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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76화 (18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76화

객석에서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려던 선혜영은 이 소리를 듣자 순간 울컥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선혜영이 울먹이는 모습은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태화는 이 순간 GV 행사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선혜영의 모습이 작위적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관객의 반응을 보아도 그렇고요.]

[자네도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객석의 반응이 꽤 강한 것 같아서요.]

[그건 당연하네.]

[당연하다고요?]

[그렇네. 선혜영의 울먹이는 모습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게 그 원인이네. 그 이유가 뭔지 아는가?]

[글쎄요.]

[그건 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네.]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장치. 그게 뭡니까?]

[그건 선혜영의 서사네.]

[서사라…….]

[그렇네. 선혜영의 서사엔 극적인 요소가 있네.]

[영감님 말에 공감합니다. 촬영 첫날 사고가 났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 커다란 임팩트를 줄 수밖에 없죠.]

[그렇네.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사 즉 이야기에 관심이 많네. 특히 그 이야기가 극적일수록 더 열광하게 되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혜영은 가장 기쁘고 설레는 날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으니까요.]

[그렇네. 그리고 또 하나. 결국 자네가 애초에 생각했던 서사가 만들어지게 될 걸세.]

[영화 외적 서사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렇네, 영화의 외적 서사는 사람들이 영화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네. 특히나 <내 복권 내놔!>는 외적 서사가 풍부하네.]

[영감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영감님도 알다시피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었으니까요.]

[대중들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네. 뭔가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성공하는 이야기 말일세.]

선혜영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결국 첫날 사고로 전 영화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쉰다고 회복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요.”

“아. 그랬었군요.”

오상문은 진행하면서 이번 GV 행사에 빠져들고 있었다. 너무나도 서사가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동안 수없이 많은 GV 행사를 진행해왔지만, 이번처럼 흥미진진하기는 처음이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이야.’

오상문의 시선이 태화를 향했다.

“그때 감독님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태화가 마이크를 잡고 대답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이 다쳤으니까요.”

“…….”

“그리고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책임감이요?”

“네. <내 복권 내놔!>를 만들기 위해서 모인 연기자와 스태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촬영 일정이 미뤄지면 촬영을 진행할 수가 없었거든요.”

“촬영을 진행할 수 없게 되는 이유가 연기자와 스태프들의 향후 일정 때문이었습니까?”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내 복권 내놔!>에 참여했던 연기자와 스태프들은 차기작을 기다리는 그사이에 짬을 내서 촬영에 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촬영 일정이 늦춰지면 촬영이 아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여주를 섭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수빈 님이 여주로 캐스팅이 된 거군요.”

“네. 최수빈 님은 처음 오디션에서도 선혜영 님과 끝까지 경합을 벌였던 연기자였습니다. 그때 오디션 준비도 잘해서 시나리오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장 나은 대안이었습니다.”

“감독님의 설명을 들으니 그 당시 상황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는군요.”

오상문이 최수빈을 향해 물었다.

“최수빈 배우님. 감독님에게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 때 혹시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렇지 않았나요?”

최수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존심보다는 놀랐습니다.”

“놀라요?”

“네. 저는 처음에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절 캐스팅하러 온 줄 알았거든요. 전 조연이 펑크가 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주연을 전격적으로 제안해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선혜영 님이 더는 촬영할 수 없는 사정을 듣게 됐습니다.”

“최수빈 님의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선혜영 님과 함께 이곳에 왔다는 게 전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최수빈 님은 여주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을 텐데요.”

오상문의 질문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감독님이 대답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최수빈이 말을 마치고 나서 태화를 쳐다보았다. 태화가 최수빈의 시선을 받으며 발언했다.

“뭐. 그 제안을 최수빈 님에게 한 건 저니까 제가 대답하는 게 낫겠네요.”

“…….”

“영화에서 심수영이 박성욱이 주운 복권을 몰래 훔쳐서 도망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선혜영 님이 그 장면을 촬영하다가 사고가 났고요.”

“…….”

“그래서 저는 제일 마지막 날……. 그러니까 크랭크 업 하는 날 이 장면을 다시 촬영했습니다. 그런데 최수빈 님이 그러더군요. 이 장면은 선혜영 님이 연기했던 대로 하고 싶다고요.”

태화의 발언을 들은 오상문은 깜짝 놀라며 발언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놀랍군요. 보통 배우들은 누군가가 했던 연기를 따라서 하려고 하지 않는데요.”

“저는 그래서 최수빈 님에게 제안했던 겁니다. 선혜영 님이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게 어떨지. 그리고 최수빈 님이 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오상문은 태화의 대답을 듣고 나서 최수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수빈 님. 이런 말 하기 좀 뭐하지만 대인배시네요.”

오상문의 발언에 GV 현장은 순간 빵 터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최수빈이 마이크를 잡고 대답했다.

“처음엔 저도 망설였습니다. 제가 왜 망설였는지 그 이유는 말 안 해도 잘 아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아마도 내적 갈등이 있었겠지요. 본인이 여주인데 주목도가 분산될 수 있잖아요.”

오상문은 최수빈을 이해한다고 발언하면서도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회자님의 질문처럼 갈등했습니다. 저의 대한 주목도가 분산되는 것도 싫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의 여주니까요.”

최수빈은 오상문의 예측과 달리 대답했다. 보통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엔 대답을 회피하거나 적당히 피하곤 한다. 자칫해서 구설에 오르면 안 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수빈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최수빈이 이렇게 한 데에는 태화의 역할이 컸다. 최수빈은 GV를 앞두고 태화와 상의했었다.

“나 어떻게 해야 하지?”

“뭘?”

“GV 행사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냐고? 분명 선혜영 님 관련해서 질문할 게 뻔해.”

“아마도 그렇겠지.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난 거니까.”

“그러니까. 뭔가 대답을 준비해야 할 거 아니야?”

“그건 수빈이 네가 알아서 해.”

“뭐라고?”

“수빈아. 눈치 볼 거 없어. 특히 내 눈치는 더더욱 볼 필요 없어.”

“뭐?”

“그냥 네 생각을 말해.”

“내 생각?”

“그래. 네가 나를 비난하는 대답을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어.”

“방금 한 말 진심이야?”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진심이지.”

오상문이 최수빈에게 질문했다.

“최수빈 님.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겁니까?”

최수빈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만약 선혜영 님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런 질문을 하니 답이 나오더군요.”

“…….”

“선혜영 님의 좌절감이 너무 클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경우는 정원석 님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비슷했습니까?”

“정원석 님은 감독님에게 마음의 빚을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비슷합니다. 저도 선혜영 님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으니까요.”

최수빈이 대답을 마치가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박수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반응은 최수빈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이어지자 최수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앉은 선혜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수빈의 행동은 사전에 준비된 행동이 아니었다. 관객들이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일 줄 알았지만 이렇게 커다란 반응을 보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수빈이 선혜영에게 손을 내민 행동은 그냥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최수빈이 손을 내밀자 선혜영도 이에 호응했다. 선혜영은 손을 뻗어 최수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수빈과 선혜영의 모습을 본 객석에선 환호와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아. 두 사람 멋있다!”

최수빈과 선혜영. 이 두 사람은 관객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태화는 최수빈과 선혜영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뭇했다.

[영감님. 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낼 거로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최수빈과 선혜영. 두 사람의 만남은 고작 오디션장에서 만난 게 전부였으니까.]

[그렇습니다. 영감님.]

#.

최수빈의 순서가 끝나고 오상문은 작품에 관한 질문을 계속했고 태화는 그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태화가 오상문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 순간에도 관객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보통 GV 행사가 진행되면 관객들도 집중력을 잃게 된다.

하지만 <내 복권 내놔!>의 GV 행사는 관객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실제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관객들이 원하는 건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는 이야기였고 <내 복권 내놔!>는 이런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특히 태화가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오상문은 GV 행사가 진행되는 사이 관객들에게도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한 여성 관객이 태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께 질문하겠습니다.”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질문해 주십시오.”

“감독님은 앞으로 연기자의 삶은 살지 않을 건가요? 지금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이신데요.”

“음……. 아마도 연기자가 아닌 감독의 삶을 살 것 같습니다.”

태화는 대답하는 걸 멈추고 잠시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제 연기 실력은 제가 잘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한다고 해서 늘어날 실력이 아닙니다.”

태화의 너무나 솔직한 대답에 객석은 순간 빵 터졌다. 잠시 후 객석의 웃음이 잦아들고 태화에게 방금 질문했던 여성 관객이 다시 질문했다.

“감독님. 정말이신가요? 연기에 관한 미련이 이제 없으신 겁니까?”

“미련이라…. 제가 볼 땐 감독님들이 저를 캐스팅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태화의 답변에 객석은 다시 한번 빵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태화의 당당한 모습에 객석에선 박수와 함께 연호가 터졌다.

“서태화!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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