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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85화 (160/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85화

사람은 누군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 그 사람의 독특한 기운이나 느낌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석무열이 이영진을 느낀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이영진이 먼저 석무열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가 여기 어쩐 일이냐?”

“여기 오건 말건 내 자유 아닌가?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는다.”

“솔직히 의외였어. 부성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다 맡고. 원래 그런 거 좋아하지 않았잖아. 귀찮은 일이라고 말이지.”

석무열의 발언을 듣고서 이영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석무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지. 계산이 밝은 사람이라면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 자리를 노리는 게 맞는 건가? 30주년을 맞은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는 아무래도 특별하니까. 게다가 기자 회견한 거 보니까 장사도 아주 잘한 것 같던데?”

“네 말에 아주 가시가 돋아 있구나.”

“너무 약한 척하는 거 아닌가? 이 정도 말로 가시가 들어 있다고 말하다니.”

“무열아.”

“…….”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박도봉 감독님 그렇게 돌아가신 거.”

“…….”

“그리고 넌 그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겠지.”

“가증스러운 인간. 뚫린 입이라고……. 그럼 아니야?”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뭐?”

이영진이 석무열을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이영진은 석무열을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항상 그 모양인 거야.”

“뭐라?”

석무열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래서일까?

석무열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쥐었고 그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 자식을 여기서 한 방 날려?’

석무열은 순간 주먹을 한 방 날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다.

‘아니지. 그래 봐야 저 녀석에겐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아.’

그랬다. 석무열이 이영진에게 주먹을 날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원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모든 언론은 이영진의 편을 들 것이고 자신은 그냥 이영진 감독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이거뿐이겠는가?

자칫하면 30주년을 맞이하는 부성 국제 영화제를 망친 주역이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저 녀석을 이기는 건 영화로서 이기는 거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하지만 석무열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절망감이 들었다. 석무열 자신의 재능으로는 이영진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적 재능으로 따진다면 석무열 자신은 이영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 나에게 영화적 재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박 감독님 살아 계실 때 무언가라도 보여드렸을 텐데…….’

이영진의 영화적 재능은 박도봉 감독도 인정했던 사안이었다. 박도봉 감독은 가끔 이영진의 영화적 재능에 관해서 석무열에게 말했었다.

“무열아. 문호(이영진의 개명 전 이름)의 재능은 때때론 나를 두렵게 할 정도다.”

“감독님을 두렵게 할 정도라고요? 문호 형의 재능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그래. 어쩌면 문호는 내가 품을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그런 녀석이다.”

박도봉 감독의 예감이 맞아 떨어진 것일까? 이영진은 결국 박도봉 감독의 품을 떠났다.

석무열이 주춤하는 사이 이영진이 피식 웃으며 석무열에게 말했다.

“왜? 한 대 치려고 했는데 겁나지? 아무도 네 말 안 들어줄 테니까.”

“…….”

“무열아. 그냥 찌그러져 있으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안 생겨.”

“뭐?”

“이해한다. 네 마음. 어떻게든 날 이겨보고 싶겠지. 하지만 말이야. 그게 될까?”

석무열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이영진에게 욕이라도 막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이런 것마저 쉽게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실이 석무열에게 순간 너무 어이없이 느껴졌다. 그래도 석무열은 한마디만큼은 이영진에게 하고 싶었다.

“너무 그렇게 잘난 척할 것 없어. 영원할 것 같던 것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니까.”

이영진은 석무열의 말을 듣고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석무열은 이영진의 표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고 있었다. 이영진은 석무열을 깔보고 있었다.

‘여기에 더 있어 봐야 기분만 더러워질 뿐이다.’

석무열은 여기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석무열은 그 자리를 떴다.

이영진은 그런 석무열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될 거로 믿고 있다니…….’

이영진은 석무열을 보내고 나서 한동안 극장 뒤편에서 태화를 바라보았다. 이영진이 오늘 이곳을 방문한 건 무엇보다 요즘 핫한 태화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서태화. 서태화라…….’

#.

태화와 관객들과의 만남은 이제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태화는 자신에게 선뜻 다가오는 사람들이 너무나 좋았다.

[태화 군. 힘들지 않은가?]

[아니요.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 준다는 느낌이 너무 좋네요. 그래서 그런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태화는 마지막 관객 두 명과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관객은 20대 젊은 여성 두 명이었다. 두 명의 관객은 태화와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너무 좋아했다. 그 모습이 마치 유명 스타와 기념사진을 찍은 듯했다.

두 여성 중 한 여성이 찍은 사진을 보고 나서 감탄하며 말했다.

“어머. 감독님. 너무 멋져요!”

그 여성의 발언에 이어 다른 여성이 발언했다.

“정말요. 웬만한 연예인보다 멋지신 것 같아요.”

두 사람의 반응을 본 태화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고맙습니다. 두 분이 좋아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태화는 흥겨운 기분을 느끼며 극장 출입구로 향했다.

[영감님. 사람 인생 참 모른다더니…….]

[왜? 좋은가?]

[네. 좋습니다.]

[거보게. 내 말대로 감독하니까 좋지 않은가?]

[그러게요. 어쨌든 이런 생각이 잠깐 들긴 했습니다.]

[어떤 생각 말인가?]

[이 맛에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하는구나.]

[그건 당연하네.]

[당연하다고요?]

[그렇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으니까. 어쨌든 자네는 지금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있으니…….]

[욕구가 충족이 된 거다. 뭐 그런 말이군요.]

[그렇네.]

태화는 행사를 끝내고 극장 출입문을 향해 이동했다. 태화가 극장 출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 태화를 불렀다.

“서태화 감독.”

태화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태화는 시선을 돌리고 나서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당신은…….”

태화가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자신을 부른 사람이 바로 이영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영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태화에게 다가왔다.

“서태화 감독. 반가워요.”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태화의 이 질문은 분명 현재 상황과 맞지 않았다. 이건 태화가 거물인 이영진을 아무 예고 없이 만나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태화 군. 긴장하지 말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이영진한테서 느껴지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라고요.]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게.]

[어떻게요?]

[이영진. 어차피 자네가 뛰어넘을 상대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뛰어넘을 상대? 그게 말이 쉽죠.]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라 넘어설 수 있는 벽이라고 생각하는 거네.]

[넘어설 수 있는 벽이라. 그건 뛰어넘는다는 의미잖아요.]

[그렇네.]

박도봉 감독의 넘어설 수 있는 벽이란 말은 나름 효과를 발휘했다. 태화가 빠른 시간 심리적 안정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아. 제 질문이 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태화의 발언에 이영진이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아. 괜찮아요. 예고 없이 찾아온 저한테도 잘못이 있는 거니까요.”

“이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작품 잘 봤어요.”

“아. 네.”

“확실히 작품을 잘 만들었더군요. 저예산에 저런 퀄리티를 낸 것도 놀랍고요.”

“그냥 열심히 만들었을 뿐입니다.”

“서태화 감독은 확실히 재능이 있어 보여요.”

“네?”

“열심히 만든다고 다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방금 이영진이 한 발언을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아마도 오만하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네가 뭔데 평가질이냐?

이런 냉담한 반응을 듣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이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발언을 한 사람이 바로 이영진이기 때문이다.

“아.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영진이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웠어요. 서태화 감독.”

태화는 이영진이 내민 손을 잡았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자. 그럼.”

이영진은 태화와 악수를 끝내고 나서 극장 밖을 나갔다. 잠시 후 태화도 밖으로 나갔다.

#.

태화가 극장 밖으로 나가자 밖은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이미 하늘은 노을로 인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태화 군. 어땠는가?]

[이영진을 만난 느낌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네. 이렇게 직접 대화까지 한 건 처음이지 않은가?]

[뭐. 솔직히 상당한 기는 느껴지더군요. 저런 것이 바로 성공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고요.]

[단순히 육체의 성장만이 아니라 사회적 성장도 존재하네. 그 사회적 성장이 어느 정도 도달하면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표현하지. 자네 말처럼 성공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력한 기를 발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네. 그만큼 사회적으로 성장한다는 건 경쟁에서 이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네. 사회적 성장과 함께 그 사람의 기도 같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

[어쨌든 이영진의 기는 꽤 강력한 게 느껴지긴 했어요.]

[그래서 어땠는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던가?]

[글쎄요. 당장은 어렵다고 해도. 그래도 사람이잖아요.]

[크크크. 아주 좋네. 난 또 자네가 혹시 쫄아버린 건 아닌가 했다네.]

[한 번의 만남으로 쫄긴 좀 억울하잖아요.]

[어쨌든 이영진이 자네를 찾아왔다는 건 현재로선 아주 의미 있는 일이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심사위원장으로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자네와 <내 복권 내놔!>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겠지. 특히 부성 국제 영화제 홈페이지에 자네의 기사가 게재될 정도니까.]

[그렇게 본다면 이영진이 오늘 절 찾아온 게 저에게 나쁜 게 아니겠군요.]

[그렇네. 이영진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을 거네. 자네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이영진은 느꼈을 것이네.]

[느껴요? 뭘 느꼈다는 말입니까?]

[자네가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네. 내가 아는 한 이영진은 누구에게 재능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성격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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