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9화 (19/183)

17. 예감

간만에 TV 전파를 수신했다.

대통령이 무려 성명 발표를 하신단다.

제대로 듣지 않았다.

하수 배관이 막혀서 그걸 뚫느라 방공호 안과 밖을 끊임없이 오가야 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부가 제주도로 이전하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개소리를 하고 있다.

TV를 켜둔 채 배관 작업을 시작했다.

배관을 막은 주범은 하수배출구 주변에 쌓인 낙엽과 쓰레기였다.

쓰레기는 그렇다 치고 낙엽은 대체 어디서 흘러들어온 걸까.

“최근 군용기가 자주 이륙하는 이유는 제주도로 정부 자산을 옮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위협 때문입니다. 지난 3일 일본 자위대 해군은 부산에서 출항한 백오십 명에 달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탑승한 인도주의적 망명선을 경고사격 없이 격침했으며······.”

중간중간 방송을 들으며 방공호와 바깥을 오갔다.

하수 배관과 방공호 사이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메인 방공호가 자리 잡은 야트막한 동산을 끼고 실개천이 흐르지만 유량도 적고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거리를 두고 하천 쪽에 하수배출구를 설치했다.

결과적으로 훌륭한 판단이었지만 이럴 땐 조금 성가시다.

“일부 정부 자산이 제주도로 이동한 건 사실이나 이는 국가 위난 위원회 정보전략국 이상훈 국장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로······.”

거기서 TV를 끌까 했지만 언제 이런 방송을 다시 하나 싶어 계속 틀어놓고 작업을 재개했다.

배출구 쪽에 철망을 쳐서 보완을 하고 물을 흘려보내 보았다.

깔끔하다.

내친김에 정화조 청소도 실시했다.

호스와 펌프로 정화조 밑바닥에 가라앉은 슬러지를 빨아들여 다른 곳으로 보내는 작업이다.

펌프가 내 배설물을 빨아들이는 동안에도 틈틈이 방송을 청취했다.

“정부는 3일 안으로 정부 비축분을 풀어 제한 없는 배급을 시작할 것이고 아울러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긴급 무상 검진을 시행할 예정입니다. 일부 언론과 루머에서 이야기와 달리 우리 정부는 식량과 의료품을 비롯한 주요 소비재들에 관해, 3년 치에 달하는 비축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별도의 정화조 설치 없이 바로 하천에 흘려보내는 방안도 생각해봤지만 사람 분변 냄새라는 게 꽤나 지독하고 침전물이 배출구 주변에 눌어붙으면 여기에 사람 산다는 거 알려준다는 것밖에 되지 않기에 나의 멘토, 존내논의 도움을 받아 설치했다.

물론 청소를 할 때마다 후회가 들지만 그 잠깐의 힘든 시기만 보내면 현명한 판단이다.

내 방공호는 잠깐 사는 피난처가 아니라 내가 죽을 때까지 살아갈 곳이니 말이다.

“앗! 시발!”

입가에 똥물이 튀었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방공호에 돌아오니 훈훈한 목소리가 날 반겨줬다.

“우리 정부는 영원히 국민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방송을 껐다.

전기도 아깝거니와 더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다.

그래도 소득은 있다.

3일.

최소 3일간은 조용하겠지.

어째 나쁜 예감밖에 안 들지만 말이다.

*

첫날.

방공호 주위를 돌며 상태를 점검했다.

중점적으로 확인한 건 더미 방공호 쪽으로 메인 방공호와 연결된 도폭선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일일이 검사했다.

불량은 없지만 위장이 드러난 곳이 2군데나 있었다.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위기 시엔 그 작은 차이가 생사를 가를 수 있다.

정성스레 도폭선을 위장한 후 새로운 폭발물을 더미 방공호에서 메인 방공호로 통하는 비밀 통로용 출입구 앞에 설치했다.

문짝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하진 않지만 전처럼 메인 방공호 안쪽에서 얼쩡거리는 놈들을 버튼 하나로 간단히 쓸어버리기 위해서다.

비밀 출입문 뒤편에도 죽음의 함정과 나만이 쓸 수 있는 엄폐물을 준비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게끔 했다.

오후엔 미리 건조기 안에 넣어 두었던 고기를 보존식량으로 만드는 작업을 실시했다.

내가 만들려는 건 이른바 페미컨이라는 녀석으로 고기를 바짝 말려 믹서기로 잘게 갈아 건조 크랜베리와 섞어 기름으로 굳혀 만든다.

보관기간도 그럭저럭 길고 영양도 풍부하다고.

당장 만들 계획은 없었다.

보존식이라고 하지만 통조림보다 효율이 좋을 수 없고 내 입맛은 조금 까다로운 편이니.

어디까지나 냉동고나 발전기를 쓸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한 보험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최중령 사건 때 드러났다.

언제 또 제2, 제3의 최중령이 내 영역을 침범할지 모른다.

곧 날이 차가워지는 시기가 오겠지만 유비무환이다.

3일이라는 여유도 있겠다 부랴부랴 영상을 보고 만들어 봤는데 주방장의 탁월한 손맛 덕분인지 꽤 먹을만했다.

다만 보존식이라는 특징을 뺀다면 추천할만한 음식은 아니다.

손이 너무 간다.

SKELTON : (스켈톤 요리) 페미컨 만들어 봤다!

그래서 부족한 시간을 쪼개 커뮤니티에 올렸다.

좋아요는 없지만 신선한 내용이라 꽤 댓글이 달렸다.

인간사냥꾼도 모처럼 한가한지 댓글을 달아줬다.

Defender : 난 요리 잘하는 남자가 좋더라.

그 글을 본 순간 나는 정색했다.

“?”

이 새끼 왜 이러지?

설마 그건가.

그··· 남자 좋아하는 남자 말이다······.

친구 해제할까? 아니, 해제하면 오히려 해후의 시간을 앞당길 거 같으니 참도록 하자.

일말의 섬뜩함을 안고 페미컨 서른 여섯 끼 분량을 서늘한 곳에 방부제를 듬뿍 버무려 저장했다.

2일 차엔 더미 방공호를 돌며 사격로를 정비했다.

총안구마다, 엄폐 거점마다 실제 총을 가지고 직접 조준해보면서 상대방이 엄폐물로 쓸 만 한 것들을 미리 제거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예전에 했지만 전쟁 이전에 한 것이라 그때와 지금과는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특히 징글맞게 자라는 풀들이 문제였다.

종일 낫으로 쳐내며 내 영역을 나 자신의 것으로 개조했다.

이렇게 개고생을 하지만 전투가 마지막 선택지라는 주의는 변함이 없다.

난 혼자고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은 끝이 없으니까.

적의 수준도 높아지는 것도 위험요인이다.

나라가 붕괴하면 군인이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 변하는 건 인도나 중국의 사례를 봐도 역력히 알 수 있으니.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군인들이 가득 차 있을 것 같진 않다.

김다람도 말했다.

제주도에 군인을 위한 자리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마침 수송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저 안에 김다람도 타고 있을까?

그 녀석도 슬슬 갈 때가 된 거 같은데.

그날 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하루의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준 뒤 보존 우유를 한 잔 들이키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최근 상종가를 달리는 유저는 기자 양반이다.

서울 안에서 거주하며 실시간으로 망해가는 도시의 소식을 알리는데 인기가 없을 수가 없지.

gijayangban : 강남 실시간.jpg

gijayangban : (페일넷 펌) 실시간 한강 온도.jpg

gijayangban : 최근 서울 패션.jpg

gijayangban : 사대문 안에 나타난 탱크.gif

...

아니나 다를까, 인기글란은 이제 기자 양반의 전용 게시판이 된 느낌이다.

마치 전성기의 존내논 같다고 할까.

그 기자 양반의 게시글 하나가 내게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gijayangban : 요즘 공항 풍경.jpg

공항에 사람이 잔뜩 몰려 있었다.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이다.

군경이 막아서고 있지만 일부가 활주로에 난입해 수송기에 태워달라며 수송기를 막아섰고 성난 몽둥이가 그들을 두들겨 팼다.

죽은 사람은 없지만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회백색의 콘크리트에 흥건하게 묻은 장면은 몬스터가 내 동료를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장면을 연상케 했다.

*

대통령 담화 후 3일째.

양지바른 햇살 아래 담요와 간이 테이블을 깔아놓고 무기와 탄약을 점검하고 도끼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평온하고 조용한 날이었다.

커뮤니티의 분위기도 대체로 나와 비슷한 나른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폭풍 전의 고요라고 할까.

저마다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모두의 관심은 서울에 있다.

그래도 중간에 작은 소동이 있긴 했다.

Defender : 자꾸 여자라고 해서 인증.

인간사냥꾼이 손 사진을 찍어 올렸다.

길고 하얀 손가락을 가진 그 손은 꽤나 예쁜 편이었지만 그 다부진 형태와 불거진 핏줄은 그가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는 걸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인간사냥꾼, 저건 남자다.

뭔 여자 실루엣이니 뭐니 헛소리들 실컷 떠들었는데 막상 인간사냥꾼이 인증하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가 여자라고 강하게 주장하던 한 유저만이 설득력 없는 주장을 외롭게 이어나갈 뿐이었다.

unicorn18 : (정보) 여자 손도 조명과 각도에 따라 남자 손으로 보일 수 있음!

그 말에 동조하는 유저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그 천하의 인간 사냥꾼도 드디어 어려움에 부딪친 것 같았다.

묵묵히 시니컬한 팩트 폭력과 살인 인증만을 올리던 그 녀석이 그답지 않게 모두가 보는 게시판에서 어려움을 드러낸 것이다.

Defender : 총알 남는 놈 있냐?

클릭해보았다.

-5.56mm 탄환 구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이쪽은 통조림, 전지, 의류, 기름 등등 의약품 빼고 비축분 넉넉하게 있다. 교환할 녀석은 DM으로.

덧. 내가 사람 많이 죽인다고 걱정하는 놈들 있는데 게시판 유저들은 안 건드림.

하긴 그렇게 많이 죽이고 다니니 총알이 부족할 수밖에.

거래 제안을 해도 하필 지금 시국에 하는 걸 보면 역시 사고방식이 일반인과 다른 놈이다.

그런데 이 녀석, 내 인터넷 친구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스켈톤. 총알 남는 거 있지?

SKELTON : 별로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있으면 좀 주라. 원하는 거 있어?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대답 좀

SKELTON : 님이 대화방을 나가셨습니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개수작하지 말고. 찾아간다?

“······하.”

딱히 이 친구가 내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전투력이 상당한 수준으로 추정되지만 그뿐이다.

변수가 많은 야지에서는 그쪽의 준비와 운의 유무에 따라 승부가 갈리겠지만 변수가 배제된 상황에서 내가 그에게 패배할 가능성은 극히 드물 것이다.

다만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누구나 보기 싫은 영화 장르 하나 정도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공포 영화다.

인생 자체가 공폰데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인간사냥꾼은 그러니까 공포 영화 같은 놈이다.

그 공포 영화 같은 녀석이 자꾸 보잔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농담이고 지금 진지하게 위험해. 군대랑 연줄 있는 놈들을 건드렸거든. 보름 전부터 주변을 수색하고 있는데 곧 한바탕 싸워야 할 거 같아. 다른 놈은 모르겠지만 너라면 믿음이 간다. 스켈톤. 좀 도와주라.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지금까지 언행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어쩌면 답은 미리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SKELTON : (의리의 사나이 스켈톤) 어디냐?

디펜더와 나는 크게 다를 바 없는 동류니까.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디펜더 감동) 스켈톤 멋져!

디펜더가 요청한 접선 장소는 의외의 장소였다.

용인 쪽에 있는 놀이공원 쪽이다.

전쟁 당시 화학탄을 정통으로 맞아 철저하게 버려진 곳인데 그 주변에서 만나잔다.

딱히 내키는 장소는 아니다.

그 일대는 예전부터 정부 통제가 이뤄지지 않는 회색지대다.

가까운 곳에 침투형 몬스터가 장악한 지역이 하나 있는데 배회형이 아닌 정주형이라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위험하지 않지만 그 몬스터가 만든 공백지대가 갖가지 범죄자를 불러 모았다.

뮤테이션은 보고된 바 없지만 사실 여행 중에 가장 두려운 건 느닷없는 총격이다.

디펜더를 만나러 간다는 건 그 확률을 대단히 높인다는 소리다.

망설여질 수밖에.

한동안 답이 없자 녀석이 문자를 보내왔다.

Defender님으로부터 온 메시지 : 오기 곤란하면 내가 갈까? 아쉬운 건 나니까. 하지만 차가 없어서 걸어가야 해.

SKELTON : 아니, 내가 갈게. 안전한 경로만 말해 줘.

위험하긴 하지만 내가 가는 게 차라리 낫다.

내 영역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인간 사냥꾼이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내 영역은 그리 쉬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인간 사냥꾼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접선 일정을 논의했다.

위험 구역이다 보니 100m 단위로 지도를 보고 경로를 논의해야 했다.

이것이 폭풍 전야 3일째의 마지막 일상이었다.

*

이튿날, 모두가 기자 양반의 손가락이 전할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나도 긴장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심정을 품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새로고침을 거듭 눌렀다.

keystone : (비보) 옆동네 천막 친 개새끼들 현황 - 아직도 안 나감

익명118 : 서버 응답 속도 전보다 느려진 거 같지 않냐?

iamjesus :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unicorn18 : 내 꼬물이 딱딱해져써...

익명552 : 현재 서울 상황.jpg

Kyle_Dos : 윗글 낚시임

SKELTON : 오늘 점심밥으로 뭐가 낳을까요?

...

...

언제나 평온한 내 마음의 고향.

오후가 되자 드디어 기자 양반이 글을 올렸다.

gijayangban : 현재 서울 상황.jpg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정부가 약속을 지켰단다.

약속했던 식량을 배급하고 의약품 등의 지원을 하는 중이라고.

절반의 안도와 절반의 허망함을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어떻게든 고비를 넘겼구나.

수송기 한 대가 굉음을 일으키며 내 방공호 위를 지나갔다.

모처럼 침구류 일광소독이나 해볼까.

침구를 정리하고 있자니 갑자기 K-워키토키가 날카로운 발신음을 올렸다.

개인식별번호 : DARAM

김다람이다.

“······.”

누군가 말했다.

나쁜 예감이 늘 들어맞는 건 사람들이 좋은 예감은 카운트하지 않아서라고.

그런데 사람이 좋은 예감을 카운트 하는 경우가 그리 많을까?

좋은 예감을 카운트 할 수 있는 인생이라면,

“선배. 방공호 어느 정도야? 나 포함해서 3명 들어갈 자리 있어?”

분명 행복할 인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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