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92화 (16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2화

노성준은 태화의 의도가 궁금했다. 보통 영화제에선 한껏 뽐내는 게 일반적이다.

여기엔 유명한 정도가 기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생을 통틀어서 부성 국제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게 중요하다.

“서 감독님. 의도가 뭡니까? 혹시 솔직함입니까?”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노성준 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성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다는 건 쉽게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서 감독님은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 기회를 대체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전 그걸 솔직함으로 봤습니다.”

“네. 솔직하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건 없잖아요.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그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도 없잖아요.”

노성준은 태화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태화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노성준은 이 순간 자신이 취하고 있는 행동에 관해서 살짝 놀랐다.

‘지금까지 서태화 감독처럼 말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가식적으로 보였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태화 감독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난 서태화 감독의 말에 수긍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노성준은 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성준의 눈빛은 그냥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태화 군. 노성준의 눈빛이 꽤 공격적이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했던 말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닐세.]

[그게 아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마도 노성준은 자네가 했던 발언을 신뢰했을 가능성이 있네.]

박도봉 감독은 태화와 달리 노성준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건 박도봉 감독의 연륜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런 눈빛을 하는 거죠? 저의 발언을 신뢰하는데 말이죠.]

[아마도 이유를 찾는 것 같네.]

[이유요?]

[그렇네. 아미도 노성준은 자네와 비슷한 발언을 했던 사람들을 많이 봐왔을 것이네. 그리고 그것이 가식적이었다는 것도 경험했을 테고. 하지만 노성준은 자네의 발언을 그들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 거네. 즉 신뢰감을 느끼게 된 것이지.]

[그런데 영감님. 상황이 좀 아이러니하군요. 내가 한 말을 믿는데 거기서 의심을 한다는 게…….]

[그만큼 노성준은 가식적인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네.]

[결국 가식적인 사람을 보다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니 헷갈린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네.]

[솔직히 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

[네. 노성준이 나를 믿든 말든. 전 제가 선택한 대로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바로 그거네. 이 상황에서 괜히 머리 굴릴 필요 없네.]

태화가 노성준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노성준 님. 전 마음에 내키지 않는 건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냥 전 저의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감독님의 모습이라…….”

“네. 그냥 촌스러우면 촌스러운 대로 하겠습니다.”

노성준은 더는 경계의 시선을 태화에게 던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감독님 원하는 대로 하세요.”

#.

주차장엔 행사 진행 요원이 바쁘게 움직이며 차량을 통제했다. 소위 말하는 레드카펫 쇼를 위해서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배우나 감독은 이제 막 레드카펫이 있는 곳에 도착한 듯 연출을 한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내린다.

연기자와 감독은 레드카펫을 밟고서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로 이동한다.

차량이 도착하고 레드카펫을 밟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이 일련의 과정은 그냥 오는 순서대로 하는 게 아니다. 다 연출자가 사전에 배우, 감독들과 조율해서 하는 것이다.

보통 초반에 레드카펫을 밟는 사람들은 요즘 새롭게 주목받는 배우나 감독 혹은 연예인을 배치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무게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배치되는 게 일반적이다.

태화의 등장 순서도 일반적인 배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화는 비교적 앞쪽에 배치가 되었다.

[태화 군. 실망스러운가?]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레드카펫을 밟는 순서 말일세. 좀 더 후반부에 배치되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안 해봤나?]

[뭐.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전 지금도 만족합니다. 당연히 정신 승리도 아니고요.]

[음. 그런 이유는 뭔가?]

[제가 영화제에서 좋은 흐름을 탔다고 하지만 아직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뒤에 출연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전 사람들에게 낯선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차라리 그럴 바에야 빨리 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 자네의 분석이 합리적일세. 지금 중요한 건 헛된 기대보다는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것이겠지.]

[네. 영감님.]

가장 먼저 레드카펫에 등장한 사람은 오늘 폐막식을 진행할 사회자였다. 오늘 사회자는 남녀 커플로 진행된다.

보통 영화제 사회자는 실제 식이 시작되면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 폐막식을 진행할 사회자가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남자 진행자는 요즘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이성준이 맡았고 여자 진행자는 과거 여성 아이돌 그룹에서 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한 정이지다.

두 사람은 하얀색 고급 밴을 같이 타고서 등장했다. 두 사람의 등장에 레드카펫에 몰려든 관객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우와. 이성준이다!”

“와! 정이지야! 정이지!”

이성준과 정이지는 자신들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다가가 직접 하이 파이브를 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에 관객들은 더 열렬히 환호했다.

이성준과 정이지의 등장으로 레드카펫 행사는 초반부터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그리고 연출자인 박은호가 결정한 순서에 따라 레드카펫에 배우와 감독, 그리고 스태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려는 시점이었다. 지금까지 레드카펫에 등장했던 차량과 다른 분위기의 차량 2대가 도착했다.

지금까지 레드카펫 행사에 도착한 차량은 고급 차량이었다. 하지만 방금 도착한 2대의 차량은 깔끔하기는 했지만, 고급 차량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두 대의 차량 등장에 레드카펫 주변은 순간 술렁거렸다.

“뭐지?”

“저거 길 잘못 들어온 거 아냐?”

이 두 대의 차량에는 바로 태화의 일행이 타고 있었다.

먼저 이한철의 차량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내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한철과 정민석, 그리고 이우섭이 차에서 내릴 예정이다.

현재 차량의 운전은 폐막식 연출을 맡은 곳에서 지원해 준 상태다. 이한철의 차뿐 아니라 태화가 타고 있는 차량에도 잠시 운전을 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한철이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하며 발언했다.

“아마 나가면 되게 썰렁할 거야.”

정민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렇겠죠. 도대체 어디서 온 인간들인지 당황스러워하겠죠.”

“그래. 한번 나가서 먹여주자고.”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사이 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이한철과 정민석 이우섭이 그들이다.

이한철과 정민석, 그리고 이우섭이 먼저 등장한 건 나름대로 의논해서 결정한 내용이었다.

이한철이 태화에게 먼저 제안했다.

“레드카펫에서 나하고 민석이, 그리고 우섭이가 먼저 차에서 내린다.”

“네? 제가 먼저 내리는 게 아니고요?”

태화의 발언에 이한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래도 우리 중에 인지도가 있는 네가 나중에 등장하는 게 나아.”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철이 형. 별 차이 없을 거 같은데요?”

태화의 말에 이한철이 고개를 저었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그리는 그림은 대충 이렇다.”

“형이 그리는 그림?”

“그래. 아마도 사람들은 나하고 민석이, 그리고 우섭이를 보면 누구인가 할 거야.”

태화는 이한철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하지만 그만큼 썰렁해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썰렁해지는 만큼 사람들은 궁금해할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그래. 그럼 너는 적당한 시기에 차에서 내리면 되는 거야.”

태화는 이한철이 말한 게 말도 되지 않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영감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이한철의 생각이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아닐세.]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아닌 건 맞는데…….]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왜 한철이 형이 저렇게까지 하려고 하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태화 군. 나 같으면 이한철의 선의를 받아들이겠네.]

[네? 선의를 받아들인다라…….]

[그렇네. 이한철은 자네에게 선의를 보내고 있네. 그 선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닐세.]

[하지만 한철이 형이 왜 저런 선의를 저에게 보일까요? 어떻게 보면 체면이 깎이는 일인데요.]

태화의 말처럼 이한철은 체면이 깎이는 일을 애써 자처하고 있었다.

[태화 군.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이한철이 하자는 대로 하게.]

박도봉 감독은 이한철이 이런 제안을 한 의도를 알아채고 있었다.

이한철은 태화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리더로서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한철은 리더를 위해서 때로는 구성원이 뭔가를 해야 함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네가 이한철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예의가 아닐세.]

[알겠습니다.]

#.

사람들이 ‘이건 뭔가’라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또 다른 차량에서 한재영과 김현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태화가 내렸다. 태화가 내리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이게 뭔가 싶은 흐름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태화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저기. <내 복권 내놔!>의 감독 서태화다. 서태화 감독이야!”

만약 지금처럼 차분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태화를 알아보고 방금처럼 소리친 게 제대로 안 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태화를 알아보고 지른 소리는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꽤 컸다. 관객들 사이사이에서 태화를 알아보고 사람들마다 멘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 정말?”

“정말이다. 서태화 감독이야!”

“그럼. 저기 저 사람들은 작품 스태프인 거야?”

사람들이 태화를 알아보기 시작하자 슬슬 분위기도 냉담한 분위기에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맞아. 그리고 저기 처음에 나왔던 사람 말이야. 촬영감독인가 그랬어! GV 행사 때 직접 봤다고!”

“나는 차가 너무 평범해서 몰라봤어.”

“그런데 나는 왠지 멋있는 거 같아. 그냥 자기의 모습 그대로 온 거잖아.”

태화와 일행들은 처음의 냉담한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들을 환호해 주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았다. 정말 짧은 시간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