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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88화 (163/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88화

태화가 대답을 미룬 건 신중한 판단을 위해서였다. 그러자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만난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을 것이네.]

[네. 저도 그런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투자사일까요?]

태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현재 태화에게 필요한 건 배급사다. <내 복권 내놔!>를 극장에 걸어줄 수 있는 배급사.

[투자사라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네.]

[네?]

[투자사가 배급을 같이 하기도 하니 말일세.]

[영감님 말처럼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고민할 필요 없네. 만난다고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태화가 민경희에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만나기로 하죠. 어디서 뵐까요?”

-감독님이 편한 곳에서 뵙기로 하죠.

“그럼. 제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뵙기로 하죠. 여기 호텔에 괜찮은 카페가 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태화가 전화를 끊자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태화 군. 내가 전에 자네에게 이런 말을 했었네.]

[어떤 말이요?]

[자네가 성장하면 자네한테 사람들이 접근해 올 거라고…….]

[네. 알고 있습니다. 영감님이 그 말을 할 때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의문?]

[네. 나에게 그런 순간이 오긴 할까?]

[왜 그런 생각을 했는가?]

[그때 영화감독의 길로 가기로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까요. 솔직히 영감님한테는 잘할 수 있다고 했지만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요.]

[이해하네. 누구나 처음엔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자네가 불안해했던 그 심리. 내 계산에 있었네.]

[정말입니까?]

[그렇네. 내가 살아온 연륜이 있는데 그걸 계산에 넣지 않았다면 말이 되지 않지. 내가 놀랐던 건 자네는 내 생각만큼 불안감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네.]

[아마 혼자였다면 못 했을 겁니다. 영감님이 있어서 용기 있게 나간 겁니다.]

[그랬는가?]

[네. 영감님은 언제나 내 편이잖아요.]

#.

태화는 옷을 갈아입고 약속이 잡힌 장소로 이동했다. 태화는 약속 장소로 잡은 카페는 호텔에 있는 카페답게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태화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늘 만날 상대인 민경희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태화가 민경희에게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

민경희가 바로 태화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저기. 서태화 감독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제가 연락드렸던 민경희입니다.”

태화는 민경희를 보자 왠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전에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왜?”

“왠지 낯이 익어서요.”

민경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뵈었죠.”

“휴게소라?”

태화는 휴게소라는 말에 뭔가 떠올랐다.

“앗!”

“이제 기억나세요?”

“네. 아진이, 아니, 신아진 팀장이랑 같이 있었던 그분 맞죠?”

태화의 말에 민경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신아진 팀장님과 함께 있었던 그 직원 맞습니다.”

태화는 잠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살폈다. 자신과 민경희는 카페 입구 근처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민경희 님. 여기에 계속 서 있을 게 아니라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하죠.”

“어머. 정말 그렇네요.”

태화와 민경희는 카페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카페엔 손님이 많지 않아서 빈자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태화와 민경희는 자리를 잡고 나서 각자 마실 음료를 주문했다. 두 사람 모두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태화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민경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아진 팀장은 안 오는 건가요?”

“아. 팀장님은 다른 일이 있어서 거기에 가셨습니다. 혹시 뭐 궁금한 거 있으세요?”

“그럼. 묻겠습니다. 투자사라고 하셨는데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궁금하시겠네요.”

민경희는 자기 가방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태화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드림 팩토리’라고 적혀 있었다.

“드림 팩토리라. 꿈을 만드는 공장. 그런 의미인가요?”

“뭐. 비슷해요. 영화라는 걸 만드는 건 결국 자본이니까요.”

“주로 영화 제작에 투자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당장 필요한 건 투자자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배급사가 필요하신 거겠죠.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영화제가 끝나면 극장 개봉해야 해서요. 혹시 배급과 관련한 일도 하십니까?”

“저희 투자사는 투자만 하지 않습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배급 일도 같이 합니다.”

태화는 민경희가 건네준 명함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명함에는 ‘드림 팩토리’라는 회사명 옆에 투자 배급이라고 인쇄가 되어 있었다.

태화가 민경희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배급했는지 궁금하네요.”

“방금 말했듯이 저희는 블록버스터 같은 작품을 배급한 적은 없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개인의 향기>입니다.”

“아. 그런가요?”

<개인의 향기>는 소위 말하는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관객들 사이에서 꽤 호평받은 작품이다.

“틈새시장 같은 걸 노리는 건가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혹시 이번에 부성 국제 영화제에 온 건…….”

“네.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저희가 배급할 작품을 찾는 것도 있습니다.”

태화는 민경희가 지금까지 한 발언이 마치 꿀을 바른 듯 달콤하게 들렸다.

[태화 군. 상대의 말이 달콤하게 들릴수록 조심해야 하네.]

[네.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태화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발언했다.

“하지만 제 작품을 아무 조건 없이 배급하지는 않겠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저희의 조건은 하나입니다.”

태화는 맥락상 민경희가 말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조건이란 게 성과입니까?”

민경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감독님. 일단 뭔가 내세울 수 있는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이해합니다. 영화 포스터에 한 줄 문구라도 들어가야 할 테니까요.”

“감독님. 잘 아시네요. 저희도 아무것도 없이 작품을 배급하기에는 부담이 따르니까요.”

“하지만 좀 걱정이 되는군요.”

“걱정이요?”

“그 성과라는 게 제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어서요.”

“…….”

“아시겠지만 그 상이라는 게 내가 원한다고 주는 게 아니잖아요. 작품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고요.”

“감독님. 좀 엄살이지 않나요?”

“엄살이요?”

“네. 아무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이 상을 준다고 하지만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거든요.”

“여론이요?”

“네. 이곳 현지에서 서태화 감독님은 이미 상당히 핫한 인물이 되어있습니다. 물론 이런 흐름엔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으니 가능한 것이지만요.”

“…….”

“어쨌든 심사위원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 모토는 관객과 호흡하는 영화제이니까요. 영화제 모토와 다르게 간다면 부성 국제 영화제 측은 상당한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민경희의 분석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태화 군. 민경희 분석은 일리가 있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민경희의 분석은 이영진의 합류와 맥이 닿아 있네.]

[맥이 닿아 있다?]

[그렇네. 이영진은 바로 상업영화의 절정에 서 있는 감독이네. 바로 이영진이야말로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감독일세.]

[결국 영감님 말은 심사위원들이 관객들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는 없을 거란 말이군요.]

[그렇네. 아마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걸세.]

태화는 슬슬 민경희와의 미팅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화가 민경희를 보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 만나게 돼서 좋았습니다.”

“네. 저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감독님?”

“네. 말씀하세요.”

“저 <내 복권 내놔!> 재밌게 봤습니다.”

“작품을 보셨나요?”

“네. 첫 개봉 때 봤습니다. GV 행사도 재미있게 봤고요.”

“아. 그랬군요.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근데…….”

“네?”

“아닙니다.”

순간 민경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혹시 신아진 팀장님도 같이 봤는지 물어보려고 하셨죠?”

“네. 혹시 같이 봤나요?”

“아뇨. 저하고 신아진 팀장님은 같이 보지 않았어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어제 본 걸로 알고 있어요.”

“어제요?”

민경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가 신아진 팀장님께 강력하게 추천했거든요. 꼭 봐야 한다고.”

“민경희 님.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솔직히 저번에 <내 복권 내놔!> 보고 나서 감독님 팬 됐습니다.”

“팬이요?”

“네. 말 나온 김에 사인 좀 해주세요.”

민경희는 말을 마치고 나서 펜과 종이를 태화에게 건넸다. 태화가 웃으며 민경희에게서 펜과 종이를 넘겨받았다.

태화는 정성스럽게 종이에 자기의 사인을 해서 민경희에게 주었다. 민경희는 태화가 사인한 종이를 보며 활짝 웃었다.

“서태화 감독님. 꼭 성공하세요.”

“덕담 고맙습니다.”

민경희가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감독님이 성공하면 이 사인의 가치도 좀 올라가겠죠?”

“네?”

“이 사인의 가치가 올라가면 나중에 팔려고요. 이거 친필 사인이니까 사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겠어요?”

“그거 너무 남는 장사 아닙니까?”

“그냥 먼저 알아본 사람의 프리미엄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은데요?”

태화는 민경희의 발언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말한 대로 되기를 바랐다.

“그 프리미엄 아주 많이 붙었으면 좋겠군요.”

#.

신아진은 샛노란 자신의 지프차를 손수 운전해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차에는 신아진 혼자가 아니었다. 신아진의 옆자리에는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아진아. 괜찮다니까.”

“아니에요. 그래도 역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그런데 아진아.”

“네. 할아버지.”

“정말 인연은 인연이구나.”

“…….”

“서태화 감독과 아진이 네가 초등학교 동창이라니…….”

“저도 놀랐어요. 할아버지가 출연한 작품이 태화가 연출했던 작품이라뇨.”

“허허허. 그러게, 말이다.”

신아진이 할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의 정체는 바로 <내 복권 내놔!>에서 노숙자 역할을 맡았던 우한수였다.

신아진은 우한수의 외손녀이다. 신아진은 어제 <내 복권 내놔!>를 우한수와 함께 보았다.

우한수는 결혼을 20대 초반에 빨리했다. 우한수의 딸이자 신아진의 엄마도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이 때문에 우한수는 실제 나이 오십도 되지 않아서 신아진을 봤다. 그래서 우한수는 장성한 신아진 같은 외손녀가 있다.

신아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연기 제법 하던데요?”

“이 녀석아. 그래도 이 할애비가 연기를 전공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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