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5화
“깔깔깔!”
태화가 소감을 말하자 객석은 완전히 웃음바다가 되었다. 확실히 태화는 첫 번째 수상에서 호되게 신고식을 하고 나서 심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상태였다. 솔직한 자기 고백이 새로운 길을 터주고 있었다.
농담이라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태화는 조금씩 카메라 울렁증이라는 굴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태화가 마지막 남은 수상 소감을 했다.
“이 자리에 함께해준 <내 복권 내놔!> 스태프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어디에선가 중계로 폐막식을 보고 있을 스태프와 배우들께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태화는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나서 다시 허리 숙여 객석을 향해 인사했다. 태화의 인사와 함께 객석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태화는 무대를 빠져나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태화가 돌아오자 한재영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태화를 웃으며 반겼다. 태화가 자리에 앉자 이한철이 태화에게 말을 붙였다.
“태화야. 이번에 확실히 멋있었다.”
“한철이 형. 제가 그랬나요?”
“그래. 내가 너한테 카메라 울렁증 말했던 사람 아니냐?”
“그랬죠.”
“그런데 확실히 넌 달라졌어. 전에 보았던 모습은 이제 안 보인다.”
“그런가요?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너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이한철로선 이런 말을 할 만했다. 카메라 울렁증이라는 게 빠르게 나아지는 증세가 아니다.
“그냥. 관객상 받으러 올라갔을 때 고백을 했던 게 컸던 것 같아요.”
“고백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든?”
“네. 형. 그냥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태화야.”
이한철은 태화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 잠시 뜸을 들였다.
“정말 용기 있게 잘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너의 약점을 밝힌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죠. 쉬운 일이 아니죠.”
태화는 다음 발언을 하기 전 피식 웃었다.
“그런데 저 때문에 이 폐막식을 망칠 수는 없잖아요.”
이한철은 태화의 대답을 듣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긴 하지.”
이한철은 태화의 모습을 보면서 멋진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화는 어쨌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녀석이야. 그것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 속에서 말이지. 태화, 너에게 계속 놀라게 되는구나.’
#.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태화 군. 잘해주었네.]
[저도 제가 이렇게 잘 대처해 나갈지 몰랐습니다. 아마도 영감님이 해주었던 조언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고백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영감님. 분명히 고백하고 나서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니까요.]
[그렇지 않네.]
[그렇지 않다고요?]
[그렇네. 내가 자네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언일 뿐이네. 자네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네. 그리고 내 제안은 자네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네. 왜냐하면 자신의 약점을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세. 태화 군. 자네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결단을 한 것이네.]
[결단이라. 어찌 보면 영감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과연 돌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니까요.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결단이 맞겠지요. 어쨌든 전 이번엔 벽을 넘고 싶었습니다.]
[자네의 그 결정이 결국 자신의 벽을 깰 수 있게 한 것일세. 어찌 보면 오늘 이 폐막식이 좋은 계기가 된 것이네. 사람은 뭔가 계기가 있어야 벽을 깰 수 있으니까.]
사람에겐 계기라는 게 중요하다. 특히 태화처럼 뭔가 심리적인 부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는 더욱 중요하다.
[영감님 말에 공감합니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잖아요. 이런 날 벽을 깨지 언제 깨겠습니까?]
[허허. 좋구먼. 좋아. 난 자네가 대견스럽다네.]
[뭘 대견스러운 것까지 있습니까?]
[그렇지 않네. 이렇게 큰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데다가 자네는 스스로 약점까지 극복해가는 상황이네. 이걸 대견스럽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자네의 오늘 약점 극복은 앞으로 자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일세.]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왠지 저 자신이 달라진 느낌입니다. 영감님을 만나고 나서 나 스스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 크게 다가온 적은 없었습니다.]
각본상에 이어 시상이 이루어질 부문은 남녀 조연상이었다. 남녀 조연상은 나름대로 경합이 치열한 부문이었다. <내 복권 내놔!>는 이 부분에 후보로 올라가지 못했다. 남녀 조연상을 받은 연기자는 모두 중년 배우로 오랜 기간 연극을 통해서 다져진 기본기를 바탕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연기자들이었다.
남우 조연상 수상자는 이동필 그리고 여우 조연상은 한지숙으로 두 사람 모두 <수상한 이웃>에서 열연을 펼친 연기자들이다.
남녀 조연상 시상이 끝나자 남녀 주연상에 관한 시상이 이어졌다. 보통은 감독상을 먼저 시상하고 남녀 주연상으로 가는 순서인데 올해는 그 순서가 바뀌었다.
남녀 주연상의 시상은 국민배우 조준길이다. 남녀 주연배우 상은 남녀 조연상처럼 한 작품에서 나왔다. 바로 <지렁이>의 남녀 주연 배우인 이동훈과 남지현이 수상했다.
두 사람 모두 생애 처음 받는 큰 상에 눈물을 글썽이며 수상 소감을 말했다. 특히 두 사람 모두에게 의미가 있었던 건 상업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에 출연해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
남녀 주연상 시상이 끝나자 사회자 이성준이 발언했다.
“제30회 부성 국제 영화제. 이제 두 개의 상만이 남았습니다.”
이성준의 멘트에 이어 공동 진행자인 정이지가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바로 감독상과 작품상입니다. 먼저 감독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시상에 여러분이 깜짝 놀랄 분이 하십니다.”
이성준과 정이지가 동시에 발언했다.
“이영진 심사위원장님입니다!”
이성준과 정이지가 이영진의 이름을 부르자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이영진이 무대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연호와 박수 소리도 딱 멈췄다. 마치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영감님. 대단하군요. 아무도 지시하지 않았는데 이영진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영진은 그럴 만한 대우를 받기에 충분하지. 현재 영화계의 킹이니까 말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이영진이 마이크 앞에 섰다. 순간 폐막식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시민의 전당홀은 조용함을 넘어 정적이 흘렀다.
이영진이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적당한 소음이 건강에 좋다고 하죠. 이렇게 너무 조용한 건 저도 싫은데요.”
이영진의 농담에 객석은 순간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이영진은 객석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발언을 이어갔다.
“그럼. 후보 작품 보시죠.”
이영진이 발언을 마치자 감독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 영상으로 만든 자료화면과 함께 소개되었다. 후보작 중에 눈에 띄는 작품은 두 개의 작품이었다.
바로 <내 복권 내놔!>와 <지렁이>였다. 후보작 소개가 끝나자 이영진의 발언이 이어졌다.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는 30주년에 걸맞게 좋은 작품들이 아주 풍성하게 많았습니다. 같은 영화인으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올해는 훌륭한 작품이 많은 만큼 이 작품을 연출한 훌륭한 감독 또한 많았습니다. 그만큼 올해 감독상은 너무나도 치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저와 같이 심사를 진행했던 심사위원들도 잘 알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작품을 연출했던 모든 감독에게 이 상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영진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꺼냈다.
“제30주년 부성 국제 영화제 감독상! 수상자는 바로 <내 복권 내놔!>의 서태화 감독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영화제 최고의 파란이자 이변이었다. 감독상으로 태화의 이름이 호명되자 사람들은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환호와 박수가 연이어 터졌다.
태화는 순간 놀라서 귀를 의심했다. 태화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태화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한재영에게 물었다.
“이거. 사실이야?”
한재영이 그런 태화를 향해 기쁨에 겨워 외쳤다.
“그래. 인마! 이거 꿈 아니고 현실이야! 태화 네가 감독상을 받았다고!”
“정말인 거지? 그렇지?”
“그래.”
태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화는 무대를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태화가 무대에 올라가자 이영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감님. 저 좋아해도 되죠?]
태화가 박도봉 감독에게 이런 말을 한 건 이영진이 시상자였기 때문이었다.
[상을 받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이영진 시상자라고 하더라도 자네는 좋아할 자격이 있네. 자네는 감독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니까.]
[알겠습니다. 영감님.]
태화는 이영진 앞에 섰다. 이영진이 태화에게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네며 말했다.
“서태화 감독. 축하해요.”
“네. 고맙습니다.”
이영진은 태화에게 상을 수여하고 나서 무대를 내려갔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태화에게 쏠렸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다들 충격을 받으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태화의 발언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아. 제가 감독상이라니. 아직도 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고생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름을 부르지는 않겠습니다. 나중에 호명하지 않은 사람은 서운함을 느낄 수 있거든요.”
어쨌든 태화는 이번이 세 번째 수상이다. 그래서인지 태화의 얼굴엔 처음 상 탈 때와 달리 여유가 있었다. 태화의 여유로운 태도는 객석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객석에 사람들도 편안하게 태화의 수상을 지켜보았다.
“불확실한 결과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내 복권 내놔!>에 참여를 결정해 주었던 스태프와 배우분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첫 번째 사람들이니까요.”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트로피를 든 팔을 번쩍 들었다. 이 순간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의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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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상이 남았다. 바로 작품상이다. 작품상의 시상을 위해서 부성 국제 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지성학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지성학이 무대로 올라오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부성 국제 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하는 데 지성학의 역할이 꽤 컸기 때문이다. 지성학은 10년간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부성 국제 영화제를 많이 변화시켰다.
“안녕하세요. 부성 국제 영화제 집행위원장 지성학입니다. 올해 작품상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집행위원장인 제 마음도 아주 흐뭇했습니다.”
지성학의 간단한 인사말 이후 바로 작품상 후보작이 공개되었다. 작품상 후보에서 주목받은 작품은 <내 복권 내놔!>와 <지렁이>였다. 태화가 감독상을 받으면서 작품상에 관한 관심도가 더 올라갔다.
<내 복권 내놔!>의 4관왕이냐 아니면 <지렁이>의 3관왕이냐.
지성학이 자기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제30회 부성 국제 영화제 작품상! 그 영광의 작품은 바로 <지렁이>입니다.”
1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