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80화
노성준의 설명이 이어졌다.
“네. 제가 고집을 좀 부렸습니다.”
“고집이요?”
노성준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네. 제가 무조건해야 된다고 그랬거든요.”
“무조건이요?”
“네. 그래서 확인하러 왔던 것 같습니다. 제 고집이 쓸데없는 고집이었는지.”
태화에게 집행위원장 참석은 예상 밖의 변수임이 분명하였다.
“집행위원장님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저를 크게 나무라지 않을 걸 보면 나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그때였다. 노성준의 스마트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노성준은 메시지를 확인한 후 태화에게 말했다.
“전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럼 가 보셔야지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집부려줘서 고맙습니다.”
태화의 말에 노성준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발언했다.
“네. 감독님.”
노성준은 말을 마치고 서둘러 극장을 빠져나갔다.
[태화 군. 노성준의 역할이 생각보다 컸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고집을 부렸다는 부분이 걸립니다.]
[나도 그렇네. 아마도 노성준은 사직서를 걸었을지도 모르네.]
박도봉 감독의 말에 태화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사직서요?]
[그렇네. 집행위원장은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세. 분명 집행위원장은 오늘처럼 하는 GV에 찬성하지 않았을 걸세.]
[왜 그런 거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보통 성향이 보수적으로 되게 마련이네. 그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네.]
[영감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노성준은 결국 집행위원장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사직서를 걸면서까지 한 것이군요.]
[그렇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그건 나도 자세히 모르네. 하지만 분명한 건 자네에게서 그렇게 해도 좋다는 어떤 가치를 발견한 게 아닌가 싶네.]
[저에게서 어떤 가치를 발견했다고요?]
[그렇네. 그렇지 않고서는 사직서까지 걸지 않았을 걸세.]
[도대체 뭘까요?]
태화는 그 이유를 잘 모르지만 박도봉 감독은 노성준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박도봉 감독은 노성준도 태화에게서 자신이 보았던 걸 봤을 거로 추측했다. 아직 설익었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태화의 리더로서 자질은 분명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이걸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글쎄. 사람의 속을 누가 알겠는가?]
그때였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야!”
“어. 그래”
“근데 누구야?”
한재영은 노성준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태화가 그동안 비밀 유지를 위해서 홀로 따로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 노성준 씨야. 이번 GV 행사 담당자야.”
“아. 그래? 이거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뭐. 기회가 있겠지. 그나저나 이곳에 집행위원장이 다녀갔단다.”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은 깜짝 놀랐다.
“뭐? 집행위원장?”
“응.”
한재영은 집행위원장이 직접 이곳에 왔다 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왜?”
“그건 아마도…….”
태화는 한재영에게 일련의 사안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노성준 씨. 정말 고마운 사람이네. 고마운 사람이야.”
“그렇지.”
“태화야. 아무래도 말이야.”
“아무래도 뭐?”
“느낌이 좋아. 이번 영화제에서 뭔가 성과가 있을 거 같다.”
“당연히 그래야지. 재영아. 오늘 수고 많았다.”
“수고는 무슨……. 나보다는 네가 고생이 많았지. 오늘 GV 행사를 준비한 것도 넌데. 솔직히 난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뭐? 미안?”
“그래. 너 혼자 고생한 것 같아서. 솔직히 GV 행사는 피디인 내가 주도해서 해야 하는 건데…….”
한재영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영화 현장에서 때로는 피디가 주도적으로 GV 행사를 준비하는 경우도 꽤 많이 있다.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 앞으로도 기회는 많으니까.”
“좋다.”
“뭐가 좋아?”
“앞으로도 기회가 많다는 네 말. 너무 좋다. 태화 너 앞으로 나하고 계속 작품 하는 거다?”
“그야. 당연하지. 너만큼 나하고 잘 맞는 사람이 있겠니?”
#.
다음 날 아침.
태화는 깊이 잠이 든 상태였다. 어제 GV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연기자와 스태프들은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뒤풀이 시간은 서로를 알아가는 데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태화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랐던 건 선헤영의 주량이었다. 선혜영은 겉보기에는 술을 잘 못 마실 것 같은 인상이다.
뽀얀 피부에 순수한 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혜영은 보기와 달리 술이 꽤 셌다. 심지어 남자친구인 정원석보다 술이 더 셌다.
정원석은 얼굴이 빨개지고 눈이 풀렸지만 선혜영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삑. 삑. 삑.
태화의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고 태화는 이 알람 소리에 금방 잠이 깼다.
[태화 군 깼는가?]
[네. 영감님.]
[몸 컨디션은 어떤가?]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다?]
[네.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몸이 아주 개운합니다.]
[음. 그럴 수 있지. 기분이 좋아서 마신 술은 몸이 붕 뜨게 만들지.]
[그렇습니다. 저도 어제 제법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너무 개운해요. 머리가 아프지도 않고요.]
[그러고 보면 사람의 사람이란 참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술을 즐겁게 마시느냐 아니면 고통스럽게 마시느냐에 따라 달라지니 말일세.]
[그러니까요. 정말 어제 술을 마셨나 싶습니다.]
태화는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
태화와 부성 국제 영화제에 참여했던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호텔 숙소에서 제공해 주는 아침을 먹은 후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선발대로 온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과 김현석은 영화제 폐막식까지 남는다. 후발대로 온 정원석과 선혜영 최수빈 그리고 송윤주는 서울로 돌아간다. 후발대 인원 중 이한철과 정민석은 서울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며칠 더 영화제에 머물 예정이다.
이한철과 정민석이 남는 이유는 밴드 엔의 뮤직비디오 촬영 때문이다. 밴드 엔은 영화제 기간 버스킹을 할 예정이다. 태화는 이 버스킹을 촬영해서 뮤직비디오 영상 소스로 쓸 계획이다.
영화제 기간 버스킹을 제안한 건 태화다. 영화제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면 관객들을 상대로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 그리고 부성시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 그곳을 배경으로 버스킹을 하면 꽤 아름다운 영상을 뽑아낼 수도 있다.
태화와 남는 사람들은 아침 식사 후 서울로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했다. 정원석과 선혜영이 먼저 출발한 상태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잘 가’ 혹은 ‘조심해서 가’라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지만 유독 한 커플은 그 이별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바로 송윤주와 이한철 커플이다. 먼저 시동을 건 건 의외로 이한철이었다.
“윤주야. 보고 싶어서 어떡하냐?”
이한철의 발언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한철이 발언했던 내용도 그렇지만 말투도 이전과는 분명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이한철에게 말했다.
“한철이 형. 말투가 너무 스윗한 거 아닙니까? 정말 이한철 본인 맞습니까?”
이한철이 한재영에게 대꾸했다.
“당연히 나지. 누구겠냐?”
한재영이 이한철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분명 한철이 형이 맞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때였다. 송윤주가 나섰다.
“한철 오빠 원래 스윗했어.”
송윤주의 대답에 한재영이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누나 뭐라고요?”
“한철 오빠 원래 스윗했다고. 사람들 있는 곳에서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스윗한 거야? 사람들도 많은데.”
송윤주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재영에게 말했다.
“왜? 싫어?”
“아니. 싫기는……. 그냥 부러워서 그렇지. 한철이 형. 스윗한 모습. 참 좋네.”
약간은 달라진 이한철의 모습에 태화는 한편으로 당황스러웠지만, 그 모습이 보기엔 좋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다. 이한철은 항상 진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윤주가 태화를 향해 말했다.
“태화야. 누나 간다.”
태화가 송윤주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누나. 조심해서 올라가요.”
“그래. 태화 너도 몸 챙기고.”
“네. 누나.”
태화의 시선은 최수빈에게 향했다.
“수빈아. 고생했다.”
“고생은 뭘. 고생은 네가 했지. 그리고 고마워.”
“뭐가?”
“어제 GV 행사 말이야. 너무 성공적이었잖아.”
“나도 너한테 고마웠어. 네가 선혜영 님이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해 준 덕에 GV 행사가 빛났어.”
태화와 최수빈의 대화를 듣던 송윤주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발언했다.
“야. 서태화하고 최수빈이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다니…….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송윤주의 미소엔 흐뭇함이 짙게 묻어 있었다. 방금 태화와 최수빈의 모습은 송윤주 자신이 그렇게 바랐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철 오빠가 스윗한 건 비교도 안 되는걸?”
“그랬나요?”
“그럼. 우리 태화 고생했어.”
송윤주는 태화를 친동생처럼 생각했고 방금 말투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화도 송윤주의 이런 배려가 좋았다.
“누나도 고생했어요.”
“그럼. 나, 간다.”
“네. 누나.”
송윤주와 최수빈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를 출발시켰다. 두 사람이 떠나고 태화가 이한철에게 한마디 던졌다.
“한철이 형. 멋있어요.”
“뭐? 멋있어?”
“네. 윤주 누나가 행복해 보여요.”
“그래 보였냐?”
“네. 아마도 형 때문이겠죠.”
이한철은 태화의 말에 대꾸보다는 그냥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태화는 이한철의 미소가 무척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태화 일행은 서울로 떠난 사람들을 배웅하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태화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태화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확인했다. 밴드 엔의 리더 오창민이었다. 태화가 오창민의 전화를 받았다.
“아. 오창민 님. 무슨 일이세요?”
-네. 감독님 혹시 SNS 보셨어요?
“SNS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요?”
-네. 감독님. 지금 부성 국제 영화제 공식 계정이 너무 뜨거워서 불이 날 지경입니다.
“네? 불이 날 지경이요?”
태화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한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아. 부성 국제 영화제 공식 계정에 들어가 봐.”
“공식 계정에? 알았어.”
한재영은 재빨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부성 국제 영화제 공식 계정을 찾아 들어갔다. 한재영은 부성 국제 영화제 계정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 계정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내 복권 내놔!>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야. 이거 장난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