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94화 (169/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4화

한지우의 농담에 객석은 다시 한번 빵하고 터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한지우가 먼저 지휘자가 하듯 손동작했다. 그러자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한지우의 지휘에 따라 박수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한지우는 어느 정도 박수 소리가 커지자 손동작을 멈췄다. 그러자 객석에서 손뼉을 치던 사람들도 한지우의 지휘에 따라 멈췄다. 항상 그렇지만 몇 명의 사람은 그 타이밍을 못 맞췄지만….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도 있게 마련이다. 군대에서도 마지막 구령은 안 붙이라고 해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사전에 아무 계획 없이 이런 장면을 연출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한재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태화에게 말했다.

“역시. 한지우 배우야.”

“왜?”

“한지우 배우는 현장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 유명하거든. 성격도 활달하고.”

“여기서 본인의 특기가 여지없이 발휘된 거구나.”

“맞아.”

한지우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고 나서 다시 한번 객석을 향해서 인사했다.

“오늘 제가 지휘자로서의 재능을 발견한 날이네요.”

한지우의 말에 객석에서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방금 저의 재능을 발견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관객상을 수상하실 분입니다. 참고로 관객상은 후보작이 없습니다. 바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관객상에 후보 작품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심사위원이 끼어들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관객들이 뽑는 유일한 작품이 바로 관객상이다.

“제30회 부성 국제 영화제 관객상은…….”

한지우는 봉투를 열어 수상작을 확인했다. 한지우는 수상작을 확인하고 나서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태화 감독의 <내 복권 내놔!>입니다!”

수상작이 발표되자 객석에선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화는 수상작이 호명되자 얼떨떨했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발언했다.

“이거. 진짜야?”

태화가 방금 한 발언은 누구를 대상으로 발언한 게 아니었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발언이었다. 태화의 옆에 앉아 있었던 한재영이 태화에게 대답했다.

“그래. 이거 진짜야!”

“하하하.”

태화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순간 태화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심장이 빨리 뛰었고 그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태화가 무대에 도착하자 시상자인 한지우가 태화에게 꽃다발과 함께 트로피를 건네며 말했다.

“감독님. 축하드려요.”

“네. 고맙습니다.”

한지우는 시상을 끝내고 퇴장했다. 그리고 태화는 이제야 깨달았다. 무대 중앙에는 태화 자신만이 있음을…….

이 순간 태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대 아래엔 태화 자신을 찍기 위해 수많은 카메라가 세팅이 되어 있었다. 순간 태화는 온몸이 긴장감 때문에 떨렸다.

자신의 고질적인 카메라 울렁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보통 수상자들은 트로피를 받고 자연스럽게 소감을 말한다. 하지만 태화는 그런 행동을 못 하고 있었다. 폐막식 사회자인 이성준은 이상함을 느꼈다. 벌써 수상 소감이 나와야 했지만, 아직도 태화는 침묵하고 있었다. 이성준이 태화에게 말했다.

“서태화 감독님. 간단한 수상 소감. 말씀하시죠.”

“아. 네…….”

태화는 며칠 전부터 박도봉 감독과 수상에 대비해서 미리 연습했었다. 물론 이걸 시원하게 김칫국 먼저 마신 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비해 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태화 군. 며칠간 연습했던 대로 하면 되네.]

[아……. 영감님! 그게…….]

태화는 잠시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아무리 연습했다고 해도 연습과 실전은 엄연히 달랐다. 특히 오늘 폐막식의 분위기는 태화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특히 태화를 압박한 건 카메라의 숫자였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이 폐막식 현장에 배치가 되어 있었다. 그 말은 태화의 눈에 수십 개의 빨간색 불빛이 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박도봉 감독도 이 사실을 알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태화 군. 정신을 차리게나!]

[영…… 감…님.]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붙였지만, 태화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목소리가 마치 페이드 아웃 되듯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지금 태화 군의 멘탈이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더 나빠지면 안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태화 군이 내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방법은 하나다.’

박도봉 감독은 있는 힘껏 태화의 이름을 외쳤다.

[서! 태! 화!]

박도봉 감독이 어찌나 세게 소리를 질렀는지 태화는 머릿속이 울리는 듯했다.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박도봉 감독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태화 군! 내가 어제 했던 말 기억하나!]

[네?]

[자네는 폐막식의 분위기에 휩쓸리게 될 걸세. 어쨌든 자네는 하나만 기억하게. 자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정하라고 했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었죠.]

[그렇네. 감추려 하지 말고 인정하게.]

[감추지 말고 인정한다?]

[그렇네. 인간의 성장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네. 사람들 앞에서 자네의 약한 부분을 고백하게나.]

태화의 불안한 모습에 한재영과 다른 스태프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들 중 한재영의 표정이 특히 어두웠다. 태화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태화야. 힘내라.’

#.

한편 태화의 짧지 않은 침묵은 연출자인 박은호에겐 최악이었다. 순간 박은호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박은호가 사회자인 이성준에게 지시사항을 말했다.

“이성준 님. 수상자에게 대화를 시도해 보세요. 그리고 마무리 지으세요.”

이성준은 박은호의 지시사항을 듣고 바로 행동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성준이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저기…….”

태화가 침묵을 깨고 발언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사실은…….”

태화는 다음 말을 이어가기 전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울렁증이 있습니다.”

태화의 발언에 객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태화의 뜻밖의 고백 때문이었다.

“바로……. 카메라 울렁증입니다.”

태화는 짧은 고백을 하고 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듯했다.

“시상식 때 멋진 모습 보이고 싶었는데 저한테는 쉽지 않네요. 휴우.”

태화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태화의 이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강한 임팩트를 주었다. 자신의 약점을 고백하면서 미소를 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화가 미소를 지은 건 태화의 그릇이기도 했다. 애초에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자기 고백하면서 밝게 웃으라고 하려고 했었다. 그게 이곳 폐막식의 분위기와 맞기 때문이다.

이건 사람들의 심리 때문이다. 힘든 고백을 하면서 밝게 웃는다는 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이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강요나 설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태화는 박도봉이 그렸던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짝. 짝. 짝.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태화로서는 객석의 반응에 순간 울컥했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게 시원하기는 하네요. 솔직히 전에는 이런 고백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저는 연기 지망생이었으니까요. 오디션 보러 가서 제가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하하.”

태화의 말이 끝나자 객석에선 전보다 더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출자 박은호는 현장의 이러한 모습을 보자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서태화 감독이라고 했나? 아직 신인에 불과한데……. 뭐랄까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있다. 저런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영화계에 새로운 스타가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은호는 다시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무대로 집중했다. 태화가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이 관객상은 저에게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관객분들이 주는 상이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이 상이 저에겐 아주 좋은 약이 될 것 같습니다.”

태화는 수상 소감을 말하고 나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와 동시에 객석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박수 소리만 난 게 아니었다. 휘파람 소리까지 곁들여져 나왔다.

#.

관객상에 이어 특별상 수여가 있었다. 올해 특별상은 정말 특별했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올해 특별상은 바로 부성 시민이었다. 지난 30년간 한결같이 부성 국제 영화제를 묵묵히 지지해 주고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하는 데 그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은 부성 시민 대표로 현 부성 시장이 수상했다.

사회자 이성준이 다음 순서를 말했다.

“이제 각본상입니다. 먼저 후보작들을 보시겠습니다.”

후보작들은 모두 5편이었다. 이중 주목할 만한 작품은 <내 복권 내놔!>와 <지렁이>다. 시상자로 배우 김우민이 무대로 올라왔다. 김우민은 꾸준히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인지도를 쌓아온 젊은 배우다.

“훌륭한 설계 없이 훌륭한 건축물이 나올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훌륭한 영화에는 훌륭한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시상식 현장에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흘렀다.

“제30회 부성 국제 영화제 각본상! <내 복권 내놔!>의 서태화! 축하드립니다.”

김우민이 태화를 호명하자 객석에선 함성이 터져 나왔다.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무대로 나왔다.

시상자인 김우민이 태화에게 꽃다발과 트로피를 건네주었다.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은 태화가 마이크 앞에 섰다. 태화는 관객상을 받을 때 호되게 신고식을 치러서인지 처음보다는 긴장감이 덜했다.

“관객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상을 받으니 영광입니다. 그래도 상도 두 번째 받으니 조금은 덜 떨리는 거 같습니다.”

태화의 농담에 사람들은 순간 빵 터졌다.

“저는 무엇보다 저에게 영감을 준 길바닥에 버려진 복권에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태화의 발언에 순간 객석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생각이 막혔을 때 막힌 곳을 뚫어버린 게 바로 길바닥에 버려진 복권이었거든요.”

사람들은 태화의 말에 큰소리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는 게 어떤 것인지 여기 있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전에 박도봉 감독이 말했듯 영감을 주는 존재는 대단한 게 아니다. 그냥 우연히 발견한 아주 사소한 것도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바로 태화가 버려진 복권을 보고 영감을 얻었듯 말이다.

태화의 수상 소감이 이어졌다.

“저는 그 복권이 복덩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쨌든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게 나한테 영감을 준 존재니까요. 그런데 정말로 저에게 복을 주는군요. 복덩아 고마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