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87화
석무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서 감독. 그렇게까지 겸손해할 필요는 없네.”
석무열은 태화를 서 감독이라고 지칭했다. 태화가 기억하기에 석무열이 자신을 이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
“선생님. 방금 저를 감독이라고 부른 거 맞죠?”
“왜 그러나?”
“그렇게 부른 거 제 기억엔 처음입니다.”
“자네가 감독이 맞으니까. 자네는 이미 <내 복권 내놔!>를 연출한 감독일세. 자넬 감독이라 부른 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저를 인정해 주는 겁니까?”
“내가 인정해 주는 걸 떠나서 이미 많은 사람이 자네가 감독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어.”
“…….”
“그렇게 생각하면 자네에게 표를 던졌던 심사위원들은 뿌듯해하겠구먼.”
석무열이 지칭한 심사위원들은 과거 태화가 저예산 영화 제작 지원 사업에 응모했을 당시 마지막에 태화에게 표를 던졌던 심사위원들을 지칭했다.
“선생님은 저한테 표를 던지지 않으셨죠.”
“하지만 난 그때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네.”
“…….”
“자네는 전혀 영화연출에 관한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 흔한 단편도 연출하지 않은 상태였네. 그래서 난 자네한테 투표하는 게 그냥 모험이라고 생각했었지.”
“이해합니다. 판단의 근거가 될 게 저한테 없었으니까요.”
태화의 말을 들은 석무열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태화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자신감이 보기 좋구먼. 하지만 난 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할 걸세.”
“그러시죠. 전 지금처럼 성과를 또 낼 거고요.”
“좋구먼. 자. 한잔하지.”
석무열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잔을 들었다. 태화에게 건배하자는 의미였다.
태화는 잠시 주춤했다. 자칫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괜찮네. 무열이는 겉과 속이 다른 스타일이 아니네. 자기가 먼저 건배를 하자고 잔을 들었다면 그냥 자네와 건배하고 싶은 것이네. 그러니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태화는 자기의 잔을 들었다. 그리고 석무열의 잔에 부딪혔다. 태화와 석무열은 이번에도 각자의 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석무열이 태화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좋구먼.”
“저도 좋습니다.”
“좋아? 나랑 술을 마시는 게?”
“재밌잖아요.”
“재밌다?”
“네. 선생님하고 처음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도 술이 매개체가 됐었죠. 물론 그때는 선생님 혼자 취하신 거지만…….”
“그렇군.”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먼. 솔직히 나도 자네와 같이 이렇게 술잔을 기울인다는 걸 전에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네. 그런데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는구먼.”
“그래서 사람의 인연은 모른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군.”
태화가 이번에는 술병을 집었다. 그리고 석무열의 빈 잔을 채웠다. 그런 후 태화가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이영진 감독을 만났습니까?”
태화의 말에 순간 석무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석무열은 처음엔 다소 굳은 표정을 지었지만, 나중에는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석무열으로선 태화의 입에서 이영진의 이름이 나온다는 게 의외였기 때문이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여기 오기 전 이영진 감독을 만났습니다. 아까 <내 복권 내놔!> 개봉관에 찾아왔더라고요.”
석무열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자네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와 이영진의 관계 말일세.”
“…….”
“자네의 말투를 들어보면 마치 뭘 알고 말하는 것 같거든.”
순간 석무열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자네 정체가 도대체 뭔가?”
“정체요?”
“그렇네. 박도봉 감독님 장례식장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이번에 내가 이영진을 만났냐고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선생님. 몇 개월 전에 이영진 감독이 노량진에서 <아름다운 인생> 로케이션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고요.”
“그랬는가?”
“그렇습니다. 전 거기서 선생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영진 감독에게 했던 행동을 지켜봤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이 이영진 감독에게 했던 행동은 아주 적대적이었습니다. 아닙니까?”
석무열은 태화의 설명을 듣고 나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노량진 로케이션 당시 자신이 이영진에게 보였던 태도는 분명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태화가 목격했으니 자신과 이영진의 관계에 관해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는 있었다.
자세히는 몰라도 분명 두 사람 관계가 아주 좋지 않다는걸.
석무열의 매섭게 변했던 표정도 태화의 설명이 끝나자 평상시 모습으로 변했다.
“서 감독. 미안하구먼.”
“네? 그게 무슨…….”
“내가 좀 예민하게 반응했었네. 나로선 자네가 나와 이영진의 관계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좀 당황스러웠네.”
석무열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태화는 석무열 자신과 이영진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민하게 반응한 점에 관해선 사과하겠네. 서 감독.”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구먼.”
“뭐. 서로 이해해가면서 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화의 발언에 석무열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가끔 자네를 보면 애 늙은이 갔단 말이지.”
태화와 석무열은 다시 소주 한잔을 기울였다.
#.
몇 시간 후.
태화와 석무열이 갑작스럽게 갖게 된 술자리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가고 있었다. 태화와 석무열은 둘이 꽤 많은 술을 마셨다. 하지만 오늘따라 태화는 자신이 마신 술에 비해서 취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속이 좀 쓰릴 뿐 정신은 멀쩡했다. 그에 비해서 석무열은 취기가 많이 올라온 상태였다. 석무열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내가 오늘 정말 화가 났던 게 뭔지 알아?”
“뭔데요?”
“왜 신은 나한테 영화적 재능은 주지 않았을까?”
석무열은 말을 하고 나서 고개를 숙였다. 석무열은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화 군. 잠시 저렇게 놔두게나.]
[네?]
[아마도 무열이는 지금 울고 있을 걸세.]
[그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게 아니라…….]
[고개를 안 드는 거네. 무열이는 그랬지. 술을 마시다가 뭔가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있었네. 그리고 그건…….]
[우는 것이었군요.]
[그렇네. 지금 무열이는 울고 있을 거네. 아마도 이영진을 보며 자괴감을 많이 느꼈을 거네. 이영진을 상대로 무언가 해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을 것이네.]
[그렇군요. 저는 석무열 선생님이 저랑 술을 마시면서 기분 좋아하시기에 어느 정도 기분 전환이 되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아마도 기분을 풀기 이전에 자괴감이 너무 커서 그러네.]
[석무열 선생님은 왜 그렇게 자괴감을 크게 느꼈나요? 영감님은 잘 알 거 아닙니까?]
[내가 전에도 자네에게 말했지만, 이영진의 영화적 재능은 아주 뛰어나네.]
[현재 이영진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네. 뒤에서 누군가 밀어준다고 해도 본인의 재능이 모자라면 그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지. 하지만 이영진은 최고의 자리에 올랐네. 그 바탕엔 이영진의 영화적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네.]
[결국 석무열 선생님도 그걸 알고 있기에 저렇게 자괴감에 빠진 것이군요.]
[그랬을 거네. 아무리 노력해도 넘어설 수 없는 벽. 그게 바로 이영진이지.]
태화는 아무 말 없이 석무열을 바라보았다. 태화의 눈에 미세하게 떨리는 석무열의 어깨가 보였다. 석무열은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지금 흐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태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냥 석무열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
다음 날.
태화는 알람 소리에 맞춰 잠에서 깨어났다. 태화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였다.
태화는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서 마셨다.
[태화 군. 일어났는가?]
[네. 영감님.]
[무열이와 술 마시느라 고생했네.]
[고생은요. 저도 나름대로 즐거웠습니다.]
[즐거워?]
[네. 석무열 선생님에 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구먼.]
[영감님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무열이 녀석. 겉모습과 다르게 섬세한 녀석일세. 마음의 상처도 잘 받는 성격이고.]
[어제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더군요. 어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을 땐 저도 순간 짠하더라고요.]
태화는 석무열과 자정이 조금 넘는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태화는 석무열과 바로 헤어지지 않고 석무열의 숙소까지 바래다주었다.
석무열은 어디의 지원을 받지 않고 사비로 부성 국제 영화제를 방문했다. 그래서 석무열의 숙소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모텔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선생님. 들어가서 쉬세요.”
“고맙네. 서 감독. 자네한테 신세를 지는구먼. 오늘 내가 추한 모습을 보였네.”
“아닙니다. 저도 선생님하고 시간을 보낸 게 좋았습니다.”
“나도 좋았네. 조심해서 숙소로 돌아가게.”
“네. 선생님. 그럼. 푹 쉬세요.”
“그래.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태화와 석무열이 헤어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석무열은 갑자기 태화의 얼굴에서 박도봉 감독의 모습이 겹치는 걸 보았다.
‘아니, 저건. 박 감독님의 모습이 아닌가?’
순간 석무열은 태화를 불렀다.
“저기 잠깐만.”
“네. 선생님.”
석무열은 자기의 손으로 눈을 비볐다. 석무열이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태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석무열이 다시 태화를 보자 그냥 태화의 얼굴만 보였다.
“왜 그렇게 절 쳐다보십니까?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석무열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야. 술을 좀 마셔서 그런지 헛것을 본 거 같네.”
“헛것이요?”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 같네. 빨리 가서 쉬게나.”
“아. 네. 알겠습니다.”
태화는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태화가 나오자마자 태화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태화가 번호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저기. 서태화 감독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네. 전 민경희라고 합니다.
“아. 민경희 님이요?”
태화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민경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요?”
-아마 그럴 겁니다. 저도 감독님한테 처음으로 전화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저는 영화 투자사 직원입니다.
“투자사 직원이요?”
-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저기. 잠깐만요.”
태화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