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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78화 (189/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78화

태화가 가리키는 곳에 이한철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거치시킨 상태에서 촬영하고 있었다.

“한철이 형이 촬영을?”

“그래.”

“혹시 네가 밴드 엔과 했던 약속 때문에 그런 거야?”

한재영은 태화가 밴드 엔에게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주기로 했던 약속을 알고 있었다.

“맞아.”

“와. 한철이 형. 대단하다. 어떻게 이 사실을 말 한마디 안 하고…….”

“한철이 형이 입이 좀 무겁잖아.”

이한철은 태화의 제안을 받고서 처음엔 놀랐었다. 하지만 태화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듣자 자신이 태화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

“서태화. 이미 판은 다 짜져 있는 거 아니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한테 부탁하는데 어느 정도 그림은 완성해 놓고 해야죠. 안 그래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바로 태도이다. 누군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좋으면 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다. 태화가 이한철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

태화가 이한철에게 한 부탁은 부탁이라기보다는 모셔간다는 표현이 맞았다. 태화가 모든 사안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한철로선 태화가 모든 걸 준비해 놓은 걸 못 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태화. 너 그사이 더 능구렁이가 된 거 같다?”

“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어느새 밴드 엔의 노래가 마지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숴! 부숴! 내 안의 모든 걸 부숴! 부숴! 부숴 버려!

밴드 엔의 <부숴 버려!>가 끝나자 객석에선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오상문이 진행을 위해서 마이크를 잡았다.

“와. 정말 대단한 무대였습니다. 감독님. 이 밴드의 음악. 귀에 익은데요?”

“지금 공연을 한 밴드는 엔입니다.”

“엔이요?”

“네. <내 복권 내놔!>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밴드입니다.”

“아. 그래서 노래가 귀에 익었었군요.”

“네. 꽤 실력이 있는 뮤지션들입니다.”

태화의 멘트가 끝나고 나서 밴드 엔의 멤버 소개가 이어졌다. 김우진(베이스), 채성관(드럼), 이채연(키보드), 마지막으로 오창민이 자기 소개했다.

“밴드 엔에서 리더이자 보컬을 맡은 오창민입니다.”

밴드 엔의 소개가 끝나자 오창민이 멘트가 이어졌다.

“저는 오늘 영화를 보고 나서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음악을 누가 맡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심플하더군요. 감독님. 영화 음악은 밴드 엔이 전부 담당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요? 무척 궁금해지는군요.”

“가장 큰 이유는 음원 저작권 문제 때문입니다.”

“저작권 문제요?”

“아시겠지만 초저예산으로 제작된 작품이라 저작권료를 지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성격과 맞는 뮤지션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찾은 뮤지션이 바로 여기 있는 밴드 엔이고요.”

오상문은 태화의 대답을 듣고 나서 오창민에게 질문했다.

“어떻습니까? 감독님의 대답이 맞습니까?”

오창민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감독님이 저에게 했던 말하고 다른데요?”

“달라요?”

“네. 저희한테는 음악에 끌려서 찾아왔다고 했거든요.”

오창민의 대답에 객석은 순간 빵 하고 터지고 말았다. 진행자 오상문은 순발력이 좋았다.

오상문은 재빠르게 태화에게 질문했다.

“감독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태화가 대답하기 전 활짝 웃었다.

“음악에 끌려서 간 것도 맞습니다. 아무리 저작권 때문이라지만 밴드 엔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전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상문이 오창민을 향해 질문했다.

“감독님의 대답 마음에 드십니까?”

오창민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변명같이 보입니다.”

오창민의 대답에 객석에선 웃음이 빵 터졌다. 오상문의 즉흥적인 진행은 계속됐다.

오상문은 오창민을 제외한 밴드 엔의 다른 멤버들에게 질문했다.

“혹시 리더인 오창민 님의 결정에 다른 의견은 없었습니까?”

김우진과 채성관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채연의 대답에 좌중은 웃음이 터졌다.

“감독님. 잘생겼잖아요. 전 무조건 찬성했습니다.”

#.

밴드 엔이 참여한 GV 행사는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무엇보다 밴드 엔이 열정적으로 공연한 데다가 입담 또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밴드 엔의 멤버도 GV 행사에 참여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밴드 엔의 순서도 거의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오창민이 활짝 웃으며 발언했다.

“오늘 여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감독님의 꼬임에 넘어온 건데……. 이렇게 관객 여러분들에게 환영받으니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한 곡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영화에서 박성욱의 테마에 썼던 곡입니다. 곡명은 <영화처럼…….>입니다.”

오창민이 간단한 곡 소개를 마치자 밴드 엔의 반주가 시작됐다. <영화처럼…….>은 펑크 록 분위기의 <부숴 버려!>와는 다른 분위기의 노래였다.

비트가 강하면서도 암울한 느낌을 주는 노래였다.

언제나 희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현실은 나를 고독하게 하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어려움을 극복하지만 난 현실에서 좌절하네.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에선 언제나 새드 엔딩. 새드 엔딩. 새드 엔딩.

밴드 엔은 <영화처럼…….> 노래를 부르고 나서 퇴장했다. 밴드 엔이 퇴장할 때 객석에서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졌다.

태화는 이 순간 알 수 있었다. <내 복권 내놔!>의 GV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있음을…….

오상문의 멘트가 이어졌다.

“네. 밴드 엔의 공연 잘 봤습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감독님.”

태화가 마이크를 집으며 발언했다.

“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상문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객석에선 아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안 돼요.”

“더 해요.”

오상문이 객석을 바라보며 발언했다.

“저도 이렇게 GV 행사가 끝나는 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계획된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상문의 발언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객석에서 아쉬움의 발언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오상문의 말처럼 언제까지 GV 행사를 할 순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감독의 마지막 발언 정도다.

[태화 군. 자네도 잘 알겠지만, 자네가 하게 될 마지막 발언은 아주 중요하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GV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네. 현재 여기 모인 관객들은 자네에 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네. 그걸 십분, 아니, 백분 활용해야 하네.]

[백분 활용이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허허허.]

[영감님. 왜 웃으십니까?]

[자네의 말투가 너무 뭐랄까? 비장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웃음이 났었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겁니까?]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어럽지 않다고요?]

[그렇네. <내 복권 내놔!> 작품에 스타 연기자가 출연하지 않았네. 정원서과 최수빈. 이 두 사람은 좋은 연기자이지만 대중적인 파워를 가졌다고 하기엔 아직 미흡하네.]

[티켓 파워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인 자네는 관객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네. 두 주연 배우보다 말일세.]

[영감님의 말은 스타 시스템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네?]

[많은 예는 아니지만 스타 감독이라는 것도 존재하니 말일세. 이영진도 그런 감독 중 하나이고.]

[그렇군요. 영감님. 하지만 전 이제 입봉한 신인입니다.]

[그래서 자네에게 스타성이 부여될 수 있는 걸세. 자네는 정말 난데없이 등장한 감독일세. 이전에 어떠한 작품도 연출했던 경험이 없네. 하다못해 그 흔한 단편도 없단 말일세.]

[그렇죠.]

[그런 감독이 생애 첫 작품이 장편이고 그 작품이 부성 국제 영화제에 경쟁작으로 올라왔네. 이제 관객들의 머릿속에 자넨 아주 특별한 감독으로 인식이 될 걸세.]

[영감님 말이 어떤 의미인 줄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아주 간단하네.]

[간단하다고요? 영감님이 그렇게 말해주니 더 궁금하네요. 말씀해 주세요. 제가 이 시점에서 뭘 해야 하는지.]

태화는 지금 필사적이었다.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 진출이라는 쾌거가 다가 아니다. 다음 단계를 위해선 영화제에서 성과가 나야 한다.

[태화 군. 자네가 할 일은 어렵지 않네.]

[어렵지 않다고요?]

[그렇네. 자네는 지금껏 해오던 대로 하면 되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한 말 그대로네. 자네가 앞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건 자네의 인간적인 매력이네. 괜히 쓸데없는 행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세.]

[거기에 하나 더 필요하지 않나요?]

[그게 뭔가?]

[동정표요.]

[동정표? 허허. 자네 말이 맞네. 동정표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게 하는 건 없지. 하지만 그걸 너무 과하게 표현해서는 안 되네.]

[알고 있습니다. 너무 과하면 역효과가 날 테니까요.]

오상문이 태화를 향해 발언했다.

“감독님.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

태화가 객설을 바라보며 발언했다.

“저희 영화 <내 복권 내놔!>는 정말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하지만 작품의 퀄리티는 높습니다. 여기 계신 관객분들께서 주변에 많이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여러분 입소문만큼 무서운 게 없잖아요. 하하. 그리고 오늘 영화 상영에서 GV 행사까지 제법 긴 시간이었습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신 관객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태화는 발언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태화가 허리 숙여 인사하자 객석에선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함성과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마지막으로 진행을 맡은 오상문이 발언했다.

“그럼 이상으로 <내 복권 내놔!> GV 행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내 복권 내놔!> GV 행사에서 태화가 마지막 발언을 할 즈음.

객석 제일 뒤쪽에서 행사를 지켜보던 안주원과 노성준은 GV 행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안주원이 노성준에게 말했다.

“확실히 <내 복권 내놔!> GV 행사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고생은요. 지금처럼 관객들이 좋아하면 저는 오히려 신이 납니다. 보람도 있고요.”

“어쨌든 고생 많았어요. 결재받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잖아요.”

안주원의 말처럼 노성준이 <내 복권 내놔!> GV 행사 관련 결재를 받는 과정은 전혀 순탄하지 않았다.

노성준이 결재받기 위해서 썼던 논리는 신선함이었다. GV 행사는 대부분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이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GV 행사는 작품에 관한 이해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때로는 작품의 홍보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노성준이 결재받아야 하는 윗선은 신선함보다는 진중함에 무게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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