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86화
이영진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박도봉 감독이 말한 것처럼 자기의 생각을 쉽게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들은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왜 웃는 건가?]
[이거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군요.]
[응?]
[이거 대단한 사람한테 인정받는 기분이 이런 것이군요.]
[뭐라?]
[그렇잖아요. 현재 영화계의 제왕이 저를 인정한 거 아닙니까? 게다가 이영진은 누구에게 재능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면서요? 그러니 저로서는 기분이 나쁠 수가 없잖아요.]
태화의 이런 감정은 당연했다. 같은 칭찬이라도 비슷비슷한 위치의 사람이 칭찬하는 것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칭찬하는 건 분명 그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그 대상이 태화 자신이 이겨야 할 상대라고 할지라도…….
[영감님한테 미안하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군요.]
[이해하네. 아마 나라도 자네와 같은 감정을 가졌을 것이네. 인정을 받는다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특히 그 분야에 최고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겠지.]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오호. 그런가?]
[네. 다시 정신 차리고 가야죠.]
태화는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태화는 숙소로 가기 위해 발을 뗐다.
극장에서 숙소까지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이는 부성 국제 영화제 측의 배려이기도 했다. 숙소는 걸어서 이동해도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태화가 걷기 시작하고 몇 분 후 태화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바로 한재영이었다.
“어. 재영아.”
-태화야. 행사는 잘 끝났어?
“그래. 무사히 잘 끝났지.”
-저기 말이야. 너 여기 좀 빨리 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왜? 무슨 일있어?”
-다른 게 아니라 석무열 선생님.
한재영도 석무열을 몇 번 만나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석무열 선생님이 왜?”
-그걸 잘 모르겠어. 지금 술집에 계신데…….
“술집?”
태화는 살짝 놀랐다. 태화는 석무열이 부성 국제 영화제로 왔을 거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석무열도 영화 관계자로서 부성 국제 영화제를 참관하러 오는 게 당연했다.
-태화야. 석무열 선생님. 혼자 술 들고 계셔.
“혼자서?”
-응. 아무래도 네가 여기 와봐야 할 것 같아서…….
“알았어. 거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냐면…….
태화는 한재영이 위치 설명하는 걸 들었다. 태화는 한재영이 말하는 곳이 대충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알았어. 금방 갈게.”
석무열이 있는 곳은 현재 태화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
태화는 한재영과의 통화를 마치고 10분 정도 후에 석무열이 있는 술집 앞에 도착했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자마자 손으로 술집을 가리켰다.
“이 술집에 계셔.”
“어떻게 만난 거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라고.”
“분위기가 이상해?”
“응. 뭐랄까……. 이렇게 표현하기는 좀 그런데…….”
“괜찮아. 말해봐.”
“약간 정신이 나간 듯했어.”
“정신이 나간 듯했다고?”
“응. 내 느낌은 그랬어.”
“알았어. 고마워.”
“그래. 빨리 들어가 봐.”
“그래. 고맙다.”
“새삼스럽게 뭘. 그래도 석무열 선생님이 작품 만들 때 도움 많이 줬었잖아.”
“알았어. 그럼 들어가 볼게.”
“그래.”
태화는 한재영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 내부는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깔끔했다. 태화가 석무열을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박도봉 감독이 석무열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 군. 구석진 자리를 우선 찾아보게나.]
[구석진 자리요?]
[그렇네. 무열이의 습관일세.]
[알겠습니다.]
태화의 박도봉 감독의 조언대로 술집의 구석진 자리를 중심으로 훑었고 금방 석무열을 찾을 수 있었다.
[영감님. 저기 있군요.]
석무열은 홀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무열이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네.]
[이유가 뭘까요?]
태화는 석무열이 이영진을 만났을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열이는 이영진을 만났을 것이네.]
[그렇다는 건 석무열 선생님이 제 작품을 봤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무열이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자네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네. 그런 상황에서 자네가 부성 국제 영화제에 진출했다는 건 무열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을 거네.]
[그러니까 오늘 <내 복권 내놔!>를 보러 왔다가 이영진을 만난 거군요.]
[아마도 그렇게 됐을 거네.]
태화는 석무열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태화가 테이블에 다가가는 동안 석무열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태화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앉을 의자를 손으로 옮겼다.
태화가 석무열을 향해 말했다.
“석무열 선생님.”
태화가 불렀지만 석무열은 아직 태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석무열은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술에 많이 취해서가 아니었다. 석무열의 머릿속이 지금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석무열이 태화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태화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마침 석무열의 술잔이 비어 있었다.
태화는 재빨리 소주병을 자기의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석무열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석무열은 그제야 반응했다.
“아. 이게 누구인가?”
“선생님. 서태화입니다.”
“흐흐흐. 반갑구먼.”
“여긴 어쩐 일이세요?”
태화는 석무열이 왜 부성 국제 영화제에 왔는지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 물어봤다.
“크크크.”
“…….”
“혹시 말이야. 내가 자네 때문에 이곳에 온 거로 생각하는 건가?”
태화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전 그런 생각 한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도 영화인이니까 이곳에 온 것이겠죠.”
태화의 말에 석무열이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영화인이라…….”
석무열은 영화인이라는 이 말이 너무 좋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면서 동시에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영화인이지.”
석무열은 태화가 따른 잔을 입에 가져갔다. 석무열은 술을 마시려는 순간 잠시 멈췄다. 그리고 태화에게 물었다.
“자네도 술 하겠나?”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마시겠습니다. 잠시만요.”
태화는 홀 서빙을 보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을 불렀다. 아르바이트생은 20대 초반의 여대생이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여기. 소주잔 하나만 갖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재빨리 카운터로 가서 소주잔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석무열은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태화에게 술을 따라주기 위해서였다.
태화도 이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빈 잔을 석무열에게 내밀었다.
석무열이 피식 웃으며 태화의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석무열이 태화에게 술을 따라준 후 발언했다.
“자. 한잔 들지.”
“네.”
태화와 석무열은 잔을 부딪치지 않고 각자 술잔을 비웠다. 태화나 석무열이나 각자의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태화와 석무열은 각자 자기의 잔을 비운 후 바로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석무열이 태화에게 발언했다.
“자네 술을 제법 하는구먼.”
“제가 술을 잘 마시는 줄 어떻게 아십니까? 이제 한잔 마셨을 뿐인데요?”
석무열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척 보면 알게 되네.”
“너무 대답을 쉽게 하는 거 아닙니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나름대로 근거를 말해야 할 것 같군.”
“그 근거가 뭡니까?”
“자네의 표정이었네.”
“저의 표정이요?”
“보통 술을 잘 못 하는 사람들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보이기 마련이네. 아무래도 속에서 잘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자네의 표정은 그렇게 불편해 보이지 않았거든.”
“…….”
“어떤가 이 정도면 나름대로 근거가 되지 않는가?”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주 과학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군요.”
태화의 말에 석무열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런 소리 말게나. 사람의 표정이란 게 의외로 많은 걸 표현하고 있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의 표정도 달라지셨군요.”
“뭐라?”
“저랑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게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제가 오늘 선생님을 처음 뵐 때하고 지금 표정하고 매우 다르거든요.”
“내가 그랬는가?”
“네. 아주 많이 다릅니다.”
석무열은 태화의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태화. 어쩌면 방금 이 녀석이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왜일까? 왠지 이 녀석과 대화하면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집중하게 된다.’
석무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태화는 석무열의 말투와 표정을 보며 다소 안심했다. 그리고 태화는 석무열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선생님. 혹시 제가 연출한 <내 복권 내놔!> 보러 오신 겁니까?”
“맞네. 자네가 연출한 작품을 보러 온 게 맞아.”
“좀 의외군요.”
“의외라고?”
“네. 저는 선생님이 이렇게 바로 대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대답할 거로 예상했었나?”
“뭔가 다른 핑계를 댈 거로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핑계?”
“네.”
“내가 왜 그렇게 대답할 거로 생각한 건가?”
“그냥. 느낌일 뿐입니다. 선생님은 잘했다고 칭찬하기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주는 스타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거든요.”
방금 태화가 한 발언은 태화가 석무열에게서 받은 느낌을 말한 것이다.
“내가 그랬던가?”
“네.”
“음. 아마 그랬을 것이네.”
석무열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발언했다.
“솔직히 내가 약간 삐딱한 면이 있으니 말일세.”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선생님이 제가 연출한 작품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오신 건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네가 의외라고 생각하는 건 이해하네. 나는 자네가 연출한 작품이 부성 국제 영화제에 게다가 경쟁 부분에 진출했다는 소식에 놀랐었네. 자네의 성과가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것을 훨씬 넘어섰으니까.”
석무열의 방금 발언은 사실이었다. 석무열은 태화가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지 처음부터 의구심을 가졌었다. 태화가 석무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제가 낸 의외의 성과를 확인하러 온 것이군요.”
“그렇네. 게다가 자네는 현재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상당히 핫한 인물이 되어가더군. 그래서 직접 와본 것이네.”
“직접 와서 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뜨겁더군. 솔직히 나도 놀랐었네.”
“저도 관객들의 반응이 이렇게 뜨거워질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