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3화
레드카펫 주변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은 조금씩 태화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부르기 시작했다.
“서태화 감독님!”
“서태화! 멋지다!”
“여기 좀 봐줘요!”
태화는 사람들의 반응에 꽤 놀랐다.
[태화 군. 제법 자네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 정도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이란 항상 예상한 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라네.]
[그렇군요.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이군요.]
태화가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태화 혼자만이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재영은 사람들의 반응에 표정이 상기되었다.
‘와. 도대체 이게 뭐지?’
한재영이 태화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태화야. 이거 예상 밖인데?”
“그러게, 말이다. 기껏해야 몇 명 용기 있는 관객분들이 나를 아는 척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 나도 태화 너하고 생각이 똑같았어. 그런 분들이 있다면 정말 고마운 거고…….”
“그러니까. 재영아.”
“왜?”
“이유나 그런 건 그만 따지고 일단 즐기자. 난 그러고 싶다.”
태화의 말에 한재영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즐기자.”
태화보다 먼저 차에서 내렸던 이한철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몸을 돌려 태화를 바라보았다. 순간 태화와 이한철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한철은 태화를 보며 잠시 묘한 생각에 빠졌다.
‘태화 녀석. 뭔가…….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야.’
이한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돌이켜 보면 이한철이 태화를 위해 먼저 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즉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한철은 태화에게 자신이 먼저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을 받겠다고 제안했다. 평소의 이한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한철은 태화를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태화도 이한철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태화가 이한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한철이 형. 고마워요.”
“고맙기는. 민망한 게 오래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맞아요. 정말 사람들의 호응이 너무 썰렁했으면 형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할 뻔했어요.”
관객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강하자 현장에 있던 기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갑자기 현장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부성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 행사는 기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우나 감독에게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수많은 기자 중 한 명이 태화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서태화 감독님!”
“네.”
“필름 포커스 소정훈입니다.”
“네. 질문하십시오.”
“이번에 몇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기자님. 잘 알고 계시는군요.”
보통 영화제 폐막식처럼 큰 행사에선 여러 가지 정보들이 새어 나오게 마련이다. 이런 정보들은 영화제 측에서 필요에 따라 일부러 흘리기도 한다. 소정훈은 이 새어 나온 정보와 몇 명의 취재원에게서 정보를 취득했다.
“감독님. 이번에 수상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제가 어떻게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서요.”
“너무 겸손한 발언 아닙니까? 영화제 기간 가장 핫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이 서 감독님이었는데요?”
“제가 상을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태화의 대답에 소정훈은 살짝 놀랐다. 왜냐하면 보통 이런 질문을 하면 ‘후보로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아니면 ‘제가 상을 받을 자격이 되나요?’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이에 비해 태화가 했던 대답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소정훈이 피식 웃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감독님의 방금 발언은 꼭 자신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 같은데요?”
소정훈은 태화의 발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태화로선 이 순간 아차 싶었다. 태화는 자기가 한 발언이 듣기에 따라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박도봉 감독도 태화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태화 군. 현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네.]
[그게 뭡니까?]
[이럴 때 그냥 치고 빠지는 걸세.]
[치고 빠진다고요?]
[그렇네. 상대의 질문에 그대로 답할 필요 없네.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수렁으로 빠질 수 있네. 전에 함정질문을 벗어났던 거 생각나는가?]
[기억합니다. 영감님 말은 논점을 벗어나라는 말이군요.]
[그렇네. 굳이 소정훈 기자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있을 필요가 없네. 자네는 그 프레임을 벗어나야 하네.]
소정훈이 태화를 보며 다시 발언했다.
“서 감독님.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저는 단지 행운이 저와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네? 행운이요?”
“네. 행운을 기대하는 건 저의 간절함입니다.”
소정훈은 태화의 대답에 당황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태화가 너무나도 쉽게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정훈은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정훈은 애초에 태화에 관해서 부정적인 감정이 없었다. 소정훈은 오히려 태화에 관해서 긍정적인 감정이 있었다. 여기에 능숙하게 인터뷰하니 소정훈으로선 그냥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 감독님. 행운이 함께하기를 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자님.”
태화는 소정훈의 질문을 적절히 넘기고 다시 레드카펫을 걷기 시작했다. 레드카펫에 있는 사람들은 태화를 향해 소리쳤다.
“감독님! 멋져요!”
“감독님! 영화 재밌게 봤어요!”
많은 사람 중 한 젊은 여성이 태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가드레일 바로 앞에 서 있던 여성이었다.
“와아! 감독님! 악수 좀 해주세요!”
태화는 그 여성을 보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 손도 부드럽네요.”
“고맙습니다.”
태화가 그 여성과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자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 중 일부가 태화를 보기 위해서 몰려들어 손을 뻗었다.
태화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한 사람씩 정성스럽게 스킨십을 했다. 태화를 뒤에서 보던 한재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김현석에게 말했다.
“현석아. 태화 말이야. 제대로 즐기는 것 같지?”
“네. 형. 오늘 태화 형은 정말 스타 같아요.”
#.
태화는 레드카펫 행사를 마치고 폐막식이 진행되는 시민의 전당홀에 들어왔다. 태화가 도착하자마자 이한철이 태화의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쳤다. 태화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한철이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아까 보니까 제대로 즐기던데?”
“그렇게 보였어요?”
“응.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즐겨도 되지. 안 그래?”
“그렇죠. 형. 들어가요.”
태화와 일행은 행사가 진행되는 입구를 통과하자 개막식 때처럼 진행 요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진행 요원이 안내한 자리는 개막식 때와는 달랐다. 개막식 때는 그냥 적당한 자리를 준 느낌이 강했지만, 오늘 폐막식에선 무대를 중심으로 가운데보다 약간 앞쪽에 자리를 배치받았다. 이 자리는 오늘 후보에 오른 작품의 스태프나 배우가 앉는 자리였다.
태화와 일행이 자리에 앉고 나서도 식장 밖에선 얼마 동안 레드카펫 행사가 이어졌다.
얼마 후.
레드카펫 행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폐막식이 시작되었다. 폐막식 공동 사회를 맡은 이성준과 정이지가 무대로 입장했다.
두 사람은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나서 발언했다. 먼저 발언을 시작한 건 이성준이다.
“올해 30주년을 맞이한 부성 국제 영화제 아쉬운 폐막식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성준에 이어 정이지가 발언했다.
“최초 세계 100여 개국에서 수많은 작품이 영화제 사무국으로 접수했고 이중 엄격한 심사를 거쳐 본 영화제에 출품되었습니다. 이는 역대 최고의 성과입니다. 앞으로도 부성 국제 영화제는 세계적인 영화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성준과 정이지가 함께 발언했다.
“그럼. 제30회 부성 국제 영화제 폐막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성준과 정이지의 선언으로 부성 국제 영화제 폐막식이 시작되었다.
폐막식 시작 선언에 이어 집행위원장 지성학이 무대로 올라와 발언했다.
“처음 이곳에서 영화제가 열렸을 때 시민들의 압도적인 성원을 받으며 시작했습니다. 이제 30년을 맞은 부성 국제 영화제는 다시 시민과 함께 뻗어가려고 합니다. 시민 여러분.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격려해 주십시오. 더욱더 내실 있는 영화제로 거듭나겠습니다.”
지성학의 멘트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하지만 지성학은 마지막에 유머스러운 멘트를 곁들였다.
“여러분들이 지루해할까 봐 멘트는 짧게 준비했습니다.”
지성학의 유머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큰소리로 웃으며 손뼉을 쳤다. 집행위원장 지성학이 퇴장하고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영화제나 혹은 영화 시상식에서 메인은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그리고 남녀 주연 배우상이다. 이 상들은 하이라이트라 시상식 마지막 부분에 가서 수상 대상자를 발표한다.
시상식의 앞부분은 영화의 기술적인 부문을 수상한다. 촬영, 특수효과, 음악, 편집 등이다.
이한철도 <내 복권 내놔!>로 촬영상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수상하지는 못했다. 촬영상으로 다른 작품이 호명되는 순간 이한철은 아쉬움을 표했다.
“야. 내가 롱테이크 찍느라고 그 고생을 했는데…….”
이한철의 발언은 아쉬움도 있지만 약간의 장난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한철의 발언에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
시상식은 이제 중반을 넘어 종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중반에서 종반으로 넘어가는 그 단계에 하나의 상이 있다. 그건 바로 관객상이다.
사회자인 이성준이 관객상에 관해서 소개했다.
“관객상은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의 자랑입니다. 이 상의 특별함은 다른 누구도 아닌 관객들이 뽑는 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상을 해주실 분을 모시겠습니다. 영화 배우 한지우 님입니다.”
한지우는 주연급 여배우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주가가 올라가는 중이다. 한지우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한지우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르자 객석에선 커다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지우가 마이크 앞에 섰다. 그래도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자 한지우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팔로 그만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한지우의 이러한 행동은 사전에 계획된 연출이 아니었다. 그냥 한지우가 즉석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한지우의 행동에 사람들은 사전에 맞춰본 것도 아닌데 환호와 박수를 멈췄다.
“오늘 제가 부성 국제 영화제 폐막식장에서 지휘자로 데뷔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