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데미안04 외 1
우리 멸망주의자 거의 대부분은 남자, 그것도 독신 남성이다.
존내논의 정모에서 나는 여성 참가자를 본 적이 없고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여성이라고 암시하는 글을 읽은 적도 없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유는 나온다.
우리 멸망주의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 망하길 기도하며 고사 지내는 놈들이다.
현재의 세상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멸망에 대비하기 보다는 현재가 계속되는 걸 기원하겠지.
만약 몬스터가 갑자기 사라지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나 박규의 경우엔,
좆망이다······.
망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락으로 간다.
그 증거는 지금은 안테나가 끊긴 휴대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web발신] (신헌은행) 박*규 고객님 담보대출건 경매실행 예정 안내
[web발신] (산왕머니) 박규 고객님 레이디스론 연체건에 관한 채권이관 알림
[web발신] 신라신용정보입니다. http://sinramoneytaker.co.kr/....
개똥땅에 시멘트 공사 장비 퍼부은 것도 모자라 막판엔 돈이 모자라 아예 돈을 안 갚을 요량으로 대출까지 땡겼으니.
이런 우중충한 놈들 모인 곳에 꽃처럼 화사한 여성 유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한 여성 유저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났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하고도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
방공호 생활을 1년 넘게 하다 보면 누구나 겪는 문제가 있다.
재미의 결핍이다.
나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안전한 곳에서라면 가볍게 한 잔 하지만, 홀로 술을 마시는 건 중독과 연결되고 중독은 죽음과 이어지니까.
담배는 적당한 유희지만 귀중한 물물교환 자원일 뿐더러 사람을 부르는 힘이 있다.
오랫동안 강제 금연한 인간의 후각은 개못지 않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다른데서 재미를 찾자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요일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틀어주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만나 술 한잔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축구 같은 몸 쓰는 운동하자니 팀이 없다.
집단 생존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나 같은 1인 생존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탁구도 못 친다.
낚시에 취미를 들일까 생각했지만 인근 저수지 방사능 수치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기에 포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님들이 많아졌기에 방공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 취미 생활은 자연스레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갔다.
솔직하게 현시점에서 가장 재밌는 유흥은 우리 멸망주의자 커뮤니티 비바! 아포칼립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를 이야기하는 곳이니.
아이엠지저스, 동탄맘, 인간사냥꾼 같은 이상한 유저도 있지만 나 같은 모범적인 유저도 얼마든지 있다.
전쟁이 시작되고 1년하고도 반 이상이 지나간 현재 시점에선 만년 눈팅족이었던 나도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글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심심하기도 하고 소통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는 건 물론 하나둘 사라지는 동료들을 보며 우리의 소중한 커뮤니티가 사라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한몫했다.
그 결과물이 아래다.
SKELTON : (스켈톤 일상) 오늘 저녁입니다 ㅎㅎ
SKELTON : (스켈톤 썰) 어제 군용 주파수에서 들은 따끈한 소식
SKELTON : (스켈톤 메이킹) 양모펠트 인형 만들어 봤습니다!
SKELTON : (스켈톤 영상) 스켈톤의 비트박스 (3)
어째서인지 커뮤니티에서의 내 모습은 나의 멘토 존내논을 닮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존내논을 흉내 낸 건 아니다.
존내논은 (존내논)이라는 머릿글만 추가했지만 나는 그 머리글 뒤에 (스켈톤 영상) 이런 식으로 세부적인 주제도 함께 넣어 읽는 이를 배려했다.
다만, 존내논과 달리 인기는 지지리도 없어 조회수는 늘 한 자릿수였고 좋아요도, 댓글도 달리지 않았다.
손재주도 글재주도 없고 남을 가르칠만한 지식도 없는 평범한 놈의 한계라고 할까.
자신의 일상을 멋들어진 그림체로 그려 올리는 웹툰 작가 출신 DragonC, 조잡하지만 다양한 자작 게임을 업로드하는 익명118 같은 인기 유저를 보고 있자니 왜 존내논이 그토록 공격 받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인기 카스트 최하위권에서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조회 수가 한없이 이진법에 근접하는데도 꾸역꾸역 자작 소설을 올리는 근성 작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흉측한 자기 알몸을 찍어 올리는 괴인, 씨몽키 일기를 연재하는 씨몽키 파파 등등.
씨몽키 파파는 다른 걸 키웠다면 좀 더 인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하위 그룹 중에 Demian04이라는 유저가 있다.
그는 볼펜으로 그린 자작 그림을 상습적으로 올렸는데 재능에 대해 말하자면, 재능의 싹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오브제는 늘 긴 생머리 여자였는데(그렇게 보였다) 심령화 수준으로 못 그린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가슴을 과할 정도로 크게 그렸다.
그냥 과할 정도라면 별말 하지 않았겠지만 데미안04의 경우 쌀가마니 두 개를 달아놨다.
아기 시절 잘 못 먹고 자랐나?
데미안04는 현대미술적인 그림을 주로 업로드할 뿐,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밝히는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 지지리도 못 그린 추악한 가슴괴물만 주구장창 올려대는 그의 꾸준함이 내가 그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남자,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
(검색결과 : demian04 – 4,553건)
...
Demian04 : 유리님 너무 예쁘세요~
Demian04 : 오늘도 유리님을 위해 꽃 한 송이 꺾어와 찍어봤어요.
Demian04 : 지금 데미안의 식량 창고 상태.jpg
Demian04 : (데미안04 푸드) 오늘 저녁입니다 혼자먹기 아쉽네~ ㅎㅎ
Demian04 : (데미안04 아트) 유리님 팬아트!!
Demian04 : (데미안04 스토리) 방금 피난민 쫓아냄
...
...
“······음?”
아니, 이 사람 갑자기 왜 내 흉내를 내는 거지?
사실 그 기묘한 머릿글은 존내논의 전매특허긴 한데 그걸 이어받아 멋지게 개선한 건 나다.
데미안은 존내논이 아닌 날 흉내내고 있다.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자랑은 아니지만 최근 나도 소소한 인기를 얻었다.
SKELTON : (스켈톤 이야기) 제풍호 회장과의 추억 (1)
재벌과 있었던 이야기를 구수한 썰로 풀어낸 연재물이 까다로운 비바! 아포칼립스! 한국어 게시판 사용자의 심금을 올린 것이다.
이중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3편은 인기글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데미안도 그 글을 읽은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친구, 왜 부쩍 말이 많아진걸까?
지금 같은 멸망기에 사람이 하루아침에 미쳐버리거나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누적된 스트레스, 외면하던 진실, 외부의 위협, 질병과 방사능, 마약,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데미안의 경우엔 일반적인 광기의 원인과는 다른 루트로 미쳐버린 게 확실했다.
Demian04 : (데미안04) 유리님 팬아트!!
나는 데미안의 글 하나를 눌러 내용을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님프인 긴 생머리 여인을 그렸다.
끔찍하게 못 그린 건 전과 다를 바 없지만 그의 모든 그림을 감상했던 이 박규의 눈엔 한 가지 차이점이 두드러졌다.
정성을 들였다.
그것도 매우.
문득 의문을 느꼈다.
유리님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실존인물? 아니면 상상 속의 여자친구? 커뮤니티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애당초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곈데.
도저히 의문이 풀리지 않아 커뮤니티에 자문을 구했다.
SKELTON : (스켈톤 질문) 도대체 유리님이 누군가요?
도움을 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Defender님에게서 온 메시지 : 차단한 모양이네. 차단한 유저글 보이기 기능 켜봐.
바로 인간사냥꾼이다.
이 친구는 현실에선 마구잡이로 살인을 일삼는 사이코패스지만 커뮤니티 안에선 조금 틱틱거리지만 바른 말만 하는 훌륭한 유저였다.
그러니까 현실 개새끼에 인터넷 현자라고 할까.
보통은 그 반대 아닌가.
아무튼, 인간사냥꾼의 조언을 받아들여 ‘차단글 보이기 기능’을 켜보니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다.
Yuri_need_man : 유리 왔어여~
Yuri_need_man : 오랜만에 화장하고 한 컷
Yuri_need_man : 우울
Yuri_need_man : 스타퍽스 가고파
...
...
“뭐야 이건.”
여자다.
그것도 젊고 예쁜 여자다.
글마다 자기 사진을 첨부했는데 얼굴 전체를 드러낸 건 아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은 20대 초반의 영락없는 미인상이다.
몸매도 색기가 흘렀는데 자기도 그걸 아는지 노출 심한 복장을 즐겨 입었다.
문신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소는 방공호 안이었는데 과거의 사진도 아니고 현재의 사진이다.
그런데.
“어라?”
오랜만에 내 선량한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함정이다.
저 유리님이라는 아이디를 내가 왜 차단했겠는가.
유리님을 차단한 게 아니다.
유리님이 쓰는 계정을 쓴 놈을 차단한 거다.
확인해보았다.
Yuri_need_man님의 계정 정보
계정 ID : viva103472
닉네임 : Yuri_need_man
작성글 숫자 : 10,323
“역시.”
비바! 아포칼립스! 게시판 닉네임은 단톡방 닉네임처럼 언제든지 바꿀 수 있지만 계정ID는 고유값을 갖고 있기에 바꿀 수 없다.
계정 ID로 검색해 이 계정의 원래 닉네임을 찾았다.
kurogod : 우리 아빠 재산이 1200억쯤 되는데
kurogod : 캐비어가 그립네~ 미국산 프라임 스테이크 따위로는 내 입맛 만족 못 시켜~
kurogod : 전쟁 나기 전에 타고 다녔던 밴틀리~
kurogod : 솔찌키 내가 올인했으면 니들보다 훨씬 좋은 방공호 지을 수 있었어~
...
..
쿠로갓. 이 친구는 내가 인간 사냥꾼과 더불어 차단했던 4인방 중 하나다.
허구한 날 일기장을 쓰며 허언을 일삼는 친구였다.
언행만 보면 나이는 어린 거 같은데 인증 사진에 찍힌 손의 피부 질감은 나보다 더 늙어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문제는 이 친구가 사라진 지 1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장을 쓰던 친구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방공호를 뺏기고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 쿠로갓을 죽인 놈들이 아주 재밌는 장난을 친다.
쿠로갓이 가진 몇 안 되는 가산 다 털어먹고 우리 커뮤니티를 발견했는지 젊고 예쁜 여자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나의 유쾌한 동료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냥꾼이 한마디 했다.
Defender : 이 병신 같은 낚시질에 당하는 새끼는 없겠지?
있다.
Demian04 : (데미안04) 유리님~ 오늘도 정말로 예쁘세요~ (하트뿅뿅 이모티콘)
데미안04다.
그는 유리가 올리는 모든 글마다 쫓아다니며 좋아요를 누르며 그녀를 열심히 찬양했다.
오지랖 넓은 유저들은 그를 뜯어말렸다.
특히 SUNBI라는 닉네임을 쓰던 유저가 가장 적극적으로 데미안04를 뜯어말렸다.
SUNBI : 어허, 젊은 친구가 이러면 쓰나. 자신을 다스리게. 거 야동 한 편 DM으로 보내 줄테니 용두질 한 판 하고 현자 타임을 가지시게~
거기까진 좋다. 예쁜 여자에 집착하는 건 남자로서 건강하다는 증거니까.
게다가 실시간으로 촬영한 유리님의 레깅스 사진은 나조차 저장할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엔 끝이 있기 마련.
약탈자는 곧 마각을 드러냈다.
Yuri_need_man : 저 외롭고, 보호가 필요해요. 저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는 남성분 계신가요?
약탈자가 죽음의 낚싯대를 드리웠다.
비장의 무기, 란제리를 입은 뇌쇄적인 사진과 함께.
하나의 결과가 예언처럼 내 앞을 흐르고 지나갔다.
Demian04 : ㅛ기요!
예언은 실현됐다.
데미안이 1초도 안 돼 미끼를 물었다.
“와······ 씨발.”
전쟁이 발발한 후 1년하고도 반이 지난 현재 우리 커뮤니티 유저들은 루페르트 라이히팰리스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끈끈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두 한 마음으로 그를 뜯어말렸다.
Defender : 하지 마라. 경고했다.
싸이코패스 인간 사냥꾼조차.
물론 이 박규도 일성을 보탰다.
SKELTON : (스켈톤 충고) 데미안님. 저 따라 해도 좋으니까 제발 현실을 보세요.
가장 격렬하게 이 사태를 비판한 건 선비였다.
SUNBI : 유리님. 경고하오. 우리 커뮤니티 일동에게 손을 댔다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커뮤니티의 반발이 거세자 약탈자는 작전을 바꿨다.
Yuri_need_man : 질투하는 분이 많으니 DM으로 이야기할게요~
다이렉트 메시지, 그러니까 지들끼리 보이는 쪽지로 이야기하겠다는 소리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이후 데미안04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데미안04를 교정하려던 선비도 그 일에 실망했는지 종적을 감추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신비로운 결과는 유리님의 증발이었다.
한탕만 해 먹고 끝낼 생각이었는지 커뮤니티 유저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늑대는 다시는 게시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문득 데미안04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과연 전쟁 전과 전쟁 직후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한 건 전쟁 직후였다.
그때도 별 말 없이 그림만을 올렸다.
그 당시 그가 좋아하던 주제는 무식하게 가슴이 큰 여성이 아닌, 풍경화였다.
조잡한 인물화와 달리 그의 풍경화는 매우 뛰어났다.
특히 무제04라고 이름 붙인, 노을지는 바다와 덩그러니 놓인 등대섬을 그린 풍경화는 퍽이나 아름다웠다.
한 장 프린트해서 내 방공호에 걸어놓을 정도로 말이다.
그걸로 일단락났다고 생각했던 데미안 에피소드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Defender :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유리님 인증
유리님의 살인 정모에 참석한 건 데미안04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인간사냥꾼도 참석했고, 약탈자와 얼굴 마담 전부를 무자비하게 죽였고, 이제 그 인증 사진을 게시판에 올렸다.
그가 올린 건 약탈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옛 형제도 약탈자보다는 예우를 갖춘 채(얼굴을 가린 채) 인증했다.
발가벗겨진 채 매질 당해 죽은 그들의 시신은 인간살해자가 죽인 약탈자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하나가 아닌 둘이다.
왜 둘일까.
죽으러 간 놈은 데미안04 하나가 아니었다.
Defender : 나머지 하나가 누구냐고?
과연 누굴까?
Defender : 10
10?
Defender : SUNBI.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