뭐하러 왔어. 처 놀러 왔나.”
“네?”
“밥 안 줄 거면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새끼야!”
“거기.”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를 노려보며 똑똑히 말했다.
“입조심 하쇼.”
눈이 마주치자 그 노인은 감전이라도 된 것마냥 대가리를 부르르 떨더니 시선을 피했고 이내 도망치듯 열린 방으로 들어갔다.
그와 드잡이질 하던 노인이 고소한 듯 코웃음을 치고는 그를 쫓아갔다.
“거기 내 아파트라니까!”
다시 몸싸움을 하는 듯 투닥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 소리는 내게 피로감을 가중할 뿐이었다.
“······후.”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한 노인이 날 쫓아왔다.
언제 세탁했는지 꼬질꼬질한 셔츠 위에 싸구려 등산 조끼 같은 걸 걸쳤는데 그 조끼엔 반짝거리는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이 사람이 책임자인가 싶어 배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놀이터 보안관>
“?”
그 노인이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대체 여긴 손 잡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약간의 짜증을 담아 손을 뿌리치고 그를 내려보았다.
“뭡니까?”
“보세요. 젊은 양반.”
“네.”
“내가요. 젊을 때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노인의 말을 끊을까 생각해보았다.
뒤에 나올 내용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한 평생 나라를 위해 일했어요. 불철주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청춘을 다 바쳤다, 이 말이에요 단 한 번도 세금을 체납한 적도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투기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왔는데 이게 뭔 일입니까? 왜 이런 데로 날 보내요?”
“글쎄요.”
“나 국민연금 부은 게 얼만데 한 푼도 못 받았어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서 단장한테 전해주세요. 여기 있는 우리들이 늙은이인 건 맞지만 이런 취급 받을 사람은 아니라고.”
“혹 만나게 되면 전해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내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는 동안 한 노파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와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리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만 바빠서요.”
“아니오. 이거 받으시라고요.”
노파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개사료와 정체불명의 고기를 굳혀 만든, 내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일단 받으세요.”
노파가 갑자기 강압조로 말했다.
“받으라고!”
억지로 받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개사료바 뒤에 누군가의 연락처와 함께 전화 좀 해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다.
여기 있는 인간들 하나 같이 왜 그럴까.
젊은 내가 연로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게 다소 건방진 모양새긴 하나 여기 있는 노인들 이상하다.
뭐랄까, 사랑받지 못할 사람들처럼 보였다.
좀비 떼를 상대했을 때보다 심한 피로를 느끼며 아파트를 나섰을 때 홀로 앉아 있던 노파가 눈에 띄었다.
문득 국제 레지던스 앞을 늘 지키던,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을 늙은 여인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차피 내겐 필요 없는 물건도 있겠다 그녀에게 다가가 영양바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그제야 노파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주머니 안에 있던 그녀의 손은 염주를 쥐고 있었다.
“고마워요. 고마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왜 이런 데 혼자 계십니까?”
“주사 안 맞아서.”
“네?”
“주사 안 맞아서 저것들이 날 안 들여 보내줘.”
노파가 바퀴벌레빛깔의 음식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무슨 주사요?”
“좀비 주사.”
“좀비 주사?”
“맞으면 좀비로 안 변하는 주사가 있다지 뭐야.”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죽어서 좀비가 되기 싫으면 씻어야 한다. 옷을 세척해서 뮤테이션 인자를 떼어내야 한다.
“뭐 타고 오셨어요? 걸어오셨어요?”
“차 타고. 버스 태워줬어. 기사와 단장이라는 사람이 지나가다 이 아파트를 보더니 저기가 좋겠다며 갑자기 여기 내려준 거야.”
“그렇군요.”
예상한 그대로의 흐름이다.
딱히 감상을 느낄 여유도 없기에 돌아가려 했다.
“······그 주사 맞으면 죽어.”
뒤에서 노파가 중얼거렸다.
“독약이야 그거. 머리가 빠지고.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물을 흘리며 죽어. 전에 있던 곳에서도 나 빼고 다 죽었다고······.”
영양분을 얻어서인지 아니면 감정을 자극당해서인지 노파는 아까와 달리 몸을 앞뒤로 흔들거리며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그 아파트에 다시 방문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멀리서부터 상스러운 욕설이 들리던 아파트는 평온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흙과 먼지로 덮인 도로에서 새로운 바퀴 자국을 발견했다.
휘날리던 깃발은 없어졌고 입구를 지키던 노파도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없었다.
뒤편에 커다란 구덩이와 더불어 매캐한 냄새가 났다.
이 구덩이가 내가 여기를 다시 들리게 만든 검은 연기를 만들어낸 장소인 것 같다.
가까이 가보니 탄화된 나무와 하얀 잿가루가 어지러이 섞여 있었고 드문드문 그 안에서 타다 남은 뼈들이 보였다.
사람의 해골이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좀비 한 마리가 비칠거리며 서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건 염주. 아파트 앞에 앉아 염불을 외우던 노파다.
노파의 미간엔 말라붙은 피와 함께 총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고 또 이 시체를 다시 내 손으로 눕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무심코 내뱉었다.
“······그냥 주사 맞지 그랬어요?”
겉돌던 노인이 다른 노인들과 합류했다.
일전에 다른 노인이 내게 준 연락처가 적힌 종이에 불을 붙이고 노파의 시체에 던져 넣었다.
공교롭게도 불길은 노인이 꼭 쥐고 있던 오래된 염주에 옮겨붙었다.
“나무아미타불.”
망인의 방식으로 명복을 빌며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생존자가 있나 아니면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나 싶어서 한 행동이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옥상에 올라가 아직 신선함이 가시지 않은 햇살이 내리쬐는 가을의 대지를 보았다.
움직이는 것들이 보인다.
사람들이다.
아무도 얼씬하지 않던 벌판에 저마다의 무리가 깃발을 펄럭이며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디펜더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영원히 숨을 수는 없다고.
나름 자신했지만 저 인파를 보니 내 자신감이 얼마나 빈약한 기초 위에 세워진 건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염불을 외우던 노파가 내게 영감을 주었다.
쿵!
무너진 방공호의 파편 하나를 밖으로 치웠다.
파편 너머로 내 메인 방공호로 통하는 지하통로가 은밀한 어둠을 드러냈다.
영원히 숨을 수 없다면 잘 숨기기라도 해야겠지.
노인들을 태워다 준 사람들이 그 아파트를 회전율 높은 요양병원으로 선택한 건 아파트의 외관이 그들이 보기에도 참 볼품이 없어서였다.
이 방공호가 무너진 자리에 위장 하우스를 세울 생각이다.
좀비도 거를 정도로 거지 같은 집구석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