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72화
채영준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감독님. 작업할 건 가져오셨죠?”
“아. 당연합니다.”
태화는 외장하드를 채영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일단 제가 중요한 부분을 컷 편집으로 추려왔습니다.”
“네. 잘하셨습니다.”
채영준은 태화에게서 넘겨받은 외장하드를 자신이 작업할 컴퓨터에 연결했다. 채영준은 태화가 작업해 온 컷 편집본을 보고 나서 발언했다.
“컷 편집본이 조금 기네요.”
“아무래도 좀 그렇죠. 중요한 부분만 추린다고 했는데…….”
채영준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발언했다.
“이 정도면 괜찮게 작업하신 겁니다.”
“그런가요?”
“네. 예고편에서 중요한 건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거거든요.”
채영준은 예고편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영화 예고편은 어떻게든 관객들이 본편에 관한 궁금증이 생기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 궁금증이 본편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들게 만들죠. 관객들은 그 기대감 때문에 지갑을 여는 것이고요.”
“감독님. 잘 아시네요. 감독님이 작업해 온 걸 보면 확실히 궁금증이 생깁니다. 제가 많이 작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럼.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겠네요.”
“네. 감독님.”
“다행이네요. 제가 채영준 님의 시간을 너무 빼앗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별말씀을요.”
태화가 예고편 컷 편집을 할 때 박도봉 감독의 도움이 컸다. 박도봉 감독의 관록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태화는 컷 편집을 하면서 의외로 힘들어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태화 군. 아무래도 잘라내기가 힘들지?]
[네. 그렇군요.]
[그건 당연하네. 작품은 감독에게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니까.]
[영감님 말씀이 맞습니다. 모든 장면이 다 중요하게 느껴지다 보니 점점 어렵습니다.]
[태화 군. 나에게 해결책이 있냬.]
[그게 뭡니까?]
[예고편을 또 하나의 창작이라고 생각하게.]
[네? 예고편을 또 하나의 창작으로 생각하라고요?]
[그렇네. 보통 예고편은 본편에 종속된 것으로 생각하네. 하지만 그렇게 접근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예고편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궁금증 유발이네.]
[궁금증 유발이라.]
[그렇네.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지 말고 궁금증 유발에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태화는 이후 예고편에 들어갈 영상을 선별할 때 궁금증 유발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맞게 작업을 진행했다.
이렇게 작업을 진행하자 조금씩 작업의 진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
태화의 컷 편집에 채영준의 추가 작업이 이뤄진 예고편은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꽤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 결과는 좌석 매진 시간 탑3라는 결과를 냈다.
태화는 <내 복권 내놔!>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태화를 제외한 나머지 참여 인원은 이미 지정된 자리에 앉은 상태다. 이미 극장 내부엔 관객들로 꽉 차 있었다.
태화는 이 모습이 꽤 만족스러웠다.
[태화 군. 관객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구먼.]
[그렇습니다. 영감님. 보통은 좌석이 매진되더라도 빈자리가 생기기도 한다는데……. 빈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관객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네. 그래서 살짝 두렵기도 합니다.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그에 대한 역풍도 불게 될 테니까요.]
[걱정하지 말게나. <내 복권 내놔!>는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줄 작품은 아니니 말일세.]
[영감님 말을 들으니 힘이 나는군요.]
[자네는 큰 걱정 하지 말고 GV에 신경 쓰게.]
[알겠습니다.]
태화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자 손짓했다.
태화의 자리는 한재영의 옆자리였다.
태화가 자기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태화의 오른쪽에 한재영이 왼쪽에 최수빈이 위치했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야, 근데 넌 어디 있다가 지금 오는 거냐?”
“뭐. 좀 바빴어.”
“너 무슨 일 꾸미고 있는 거 맞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한재영에게 말했다.
“왜? 궁금하냐?”
“그럼 궁금하지. 안 궁금하겠냐? 그런데 피디인 나한테까지 비밀로 할 일이냐?”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 영화 상영이 끝나면 그 궁금증도 풀릴 테니까.”
“너 정말 뭔가 준비하긴 했구나.”
태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재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궁금하긴 한데…. 어쩌겠어. 기다려봐야지.”
태화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최수빈은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한재영처럼 태화가 꾸미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수빈은 관심이 없는 듯 자기의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했지만, 귀는 태화와 한재영의 대화에 집중했었다.
‘도대체 뭘 준비했기에 저렇게 비싼 척 구는 거야? 서태화.’
하지만 태화가 한재영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최수빈도 일단 기다려볼 수밖에 없었다.
‘서태화. 네가 무슨 일을 꾸미든 상관없어. 다만 네가 꾸민 일이 헛발질이 아니기를 빌겠다. 제발…. 나한테 이번 영화제는 태화 너처럼 중요하니까.’
#.
이제 <내 복권 내놔!>가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이기 직전이다. 영화가 상영되기 직전 스크린은 잠시 암전되었다. 태화는 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감님. 드디어 제 입봉작이 관객들에게 선보입니다.]
[그래. 기분이 어떤가?]
[그냥. 아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럴 걸세. 벅찬 감정이 밀려들어 올 테니까.]
[그렇습니다. 가슴이 너무 차올라서 머리가 마비된 것 같습니다.]
[훌륭한 표현일세. 아주 참신하구먼.]
암전되었던 스크린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역사적인 <내 복권 내놔!>가 스크린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 장면은 정원석이 연기했던 박성욱이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다. 박성욱은 담배를 피우며 최수빈이 연기했던 심수영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이 첫 장면은 선혜영에게 남다르게 다가왔다. 촬영 전, 전체 리허설 때 열심히 준비했지만 선혜영은 결국 이 장면을 촬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혜영은 순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원래대로 배역을 소화했다면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선혜영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바로 아쉬움이었다.
정원석은 자기의 옆자리에 앉은 선혜영이 훌쩍거리자 손수건을 선혜영에게 건넸다. 선혜영은 정원석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내 복권 내놔!> 첫 장면이 지나갔다. 그리고 관객들은 <내 복권 내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태화 군. 관객들이 집중하기 시작하는구먼.]
[그렇습니다. 영감님. 중요한 건 영화 상영이 끝날 때까지 이 집중력이 얼마나 유지 되느냐가 중요하죠.]
[그렇네. 어떤 영화든 초반엔 집중하게 되어있네. 중요한 건 초반이 지나도 관객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일세.]
[그 집중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재미겠죠.]
[그렇네. 이제 자네도 연출자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즐기게나.]
[알겠습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그건 영화감독도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작품을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관객의 입장에서 <내 복권 내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
어느새 <내 복권 내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극 중 남주와 여주인 박성욱과 심수영은 서로의 몸에 치명상을 내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태화 군. 어땠는가?]
[마지막 결말은 확실히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관객들도 그렇게 느낀 것 같고요.]
[허허허.]
[왜 웃으십니까?]
[이미 자네는 직업병이 걸렸구먼.]
[직업병이요?]
[그렇네. 영화감독 특히 상업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은 관객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네. 방금 자네가 했던 발언이 그걸 증명하네.]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태화가 순수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봤다면 관객의 반응에 신경을 쓰는 건 나중 문제다. 하지만 태화는 <내 복권 내놔!> 작품을 보는 내내 관객의 반응을 신경 썼다.
[영감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요.]
태화가 박도봉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스크린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태화는 차분하게 앉아 극장 안의 상황을 살폈다.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거의 이동하지 않았다.
[음. 관객들이 거의 이동하지 않는군.]
[아무래도 GV가 잡혀 있으니까요.]
[그렇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작품이 재미가 없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네.]
[영감님 말씀은 작품에 관한 호기심이 저런 반응이 나오도록 한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본편이 재미가 없는데 GV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작품에 관한 관심이 GV 행사로 이어지는 것일세. 예고편이 본편에 관한 기대감을 높이는 것이라면 GV는 본편을 실제로 본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네. 만약 본편이 재미가 없었다면 관객들은 이미 썰물처럼 빠져나갔을 것이네. 관객은 언제나 냉철하다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작품이군요.]
[그렇네.]
드디어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극장의 조명이 들어왔다. 그러자 객석에서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건 누군가가 시킨 게 아니었다.
그냥 관객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반응이었다. 태화는 객석에서 터진 박수 소리에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영감님.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옵니다.]
[이해하네. 아마도 자네의 가슴속 뜨거운 무언가는 아마도 마음속 응어리와 관련이 있을 거네.]
[마음속 응어리요?]
[그렇네. 자네는 그동안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 즉 연기자로서 삶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서 가슴속에 응어리가 쌓여왔네. 이제 그 응어리가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풀린 걸세.]
[그렇군요. 응어리였군요. 이 뜨거운 것의 정체가….]
태화는 좀 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건 GV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것이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GV 행사에 참여할 인원들이 태화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GV 행사에 참여할 인원은 감독인 태화와 프로듀서인 한재영 촬영감독 이한철이다. 정민석과 송윤주는 GV 행사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남녀 주연인 정원석과 최수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했다. 선혜영은 GV 행사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합류할 계획이다.
이것은 GV 행사를 보다 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선혜영의 이야기 자체가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지는 사이 GV 행사를 진행할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GV 행사를 진행할 사회자는 영화 평론가 오상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