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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71화 (182/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71화

태화가 다소 놀란 감정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때 나한텐 너무 힘이 됐었거든. 솔직히 그때 난 어두운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었으니까. 내가 필요하다는 그 말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였던 거야.”

태화는 정민석의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태화 군. 너무 고민할 필요 없네.]

[네?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렇네. 때로는 사람을 절망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게 한마디 말일 때가 있네. 정민석이 당시에 필요했던 건 말 한마디였던 거네.]

[민석이 형이 필요하다는 그 말이죠?]

[그렇네. 당시 방황했던 정민석은 아마도 자존감이 바닥이었을 거네. 그런 자신에게 태화 군 자네가 너무나 절실하게 부탁했네. 정민석 처지에선 자신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으니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었네.]

[음.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돌이켜보면 자네는 리더의 자질을 제대로 발휘한 것일세.]

[리더의 자질이요?]

[그렇네. 리더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뭘 원하고 있는지. 그걸 정확하게 캐치를 해야 하네. 무능한 리더는 이런 걸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 정민석의 현재 심리상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민석이 형. 그래도 난 형이 고마워. 내 제안을 받아줘서.”

태화의 말에 정민석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정민석은 웃음을 짓고 나서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태화는 정민석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자식. 정말 멋있게 성장했네.

그랬다. 정민석은 이 순간 태화를 대견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제 태화는 학부 시절 자신이 챙겨주었던 후배가 아니었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는 감독이었다.

태화는 정민석과의 인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최수빈에게 다가갔다.

“수빈아. 혹시 잠 못 잔 거냐?”

태화가 이렇게 말한 건 최수빈의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잠을 설쳤네.”

태화는 최수빈의 대답을 듣고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야. 천하의 최수빈이 어쩌다가 잠을 못 자?”

태화의 말에 최수빈이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태화. 넌 잠을 잘 잔 모양이다?”

“보시다시피.”

태화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떠서 최수빈에게 보여주었다.

“아주 꿀잠을 잤지. 그런데 우리 배우님들은 다 잠을 못 잤네.”

“대신 감독은 아주 잠을 잘 자고…. 이거 뭔가 바뀐 거 아냐?”

“뭐. 그런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꼭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태화야. 하나만 물어보자.”

“뭘?”

최수빈이 살짝 기대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간밤에 꿈 좀 꿨냐?”

“꿈? 꿈이라….”

태화는 잠시 기억을 더듬고 나서 대답했다.

“없는데.”

“없어?”

“응. 그냥 눈을 감은 거밖에 기억이 안 나. 바로 잠들었으니까. 근데 그게 중요한가? 난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렇긴 하지. 개꿈이면 차라리 안 꾸는 게 낫고.”

“그렇지.”

태화는 후발대로 부성에 도착한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쳤다. 그런 후 자신의 먹을 아침을 접시에 챙겨왔다.

태화가 도착하자 테이블에는 후발대를 비롯한 선발대까지 모든 사람이 모인 상태였다. 태화가 자리에 앉자 모든 사람이 태화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태화가 사람들을 향해 발언했다.

“다들, 아침 든든하게 먹어요.”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 한재영이 바로 대꾸했다.

“태화야. 그게 다냐?”

“그럼. 다른 할 말이 필요해? 먹는 거 말고 중요한 거 있어?”

태화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사람이란 어쨌든 먹어야 하니까.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기왕 영화제에 왔으니 좀 즐겼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었던 영화도 있었을 거고.”

“…….”

“솔직히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영화들도 꽤 많이 있잖아요.”

태화의 말처럼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이 꽤 있다. 특히 제3세계의 영화는 일반 관객들이 접하기 힘든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이 일반 관객을 만나려면 극장 개봉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배급사가 붙어야 하는데 상업성이 크지 않은 이러한 작품에 배급사들이 달려들지 않는다.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너의 이런 여유 있는 모습. 당연히 자신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어차피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내가 긴장한다고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태화. 네 말이 맞긴 하는데……. 네가 너무 여유 있으니까…….”

한재영의 생각은 비단 한재영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태화는 첫 번째 장편 데뷔작으로 여기까지 왔고 성과를 내야 극장 개봉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건 심리적 부담을 갖게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태화의 여유를 부리는 태도는 한재영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왠지 낯설 수밖에 없었다.

“태화야. 혹시 무슨 비장의 카드라도 있는 거냐?”

“없는데?”

“정말이야?”

“응. 비장의 카드라고 한다면 <내 복권 내놔!>지. 안 그래?”

태화의 대답에 한재영을 비롯한 사람들이 저마다 피식 웃기 시작했다. 태화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이한철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태화. 네 말이 맞다. 그렇지. 서태화라면 그렇게 나와야지. 하하하.”

이한철의 웃음소리는 다부진 체격만큼 꽤 호탕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도 이한철의 웃음소리를 듣자 다소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풀렸다.

#.

태화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나서 각자 자유로운 스케줄을 보냈다. 대부분 태화가 말했던 것처럼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영화들을 관람했다.

영화게 게스트로 참여하면 좋은 게 게스트들은 아이디 카드가 있으면 무료로 하루에 3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

한재영을 비롯한 사람들은 이러한 혜택을 활용했다. 태화가 다른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있었던 건 오늘 있을 GV 행사 관련해서 준비할 사안이 있어서다.

태화는 숙소에 있는 호텔에서 GV 행사 관련 주요 인물을 만날 예정이다. 태화는 호텔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태화가 카페로 들어가자 태화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서태화 감독님!”

태화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태화의 시야에 안주원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 기획팀장의 모습이 잡혔다.

태화가 안주원이 있은 테이블로 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 팀장님.”

“감독님. 밤새 잠은 잘 잤어요?”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아주 잠을 잘 잤습니다.”

태화의 대답에 안주원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하하. 눈도 충혈된 거 같지 않고……. 피부도 아주 뽀송하시네요. 역시 감독님입니다.”

“오늘 아침부터 제가 잠을 푹 잔 게 저희 연기자와 스태프들에게 화제가 되더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배우와 스태프 처지에서 감독님의 컨디션이 중요하니까요. 특히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잖아요.”

태화와 안주원은 편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태화와 안주원. 이 두 사람은 꽤 자주 만났기 때문이었다.

특히 태화와 안주원이 자주 만난 이유는 GV 관련 행사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주원의 옆자리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그 사람은 영화제 이벤트 담당 실무자인 노성준이다.

태화가 노성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노성준 님. 안녕하세요.”

“네. 감독님. 반갑습니다.”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

“솔직히 감독님의 제안. 마음에 들었었거든요.”

“아무리 제 제안이 마음에 들더라도 결국은 윗선의 결재가 나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제안이 좋으면 위선을 설득하기 용이합니다. 그만큼 결재도 잘 나고요.”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태화의 말이 끝나자 안주원이 발언했다.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는 30주년을 맞이합니다. 올해를 계기로 한 단계 도약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동감합니다. 영화라는 게 종합 예술적인 성격이다 보니 여러 가지를 매치할 수 있잖아요.”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 노성준이 발언했다.

“그렇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이벤트가 될 것 같습니다.”

#.

저녁 7시.

<내 복권 내놔!>를 상영하는 개봉관은 작은 좌석의 극장이 아니었다. 영화제 측에서는 경쟁작에 오른 작품에 공정한 운영방식을 취했다.

우선 부성 국제 영화제 측은 경쟁 부분에 오른 작품에 한정해서 비슷한 좌석 수의 극장에서 작품을 개봉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식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불공정 시비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극장 개봉에 관해서는 동등한 출발에서 시작하자는 의미다.

이 때문에 중요한 건 좌석 매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빨리 매진이 되느냐가 관건이었다. <내 복권 내놔!>는 좌석 매진 시간이 상위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탑3에 들어갔다.

이런 결과가 난 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내 복권 내놔!>는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에게 먹히는 요소가 있었다. 그건 한 번만 들어도 제목이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목이 일단 강렬하게 뇌리를 파고들면 쉽게 지우기 어렵다.

여기에 예고편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부성 국제 영화제 측은 경쟁작에 오른 작품에 한정해서 예고편을 만들어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예고편은 영화를 제작한 사람이 직접 만들어 오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래서 태화는 직접 예고편을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꽤 좋았다.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 채영준이었다. 태화가 후반 작업 했을 때 타이틀과 자막 작업을 담당했던 바로 그 스태프다.

태화가 채영준에게 예고편 관련해서 찾아왔을 때 채영준은 그 결과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 정말 믿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

“작품을 보고 나서 어떻게든 결과가 나올 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결과가 나오니 너무 좋네요.”

“고맙습니다. 채영준 님. 제가 이곳에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예고편 때문입니다.”

“예고편이요?”

“네. 영화제 측에서 경쟁 부분에 오른 작품은 직접 예고편을 만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채영준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채영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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