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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91화 (166/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1화

이한철은 태화의 심경을 이해했다.

“태화 너로선 이영진 감독이 너를 찾아왔다는 걸 말하기 어려웠겠지.”

“…….”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괜히 사람들에게 기대감만 심어주고 나중에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땐……. 다들 멘탈이 무너질 테니까. 하지만 나하고 가장 친한 사람에겐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을 건 당연하다. 너하고 재영이는 학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니까…….”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마워요.”

“어쨌든 윤주한테 이야기는 해뒀다.”

“윤주 누나한테요?”

“그래. 윤주가 의상팀하고도 잘 알고 지내거든.”

“그런데 협찬받을 가능성은 있는 건가요?”

“아마도. 의상팀 중에 협찬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거야. 윤주도 이곳 분위기를 잘 알더라고. 네가 요즘 뜨겁다는걸.”

“하하. 뜨겁기는요.”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겸손해할 필요 없다. 그리고 그게 나 때문이라면 더욱더 그럴 필요 없어.”

“한철이 형.”

이한철은 태화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태화는 자기 혼자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한철은 태화의 이 심경을 이해하고 있었다.

“태화 넌 네가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처음 작품을 연출하는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

“네가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건 네 재능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나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한철이 형. 고마워요.”

“나도 너한테 고맙다. 너하고 작업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으니까.”

“여러 생각이요?”

“그래. 서태화란 사람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할까?”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좀 처음부터 과감했죠?”

“맞아. 난 네가 나한테 촬영감독을 제안할 거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많이 놀랐습니까?”

이한철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네? 놀라지 않았어요?”

“놀라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이요?”

“그래. 당시 너는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있어 보였지. 그리고 감독으로서 너는 어떤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게 당시 내 호기심이었다.”

“…….”

“그리고 넌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건 호기심을 넘어선 놀라움이었다. 그래서 즐거웠다. 너랑 함께 작업했던 날들이…….”

태화는 이한철이 한 말 중에 즐거웠다는 말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찌 보면 태화의 반응과 즐거웠다는 말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지만 이 순간 함께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때로 울기도 하니까…….

#.

태화는 방에서 턱시도를 차려입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화의 모습은 웬만한 배우는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인물이 좋고 훤칠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멋있구먼. 하지만 말이야.]

[네?]

[너무 나르시시즘에 빠져서는 곤란하네. 너무 멋있어도 말일세.]

[제가 이렇게 턱시도를 입어보는 날도 오는군요. 영감님 고맙습니다.]

태화가 박도봉 감독에게 고맙다고 말을 건넨 건 어쩌면 당연했다. 박도봉 감독이 없었다면 태화가 지금처럼 턱시도를 입을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날 처음 대하고 거부했던 게 기억이 나는구먼.]

[그건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자네가 기절할 거로 생각했었거든.]

[기절이요?]

[그렇네. 처음엔 나도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자네에게 처음에 어떻게 말을 붙일지 고민했었다네.]

[정말입니까? 저는 그냥 막무가내로 저에게 말을 붙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네. 자네에게 처음 말을 붙인 거. 나름대로 고민해서 한 거네.]

[크크. 그게 제가 일을 볼 때였습니까?]

[그래도 자네에게 말을 붙이기가 편했지.]

[영감님은 편했을지 몰라도 저는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흠흠. 그때 자세도 그랬고요.]

[어쨌든 자네가 처음엔 잠깐 놀랐지만 기절하지 않았지. 난 그게 참 신기했었네.]

[저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저도 제가 어떻게 기절을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충분히 기절하고도 남았을 사건이었는데 말이죠.]

[자네와 지내면서 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네.]

[그 이유가 뭡니까?]

[자네는 자네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릇이 큰 사람이네.]

[네? 그게 무슨…….]

[한동안 자네는 계속된 실패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네. 연속된 실패가 주는 그 압박감 때문에 말일세. 그래서 본래 자신의 그릇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걸세. 하지만 자네가 나와 함께 하면서 비로소 자넨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네. 그 결과 지금에 이르게 된 거지.]

[영감님의 분석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놀라게 될 때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자네의 그런 모습이 난데없이 발현된 게 아니네.]

[영감님의 방금 그 말은 그런 모습이 저한테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오랜 기간 실패의 경험이 자네의 본 모습을 덮어버렸다고 했었네.]

[영감님. 왜 그랬는지 알겠어요. 오랜 실패의 경험이 제 능력을 스스로 봉인하도록 만든 것이군요.]

[그렇네.]

[그 봉인이 제가 영감님을 만나면서 풀린 것이고요.]

[자네 말이 맞네. 내가 자네의 기연이 된 건 분명하네.]

[기연이라. 그게 맞는 말이네요.]

[어쨌든 중요한 건 잠재 능력이든 뭐든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는 점일세. 갑자기 없었던 능력이 발현되는 게 아닐세.]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군요.]

[그렇네. 이제 밖으로 나가세. 사람들이 자네를 많이 기다렸을 것이네.]

[네. 영감님.]

#.

태화가 숙소의 문을 열고 나가자 일제히 일행들이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의 일행들. 즉 한재영, 이우섭, 김현석 그리고 이한철, 정민석도 태화처럼 턱시도를 차려입었다. 이들이 턱시도를 차려입은 건 폐막식에 맞춰 의상을 갖춰 입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정민석이다.

정민석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했다.

“태화야. 정말 멋있다. 너무 근사한데?”

태화가 정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형도 되게 멋있어 보여요.”

“그래?”

“네. 형.”

“하여튼 요즘 태화 너 때문에 내가 호강한다. 내가 이렇게 턱시도를 입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

“뭐. 기회가 왔을 때 이것저것 해보는 거죠. 안 그래요?”

“그래. 태화야.”

태화는 정민석과 대화를 마치고 다른 스태프를 카메라로 패닝 하듯 바라보았다.

“이야. 오늘 나만 멋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멋있네.”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 이한철이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윤주가 고생을 좀 했지. 턱시도를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을 구해야 했으니까.”

“나중에 돌아가면 윤주 누나한테 맛있는 거 사드려야 할 것 같네요. 윤주 누나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안 그래도 윤주가 그 이야기하더라. 태화 너한테 맛있는 것 좀 얻어먹어야겠다고.”

“그랬어요?”

“응. 근데 윤주가 조건을 걸었어.”

“조건이요?”

“그래. 네가 꼭 상 타서 그 상금으로 사라고 하더라.”

태화는 이한철의 말을 듣고서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윤주 누나다.

송윤주는 일할 때 누구보다도 파이팅이 넘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불평하기보다는 상금 타서 한턱내라고 말한 것이다. 본인이 힘들었음에도…….

“저도 그러고 싶네요.”

#.

부성 영화제 폐막식 현장.

영화 팬들은 폐막식이 열리는 시민의 전당홀로 모였다. 시민의 전당홀 계단 앞은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 영화 팬들은 그 레드카펫을 따라 쭉 서 있었다.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는 특이하게 개막식과 폐막식을 같은 곳에서 진행한다. 이는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가 내건 모토와 관련이 있었다.

관객과 호흡하는 영화제.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은 이 모토에 걸맞게 올해는 시민의 전당홀에서 개막식과 폐막식을 열기로 했다, 시민의 전당홀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부성 국제 영화제 제1회가 바로 이 시민의 전당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후 시민의 전당홀에서 개막식과 폐막식을 같이 여는 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태화와 일행들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채 대기하고 있었다. 태화와 일행이 총 여섯 명이라 차량은 두 대로 이곳으로 이동했다.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김현석이 한재영의 차량에 탑승했고 이한철의 차량에 정민석과 이우섭이 탑승한 상태다.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 측은 태화에게 차량을 빌려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해왔다. 태화가 타고 있는 차량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에선 태화에게 제안할 사람으로 노성준을 보냈다.

“서태화 감독님이 기분이 나쁠지 모르지만 이런 행사는 보여지는 게 중요하잖아요.”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노성준 님이 어떤 의도로 이런 제안을 제게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아마도 노성준 님의 의견이 아니라 영화제 측의 의견이겠죠. 당연히 눈으로 보여지는 게 중요하죠.”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박도봉 감독은 이 순간 태화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태화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요.”

“네. 감독님. 말하세요.”

“좋은 그림. 멋진 그림. 다 좋은데요. 그러면 속이는 거잖아요.”

“네?”

“노성준 님. 혹시라도 저희가 타게 될 차량이 문제가 된다면 저는 레드카펫 행사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감독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저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감독님에게 이득이 된다?”

“네. 그리고 부성 영화제 측에도 당연히 이득이 됩니다.”

태화의 말을 들은 노성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 이해가 되지 않네요. 화려하게 등장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지만 제가 선택한 건 희소성입니다.”

“희소성이요?”

“네. 아마도 레드카펫 행사는 화려한 싸움이 일어나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죠. 어떻게 보면 자존심 싸움이기도 하니까요.”

“그 화려한 자존심 싸움에 제가 낄 자리는 없습니다.”

태화의 말을 들은 노성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아…….”

“제가 선택한 전략은 그 화려한 싸움에 끼어드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필하려고 하는 것은 화려함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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