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79화
노성준은 나름 자기 고집이 있었고 무언가를 결심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노성준이 계속해서 안을 올리자 윗선에도 반응이 있었다. 집행위원장 지성학이 노성준을 부른 것이다.
집행위원장 지성학은 예산이 투입되는 부분에선 중간 관리자보다는 실무자를 직접 만나는 성향이 있었다.
노성준이 계속해서 안을 올리자 지성학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성학이 노성준을 부른 것이다. 노성준은 집행위원장실 문을 노크했다.
똑. 똑.
잠시 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노성준은 집행위원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행위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노성준입니다.”
“노성준 씨. 기획안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기획안 꽤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네. 위원장님.”
“이렇게 <내 복권 내놔!>의 GV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선함입니다.”
“신선함이라.”
“네. 그렇습니다. GV 행사에 영화 음악을 접목시키는 게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뭐죠? 계속해 봐요.”
“네. 30주년을 맞은 부성 국제 영화제는 관객과 함께라는 걸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그 모토에 가장 잘 어울리는 GV 행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성학은 노성준의 발언에서 패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 패기가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노성준 씨.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낸다면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대부분의 GV 행사가 진중하게 진행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지성학의 말처럼 GV 행사가 다소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건 가벼운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노성준은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지성학에게 주었다.
“위원장님. 사직서입니다.”
지성학의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직서요?”
“네. 만약 의도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만두겠습니다.”
“노성준 씨. 이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까?”
노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화를 낼 법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성학은 궁금함이 앞섰다.
“그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지성학은 부성 국제 영화제를 통틀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질문에 얼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노성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결국 영화는 감독의 작품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내 복권 내놔!>의 서태화 감독은 그 능력이 출중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었으니까요. 이런 작품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네. 서태화 감독처럼 재능이 넘치는 감독이 사장되지 않게 하는 것도 부성 국제 영화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동안 부성 국제 영화제는 영화의 다양성에 이바지해 온 것도 사실이니까요.”
“영화의 다양성과 GV 행사에서 음악 공연을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그건 논리의 비약 아닌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네. 대중에게 중요한 건 화제성입니다. 화제성이 있어야 대중의 관심을 끌 테니까요.”
지성학은 노성준의 의견에 동감했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대중들에게 화제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성학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노성준에게 물었다.
“자신 있나?”
노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해 보이겠습니다. 전 사직서까지 걸었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노성준 씨.”
“네. 위원장님.”
“그런데 노성준 씨가 사직서까지 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겁니까? 알다시피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에 취업했다면 결코 나쁜 자리가 아닙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거…….”
“그런데 왜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성학은 오른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만졌다. 이건 지성학이 뭔가 깊이 고민할 때 하는 습관이다.
“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혹시 서태화 감독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왜 그런가? 서태화 감독은 기껏해야 이제 작품 하나를 만든 신인 감독일세. 혹시 자네한테 더 좋은 자리를 제안하던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서태화 감독은 신인 감독일 뿐입니다. 저에게 좋은 자리를 제안할 처지가 못 됩니다.”
“그런데 왜 자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냥.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에 들어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
노성학은 태화와 몇 번의 미팅을 가졌었다. 노성학은 태화를 만날수록 그릇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성학의 인생에서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무엇보다 태화는 상황인식이 정확했다.
보통 태화처럼 데뷔작이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작에 오르면 자신의 뽕에 취하게 마련이다. 모든 게 다 자기의 능력이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태화는 달랐다.
태화는 정확히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에게 중요한 건 관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겁니다. 저에겐 화제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GV는 단순히 영화에 관한 소개나 깊이 있는 이해가 아니라 화제성이 되어야 합니다.”
태화의 이런 상황 인식은 노성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서태화. 아직 젊은 감독이다. 그런데도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런 걸 통찰력이라고 해야 하나?’
노성준은 알고 있었다. 태화처럼 저예산 작품이 영화제에 출품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장 필요한 건 영화제 측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작품을 홍보할 수 있는 예산도 없기 때문이다. 그냥 작품의 이해에 GV를 활용하면 그 작품은 영화제에서 성과가 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영화제 이후 극장에 개봉되기도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태화는 정확하게 GV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그냥 앞으로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도와줘야 나중에 생색이라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노성준이 이런 판단 근거는 바로 태화의 통찰력이었다. 태화는 이제 한 작품을 만든 감독이었지만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몇 편의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들보다 그릇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성학은 노성준의 대답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국 가능성을 보고 베팅했다는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알겠네. 나도 궁금해지는구먼. 그 결과가 어떨지.”
지성학의 발언을 들은 노성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
태화는 GV 행사가 끝나자 오히려 더 바빠졌다. 관객들이 일시에 태화 주변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태화 이외에 정원석과 최수빈 그리고 선혜영 주변에도 사람들이 몰렸지만, 태화 한 사람에게 모인 인원보다 그 수가 적었다. 관객들은 태화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하거나 사인을 받았다. 한 여성 관객이 태화와 사진 촬영을 하려고 자세를 잡았다.
“어머 감독님. 저보다 머리가 작으세요.”
“아, 그런가요?”
태화는 재치 있게 자기의 얼굴을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태화의 얼굴이 여성 관객보다 얼굴이 크게 보였다.
“감독님. 매너 짱이시다.”
“하하. 그런가요?”
태화는 자신에게 다가온 관객들을 정성껏 대했다. 누군가는 힘들지 않냐고 할지 모르지만, 태화는 지금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게 좋았고 즐거웠다. 어느새 극장에 있었던 관객들은 다 빠져나가고 극장엔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와 연기자들만 남았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지막까지 감독님이 저보다 인기가 좋으시네요.”
“하하. 그랬나요?”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엔 배우빨이라도 받아서 감독님 이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네요.”
“별말씀을요.”
정원석의 말이 끝나자 선혜영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혜영에게 태화는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감독님. 저를 이곳에 오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런 말 마세요. 선혜영 님은 이곳에 올 자격이 차고 넘칩니다.”
“전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게……. 내가 극장에서 관객과 이렇게 만나다니……. 물론 여기 오기 전에 벅찬 감정이 올라올 거로 상상했어요. 그런데 막상 관객과 만나니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오더군요. 정말 이런 감정은 처음이에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결심이요?”
“빨리 나도 다른 작품에 캐스팅돼서 연기하고 싶어요.”
선혜영은 그동안 육체적인 상처는 치료가 됐지만, 정신적으로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럴 때 선혜영의 부성 국제 영화제 참가는 정신적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선헤영 님.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선혜영의 뒤이어 최수빈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서태화. 오늘 나쁘지 않았어.”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정말 오늘 괜찮았나 보다? 네가 그런 말을 다 하고.”
“그래. 정말 괜찮았어. 특히 네가 비밀을 유지했던 것도 아주 좋았고. 솔직히 GV 행사에 영화 음악을 라이브로 공연할 거란 걸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최수빈의 말투에는 흥분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최수빈으로선 충분히 그럴 만했다. GV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관객들에게 주목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최수빈에겐 나쁘지 않았다.
태화는 최수빈과 태화를 끝내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뒤쪽에 서 있는 노성준을 발견했다. 순간 태화와 노성준의 눈이 마주쳤다. 태화가 재빨리 노성준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
태화가 노성준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감독님. GV 행사. 성공적으로 치러졌네요.”
“이게 다 노성준 님 덕분입니다.”
“별말씀을요.”
“아닙니다. 노성준 님이 윗선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면 오늘 같은 GV는 없었을 겁니다.”
“감독님. 놀라지 마십시오.”
태화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GV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행위원장님이 다녀갔습니다.”
태화는 노성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집행위원장님이요?”
“네.”
“도대체 왜?”
“아마 확인하러 온 것 같습니다.”
“확인이요?”
노성준이 태화의 표정을 살폈다. 확실히 태화의 표정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