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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90화 (165/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0화

이우섭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태화 형. 전 이번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더는 욕심 부리지 않을 겁니다.”

“뭐?”

“이미 형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이우섭의 말을 한재영을 받았다.

“우섭이 네 말이 맞아. 태화는 내가 예상했던 거에 몇 배는 더 이번 영화제에서 활약했어. 정말 믿을 수 없는 활약이었어.”

한재영의 말이 끝나자 지금껏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던 김현석이 입을 열었다.

“저도 형들이랑 의견이 같아요. 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처럼 작은 영화도 부성 국제 영화제 같은 곳에서 선전할 수 있다는걸. 제 두 눈으로 봤으니까요.”

김현석에 이어 맏형인 이한철이 발언했다.

“그래. 태화야. 현석이 말처럼 <내 복권 내놔!> 작품의 선전은 신선한 충격이었어. 일단 제작비를 떠나서 좋은 콘텐츠는 관객들에게 어필이 된다는 걸 확인한 계기였어.”

이한철의 발언이 끝나자 이번에는 태화가 말했다.

“다들 이렇게 말해주니 조금은 마음이 편하네요. 저도 여러분들과 생각이 같아요. 이번 일로 확실히 자신감도 얻었고요. 자. 제가 여러분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다 했습니다.”

“…….”

“이제는 남은 영화제 잘 즐기기를 바랍니다.”

태화의 발언에 사람들은 저마다 웃기 시작했다. 스태프들이 이럴 수 있는 건 그들이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스태프들은 자리를 떠나면서 서로를 격려했다.

모두가 자리를 뜬 가운데 한재영만이 방에 남았다.

“재영아. 나에게 무슨 할 말 있어?”

“태화야. 그런데 무슨 계획이 있는 거야?”

“계획?”

“그래. 굳이 계획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뭔가 있는 거 맞지?”

한재영은 뭔가 촉이 있었다. 그래서 태화가 사람들이 모인 상태에서 발언한 사실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재영은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 군. 어떻게 할 건가?]

[뭐가 말입니까?]

[감독이 리더인 이유는 다른 스태프보다 많은 정보를 갖기 때문이네. 그리고 그 정보를 누구한테 어떻게 줄지 결정하는 것도 바로 감독의 몫이네.]

[영감님이 말한 정무적 감각이 필요한 거군요.]

[그렇네. 자네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네. 하나는 한재영에게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네. 그냥 더는 할 말 없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재영에게만 정보를 주는 것이네. 이 둘의 차이는 생각보다 꽤 크네.]

[그렇겠군요. 재영이에게 어떤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만약 어떤 정보를 제공해 준다면…….]

[아마도 한재영은 자네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될 것이네.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자신에게 해주었기 때문이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동년배 사이에서도 친밀도는 다 다르다. 그래서 사이가 친밀할수록 서로 공유하는 비밀이 많다.

[영감님. 전 재영이에게 정보를 더 주는 걸 선택할 겁니다.]

[그럴 줄 알았네. 한재영은 자네에게 특별한 존재이니 말일세. 그렇게 하게나.]

어찌 보면 한재영은 태화 다음으로 <내 복권 내놔!>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재영이 없었다면 작품을 완성하는 게 어려웠을지도 몰랐다. 이러한 이유로 박도봉 감독은 한재영에겐 어느 정도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태화가 한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아. 너니까 믿고 이야기하는 거야.”

“뭔데?”

“어제 이영진 감독 만났다.”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이 깜짝 놀라며 발언했다.

“뭐? 진짜?”

“그래. 어제 관객들과의 만남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려는데 만났어.”

“이영진 감독이 너를 직접 찾아왔단 말이지. 그 대단한 이영진 감독이 말이야.”

“그래.”

태화의 대답을 듣고서 한재영은 자신이 생각했던 거 이상이라고 판단했다.

“태화, 네가 조금은 자신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영진 감독이 직접 너를 찾아왔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어. 와. 이영진 감독이 직접 널 찾아오다니.”

한재영은 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디. 그러자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정말 얼굴 닳겠다.”

한재영은 갑자기 태화를 끌어안았다.

“태화야. 정말 고맙다.”

“뭐가 고마워? 하지만 아직 무슨 결과가 나온 건 아니야.”

“아니. 그 대단한 이영진 감독이 널 찾아오게 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거야.”

태화는 답답함을 느꼈다. 한재영이 태화 자신을 너무 세게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재영아, 좀 답답하다.”

한재영이 태화를 껴안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아. 미안하다. 내가 좀 흥분했던 모양이다.”

“괜찮아. 하지만 재영아. 이 사실.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안 된다. 재영이 널 믿고 말하는 거야.”

한재영은 이렇게 말하는 태화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괜한 기대감만 올려놓았다가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그 후폭풍이 꽤 심할 거라는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잘 알고 있어. 내가 입을 다물도록 할게.”

한재영은 말을 마치고 나서 손으로 자기의 입을 지퍼로 채우는 듯한 행동을 했다. 태화가 한재영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고맙다.”

#.

어느새 부성 국제 영화제 폐막식을 하는 날이 되었다. 태화의 스태프들은 영화제 기간 알차게 보냈다. 스태프들과 별도로 태화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태화는 영화제 주최 측이 개최하는 각종 행사에 참여했다. 영화제 측이 개최한 행사는 다양했다. 세미나 같은 비교적 학술적인 행사뿐 아니라 본선 경쟁작에 출품한 감독들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는 행사도 개최했다. 특히 맥주 파티에서 화제의 중심은 태화였다.

같이 본선에 올라온 사람들도 <내 복권 내놔!>의 선전에 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작품 <지렁이>로 본선에 오른 이정필 감독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서태화 감독님이시죠?”

“아. 네. 이정필 감독님이시죠?”

태화가 이정필을 아는 척하자 이정필이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이거 영광입니다. 영화제 최고의 스타가 저를 알아보다니요.”

“영화제 최고의 스타라뇨? 과찬입니다. 감독님의 <지렁이> 잘 봤습니다. 작품 재밌던데요?”

“아. 그랬다니 다행입니다.”

이정필의 <지렁이>는 속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라는 속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사회적 소수인 주인공을 사람들이 괴롭히고 주인공이 분노해 싸운다는 내용이다.

뭔가 거창한 내용이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진지함보다는 코믹함을 가미해 이야기를 풀어냈고 그 때문에 관객들에게도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이정필 이외에 다른 감독들도 태화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감독들의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부러움과 질투가 적절히 버무려진 분위기.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표정엔 떨떠름함이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서 순간순간 묘한 분위기가 이뤄졌다.

이건 본선에 오른 작품의 감독들이 대부분 태화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부성 국제 영화제 폐막식이 다가왔다.

#.

태화는 숙소에서 슬슬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한재영이 들어왔다.

“태화야. 드디어 폐막식이다.”

“그래. 재영아. 수고했다.”

태화는 한재영 외에 다른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태화의 말에 이한철이 먼저 대답했다.

“수고는 무슨. 이번처럼 부성 국제 영화제에 와서 이렇게 즐겁게 보낸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이어서 정민석이 발언했다.

“한철이 형 말이 맞아. 태화야. 나도 여러 영화제를 다녀봤지만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가 최고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정민석에 이어 이우섭과 김현석도 한마디씩 했다. 이 두 사람의 말도 이한철, 정민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벅찬 감동 같은 게 있었다. 이건 바로 첫 번째 국제 영화제 방문이라는 것과 <내 복권 내놔!>가 예상 밖의 선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화의 시선이 이한철의 손으로 향했다. 이한철의 오른손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한철이 형. 그겁니까?”

“그래. 이거 구하느라고 윤주가 고생했다.”

이한철이 쇼핑백을 태화에게 건넸다. 태화가 이한철에게서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발언했다.

“윤주 누나한테 고생했다고 전해주세요.”

“그러마. 하지만 말만으로는 안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짜식. 준비하고 나와라. 우리도 준비하고 나오마.”

“네. 그럴게요.”

태화는 사람들이 나가자 이한철이 건넨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쇼핑백에는 꽤 큰 크기의 종이상자가 들어가 있었다.

[영감님. 제가 이 옷을 다 입어보게 되는군요.]

[왜? 좋은가?]

[내. 좋습니다. 좋고 말고요.]

태화는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태화는 쇼핑백에 담긴 물건을 보자마자 바로 탄성이 터졌다.

[와아. 멋지네요.]

[그렇군. 아주 멋지네.]

태화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소핑백에 담겨 있는 물건을 꺼냈다. 쇼핑백에 담긴 물건은 바로 턱시도였다.

태화는 개막식에선 턱시도를 입지 않았었다. 하지만 폐막식에선 턱시도를 입어야 했다.

어쩌면 폐막식에서 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시상식이나 영화제가 그렇듯 부성 국제 영화제도 어떤 작품이 상을 받을 후보에 오르게 되면 이를 해당 작품의 스태프들에게 미리 통보를 해준다. 그래야 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준비하기 때문이다.

태화도 몇 개 부문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영화제 사무국으로부터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태화가 영화제 사무국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의상을 준비했다면 늦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위 말하는 유명 연예인이나 감독은 협찬을 해주는 업체가 상시 대기를 한다. 왜냐하면 부성 국제 영화제 폐막식 정도 되면 광고 효과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화의 경우는 다르다. 정말 태화는 난데없이 등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게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발 빠르게 움직인 건 이한철이었다. 이한철이 태화에게 먼저 제안을 해왔다.

“태화야. 너 폐막식 때 옷 입어야지. 안 그래?”

“한철이 형. 혹시 턱시도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

이한철이 말을 하고 나서 잠시 뜸을 들였다. 태화는 이한철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한철은 항상 신중하게 뭔가를 발언할 때 이런 행동을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잠시 뜸을 들이기는 한다. 하지만 똑같이 뜸을 들인다고 해도 이한철은 그 분위기가 남다르다.

“태화야. 재영이에게서 이야기 들었다.”

“재영이가 말하던가요?”

“그래. 이영진 감독이 널 찾아왔었다며?”

“맞아요. 그런데 한철이 형. 그때 말하지 못한 거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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