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에 집을 숨김-10화 (10/183)

10. 재벌 (1)

세상이 망하면 재벌은 어떻게 될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만 한 소재다.

최근 맹활약중인 커뮤니티 유저 ‘기자양반’이 재벌 가문 하나의 근황을 전했다.

gijayangban : 석주그룹 회장 박철주 아지트 발견! 철주햄 씨다~ 씨~

기자양반이 올린 재벌의 근황은 우리 멸망주의자들을 일거에 낙담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완만한 위에 수십 명이 능히 살 수 있을 법한 콘크리트의 요새를 쌓았고 그 안에서 농업, 제작, 오락까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자체 생태계를 구축했다.

드론으로 찍은 요새 내부 소형 골프장을 본 순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역시 재벌이다.

재산이 조 단위로 있으면 저런 것도 만들 수 있구나.

딱히 부럽지는 않다.

아무리 용써봐야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기자 양반이 올린 박철주 이외에도 대한민국 유수의 재벌들은 그와 비슷하거나 좀 더 못한 성채를 만들어 재앙에 대비했다.

한국을 떠난 재벌은 몇 없었는데 외국도 안전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일뿐더러 한국에서 통하는 끗발이 외국에서 통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이유이리라.

이들 대부분은 그룹을 버렸다.

수천, 수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현대의 군주에서 일개 가문의 가주로 스스로를 격하해 생존을 도모했다.

그것이 이 멸망할 운명의 세계에선 합리적인 선택지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

*

최초의 왕래 이후 나는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은 서울에 방문하려 노력했다.

갈 때마다 주변 풍경은 을씨년해졌고 비참해졌으며 무엇보다 위험해졌다.

서울 진입 때마다 강남을 거쳤는데 한때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던 부촌인 강남은 이제 각양각색의 텐트와 조잡한 가건물로 가득 찬 난민촌으로 쇠퇴했다.

들릴 때마다 텐트가 줄어드는 난민촌에 들어설 때마다 눈에 밟히는 가건물이 있다.

쓰러져가는 가건물은 건물 자체보다 상태가 양호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 파풍 ]

한때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재벌 중 하나.

이 가건물이 세워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1년하고도 약 4개월 전, 그러니까 전쟁 발발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북적이던 난민촌을 통과하던 중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있어 가봤더니 과연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수소문해보니 파풍 그룹이 직접 사재를 털어 세운 무료 급식소란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때 급식소를 운영하는 것과 무역이 마비된 상태에서 급식소를 운영하는 것의 레벨은 천지 차이다.

파풍은 이런 급식소를 서울 주요 거점에 몇 개나 세워 운영했다.

아무리 파풍이 굴지의 재벌이라지만 이건 좀 버겁지 않을까?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겠다 장장 2시간이나 줄 서서 기다리니 어째서인지 편육과 소고기국밥이라는 장례식장에서 볼 법한 메뉴가 나왔는데 제법 맛이 있었고 심지어 성인에겐 소주 종이컵 반 컵까지 제공했다.

방공호에 있을 땐 술은커녕 담배도 하지 않지만 여기선 넙죽 받아먹었다.

“캬~!”

이 박규, 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에 파풍맨으로 돌변할 정도로 가벼운 남자였다!

그런데 밥을 먹는 와중 주위에선 내 생각과는 사뭇 다른 음습한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었다.

“회장 놈. 정치하려는 모양이네.”

“척 봐도 척이지.”

“이 시국에 이렇게 돈 쓰는 거 다 흑심 있어서 아니야? 국민 위로는 개뿔.”

솔직히 듣기 거슬렸다.

이 어려운 시국에 잘 처먹었으면 고마워라도 해야지, 왜 자꾸 남의 의도를 의심하는 걸까.

자기도 마냥 선의로만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면서.

소주 한 잔이나마 파풍의 은혜를 입은 몸이라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정도의 의리는 또 없는 거 같아 꾹 눌러 참았다.

대충 분을 삭히고 식당을 나서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제풍호입니다.”

활동적인 점퍼 아래 잘 다려진 양복바지를 입은 장년 사내가 억지미소를 짓는 사람들을 대동한 채 국밥을 먹으러 온 사람들에게 연신 인사와 악수를 하며 자기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잘 드셨습니까? 제풍호입니다.”

제풍호.

파풍 그룹의 오너다.

그 뒤엔 그와 비슷한 관상의 중후한 사내들과 아마 자제로 추정되는 말쑥한 청년과 예쁜 아가씨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열대로 서 있었다.

귀신에 홀린 듯이 그쪽으로 향했다.

내 의도는 재벌가 아가씨와 악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아가씨들은 뒤에 빠져 있었고 실제로 나와 손을 마주 잡은 건 정력적인 관상의 제풍호였다.

“제풍호입니다.”

실제 재벌 총수를 이렇게 가까이 보고 악수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헌터가 아닌 사람 눈이 이렇게 빛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게다가 그의 손은 거칠고 딱딱했으며 손 자체에 악력 이상의 미지의 힘이 느껴졌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곧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모양이다.

국회의원이 전부 죽어서가 아니라 임기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 18%가 증발한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 사망률이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 의미심장한 결과를 예고하고 있었다.

*

국밥을 얻어먹은 후 한 빌딩 아래에 도착했다.

이 건물은 국가 위난극복 위원회. 약칭 국위원의 것이다.

현대의 비변사라 불리는 이 초법적 기관은 전쟁 발발 이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있고 영향력이 강한 기관이다.

서울에 방문하는 주된 이유는 국위원에 지인이 다수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득도 많이 봤다.

가장 중요한 정보는 물론, 워키토키, 군용주파수, 스팸, 식용유 명절 세트 등등.

그날따라 유난히 사람이 적었다.

특히 내가 매일 뭔가를 부탁하는 여직원이 없었다.

얼굴을 아는 경비와 눈인사를 하고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과 죽은 눈,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와 자세.

첫인상부터 싸늘했다.

“무슨 일입니까?”

“최근 전선 상황은 알고 계실 겁니다. 점점 격화되는 전투로 현재 병력이, 특히 전쟁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한 병력이 부족하여······.”

아니나 다를까, 모병관인 모양이다.

전쟁의 특성상 병력의 양보다 질이 중요해져 아무나 뽑아가는 대신, 신체 건장하고 싹수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무작위로 권유한다고 한다.

이 사람 눈엔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인데 나는 전선에 갈 마음이 추호도 없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뭐한데 제가 능력이 있었다면 여기 와서 인맥 팔아 구걸질 하러 왔겠습니까?”

나름 당당하게 받아 쳐봤다.

“왕년에 헌터 하셨던데.”

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누가 보냈어요? 이상훈 국장입니까?”

이상훈이 맞다면 찾아가서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아니오. 김다람 위원입니다.”

“김다람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후배다.

유독 나를 잘 따랐던 녀석이었다.

내 생각엔 날 좋아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기억 속엔 쓸데없이 의욕이 넘치는 반면 사람이 어리숙해 늘 일을 그르쳐 내게 의지하는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그건 세월이라는 걸 너무 무시한 처사이리라.

“박 선배.”

단 5년 사이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당시에도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름 소녀의 마음을 간직했던 후배는 이제 찔러도 피는커녕 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답 안 나오는 피폐한 이미지의 관리자로 변해 있었다.

“오랜만이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이 녀석은 내가 알던 착한 후배와는 전혀 다른 생물이라는 걸.

그녀의 책상 위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란 듯이 놓여 있다.

어머니가 된 것이다.

저 김다람이.

“선배 성격 아니 짧게 말할게. 한 번만 도와줘.”

“내가 왜 도와야 하지라는 말을 하고 싶긴 한데, 그러면 안 되겠지?”

“나라에 끌려갈래? 아니면 지금처럼 프리하게 살래?”

“다시는 복무하지 않기로 딜하지 않았나.”

“그런 약속이 지금 세상에 통할 거라 생각해?”

정색한 내 얼굴과 어이없다는 후배의 얼굴이 차이가 내가 생각했던 현실과 실제 현실의 괴리를 대변해주는 듯했다.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프리하게 살아야지.”

“그러면 이번 한 번만 도와줘. 그걸로 퉁치기로 이상훈씨랑 딜했으니까.”

“이상훈이?”

“선배한텐 관심 없으니 악감정 가지진 마. 그 사람은 이제 개인이 아니라 수치를 보는 사람이거든.”

“높으신 분이 되니 세상도 달리 변하는 모양이네.”

“선배도 사람 부족한 거 뻔히 알잖아? 전선에서 무슨 일 일어나는지도?”

대체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약간의 비난을 섞어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

입안에 쓴맛이 흘러온다.

나도 알고 있다.

국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마냥 떳떳하지 않다는 걸.

삭막한 적막 속에서 김다람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제풍호.”

“제풍호?”

소고기국밥 향기 아래 유난히 눈이 반짝이고 묘한 악력이 있던 사내의 얼굴이 그린 듯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 자기 사람들로 몬스터를 잡겠대.”

그녀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보고서의 내용이 맞다면 말도 안 되는 작전이다.

아니, 작전을 빙자한 집단 자살이다.

굳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치 빠른 내 후배는 날 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시늉만 해.”

후배가 변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토록 잔정 많고 상냥하던 후배의 변화는 제법 마음에 쓰게 스며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전선에 끌려가는 거, 막아줄게.”

“······고맙다.”

그래도 본성만큼은 변하지 않은 모양.

인생의 씁쓸함과 그 안에서도 드물게 피어나는 감동을 동시에 안고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선배.”

김다람이 날 불렀다.

“어째 하나도 안 늙은 거 같다?”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

제풍호와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였다.

만남의 장소는 세계적인 영국계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파풍 그룹 본사 사옥.

파풍의 본사는 핵공격에도 건재했지만 전력계통 및 승강기 문제가 발생해 사내의 으리으리한 초고속 엘레베이터 대신 옥외에 설치한 공사판용 임시 엘레베이터를 타고 55층이라는 만만찮은 층수에 느릿한 속도로 올라가야 했다.

“으.”

더럽게 추웠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힘 좀 꽤나 썼다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던 그룹 회의실엔 나 이외에도 양복을 차려입은 일단의 무리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원증을 패용한 거 보니 그룹 내 직원으로 보이는데 수출길이 막혀도 그룹은 어느 정도 모양새를 유지하는 모양.

문득 궁금해졌다.

월급은 나오는지? 그들의 직원이 자랑하던 성과급 보너스는 나오는지?

무료 급식소에서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모두와 악수를 나누던 제풍호는 회의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정중앙 좌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를 상대한 건 비서로 보이는 50대 중반의 지적인 사내였다.

“박규님이시죠? 헌터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가 간략하게 나를 인터뷰했다.

경력, 전투 경험, 등급 등등.

어차피 내 기록은 대부분 말소된 상태다.

되는대로 말했다.

“D급입니다. 게이트 앞에 선 적도 있고 약간의 전투 경험도 있습니다만 메인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제풍호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헛기침을 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궁금한 건 이유였다.

왜 재벌 수장이나 되는 사람이 뜬금없이 몬스터 사냥에 나서는지.

아무리 무역이 끊겨 영업이 불가능한 세상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과도한 업종 변경 아닌가.

안타깝게도 양복쟁이들 중에 내 의문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빈약한 경력을 밝히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나, 박규는 사무용 집기 비슷한 무언가로 각인된 것이다.

잠시 후.

“나가셔도 좋습니다.”

발언권 한 번도 얻지 못한 채 정중하게 회의실에서 퇴장당했다.

사실 할 말도 없긴 했지만.

질문이 하나 있긴 했다.

복도엔 회의실 안과는 분위기가 다른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그나마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실실 웃으며 고개만 꾸벅거릴 뿐 마치 자신이 외국인인양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대충 어떤 취급인지 알 것 같아 입 꾹 닫고 있자니 생각지도 않게 접근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묘령의 아가씨.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제풍호가 급식소에서 악수할 때 뒤에 들러리처럼 서 있던 젊은이 군단 중 하나였다.

상당한 미인이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괜찮으실까요?”

처음 복도에서 봤을 땐 차가운 인상이라 다가서기 어려운 느낌이었는데 막상 말을 섞어보니 그녀는 금세 훈련된 미소를 머금으며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회장님이 왜 몬스터 사냥 같은 걸 하냐고요?”

안타깝게도 다른 이와 달리 사원증을 패용하지 않아 이름을 알 순 없었지만 액면만 보면 회장 손녀나 조카 정도 되지 않을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 한숨을 섞어 내막을 이야기해줬다.

“일전에 회장님께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시려던 거 아시죠?”

“네.”

“그게 무산됐거든요.”

“왜요?”

“현역 의원들이 임기를 사실상 무기한으로 연장해서요.”

“저런.”

나중에 알아본 결과 거의 만장일치란다.

기권표 2개가 나오긴 했다는데 내가 볼 땐 그놈들이 더 역겨운 악질이다.

“회장님 계획이 틀어져 버린 거죠. 그동안 여당야당 가리지 않고 적지 않은 지원을 해주셨거든요. 의원 개개인에 대한 편의 지원부터 시작해 부서진 의사당 수리까지. 해서 그룹 차원에서 항의하니 국회에서 답하길 현재 공석이 된 선거구 하나 찾아오면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그렇게 일이 돼버린 거죠.”

“그 ‘선거구’가 우리가 가려는 곳입니까?”

“저는 안 가요. 회장님과 그 충신들이 가겠죠.”

첫인상과 달리 그녀는 파풍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친 김에 물어보았다.

“저요? 파풍가 아니에요. 정확히는 그 아래 사람이죠. 아버지가 1차 하청업체 대표거든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회의실 문을 노려보았다.

“······이미 망한 그룹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여성은 파풍에 어떠한 미련도 없다는 걸.

오히려 그녀는 파풍에 대해 선명한 적의마저 머금고 있었다.

물꼬가 트이자 그녀는 가슴에 담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쏟아냈다.

“전부 다 제정신이 아니에요. 혈연관계도 아니고 고용거래 관계에 불과한데 왜 다들 전쟁 이전처럼 행동하는 걸까요?”

“글쎄요······.”

“저기.”

갑자기 여성이 눈을 반짝였다.

“헌터시죠?”

“지금은 아닙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그녀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은은하게만 풍겨 오던 향수 냄새가 코끝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 좀 말려주시면 안돼요?”

그녀가 부친의 명함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 미친 짓, 제발 그만두시라고.”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선두엔 나선 건 제풍호였다.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에 언제라도 빛을 발할 부릅뜬 눈으로 앞을 바라보며 망설임 없는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 뒤를 십수 명의 양복쟁이들이 저마다의 표정을 지은 채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아까 날 상대해주었던 회사 중역이 날 보더니 퉁명스레 말했다.

“박 헌터님 가십시다.”

“저도 가야 하나요?”

“네.”

말 상대를 해 준 여성 쪽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나와 그녀 사이를 지나갔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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