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8화
이영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기자들의 반응을 보았다. 기자들은 이영진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영진의 목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서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켠 채 손을 쭉 뻗었고 누군가는 빠른 손놀림으로 수첩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이 모습을 본 이영진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건 바로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영진은 이 묘한 쾌감을 잠시 만끽하고 나서 다시 발언했다.
“제가 참여해서 부성 국제 영화제가 더 큰 영화제로 발돋움할 수 있다면 그걸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걸로 대답이 될까요?”
한편 태화와 한재영은 이영진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태화야.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뭐가?”
“이영진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심사위원장이라니…….”
“이미 다 일어난 일이야. 현실이란 말이지.”
“하하. 그런가? 어쨌든 태화, 너한테 고마워해야겠다.”
“뭘?”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해 보자고 한 거. 바로 네 생각이었잖아.”
“그렇긴 했지.”
“와. 어떻게든 이영진 감독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네.”
태화는 한재영과 대화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영감님. 나중에 재영이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될 걸세. 현재 한재영의 이영진에 관한 생각은 단순히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넘어서고 있네.]
[네. 호감을 넘어서 존경하고 있다고 봐야죠.]
[그렇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진면목을 보게 되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게 되네.]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이영진의 인터뷰도 어느새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영진이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기자 여러분. 웬만한 질문은 다 나온 거 같은데 그만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영진은 말을 마치고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이영진을 계속 따라갔다. 그 모습이 마치 주인의 뒤를 따라가는 강아지 같았다.
[태화 군. 이영진은 저 인터뷰로 얻을 건 다 얻었네.]
[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이 자연스럽게 언론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이건 즉흥적으로 나온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자네 생각이 맞네. 이영진은 저렇게 즉흥적으로 언론에 발언하는 성격이 아닐세. 나름대로 속으로 계산하고 나서 한 발언이 맞네.]
[이영진은 부성 국제 영화제에 참여하고 나서 얻는 게 많군요.]
[그렇네. 특히 지금 후반작업 중인 <아름다운 인생>을 언급함으로써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네.]
[더 중요한 메시지요?]
[그렇네. <아름다운 인생>이 겉으로 드러난 메시지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메시지도 있었네.]
[영감님이 말한 메시지가 뭔지 알 것 같아요.]
[알아챘는가?]
[네. 이영진은 자신이 부성 국제 영화제에 참가함으로써 더 큰 영화제로 발돋움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자기의 바람을 말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존재감을 공표한 것이네. ‘자신이 참가했기 때문에, 부성 국제 영화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네.]
[어찌 보면 오만한 메시지지만 현재 이영진의 위치라면 오만하게 보이지 않겠죠.]
[그렇네. 대중들은 이영진에 관해서 오만하기보다는 겸손하다고 생각할 걸세.]
[겉으로 드러난 메시지가 그러니까요.]
[맞네. 어쨌든 이영진은 첫날부터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봐야 하네. 그것도 아주 알뜰하게 말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태화는 점점 멀어져가는 이영진의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한재영은 여전히 멀어져가는 이영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재영아. 가자.”
태화의 말에 한재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와. 정말 대단하지 않냐?”
“부럽냐?”
“솔직히 안 부러운 게 이상한 거 아니냐? 넌 안 부럽냐?”
태화는 한재영의 질문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재영이 네 말처럼 안 부러우면 이상하지. 솔직히 부러워.”
태화의 이 대답은 마음에도 없는 발언이 아니었다. 이영진의 위세가 실로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영진이 일인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놀라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도 있지만 부러운 건 사실이었다.
“태화. 너도 저렇게 될 거야.”
“뭐?”
“내가 볼 땐 태화 넌 재능이 있어. 난 네가 그렇게 될 거로 본다.”
“말이라도 고맙다. 꿈은 크게 가져야지.”
“태화야. 내가 너에게 방금 한 말 있잖아. 단순히 말뿐인 거 아니다.”
한재영은 같이 작품을 하면서 태화의 재능을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었다.
“태화 네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나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다.”
“그거야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이제 우리도 나가자. 지금 이곳에 우리밖에 없어.”
태화의 말처럼 이곳엔 태화와 한재영만이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어느새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지?”
한재영은 머쓱했는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몰랐네.”
그때였다. 개막식 행사 진행 요원이 태화와 한재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개막식 행사 다 끝났습니다. 곧 이곳의 문을 닫을 예정입니다.”
“…….”
“정리해야 하거든요.”
태화가 진행 요원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나가겠습니다.”
태화가 시선을 한재영에게 돌리며 발언했다.
“재영아. 가자.”
“그래야겠다.”
한재영이 진행 요원에게 발언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태화와 한재영은 진행 요원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시민의 전당을 빠져나왔다.
시민의 전당은 부성시에서 다소 높은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보이는 부성시의 전경이 꽤 아름답다. 태화와 한재영의 시야에 부성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감탄을 자아냈다.
“재영아. 정말 멋있지 않냐?”
“응. 그렇네. 특히 바다가 멋있네.”
부성시는 항구도시답게 바다 위엔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배들이 내뿜는 조명이 다른 전망과 어우러져 부성시 특유의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태화야. 지금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해변에 있겠지?”
“아마도.”
“우리도 두 녀석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럴까?”
태화와 한재영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 태화의 시야에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태화가 익숙한 그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그 누군가는 태화와 한재영처럼 부성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태화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소정훈 기자님.”
태화의 부름에 소정훈이 고개를 돌렸다. 소정훈은 태화를 보자 활짝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소정훈의 웃음은 뭔가 화통한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화도 소정훈의 웃음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기자님 말처럼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네요.”
“네.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과연 이영진 감독이 이곳에 올 것인지. 그리고 심사위원장을 수락할 것인지.”
“그런데 결국 왔습니다.”
“그러니까요. 저도 의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영진 감독은 공식행사에 나오는 걸 극도로 자제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고요.”
감독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한다는 건 대중들에게 친근함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오히려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더 적극적으로 영입한 거 아니겠습니까?”
태화의 발언에 소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영진 감독과 부성 국제 영화제 양측에 이득이 되는 거래라고 할 수 있죠.”
태화는 발언하는 소정훈에게서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영감님. 뭔가 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인가?]
[소정훈 기자. 말은 이영진 감독에 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 거기서 이질감이 느껴집니다.]
[음. 자네 말은 소정훈 기자가 발언하는 것과 속내는 다르다는 것인가?]
[네. 저하고 처음에 대화를 나눌 때 어감은 뭔가 불만스러운 느낌이 강했습니다.]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구먼.]
[돌이켜 보면. 소정훈 저 사람.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는 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뭔가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확인이라……. 자네의 이 행동……. 혹시 미래를 위한 포석인 건가?]
[역시 영감님입니다.]
[내 말이 맞다는 말이군.]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소정훈 기자가 대세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번 기회에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요.]
[자네 말에 일리가 있네.]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떠보기로 하죠.]
[하지만 여기서 한재영이 끼는 건 좋은 판단은 아닐세. 벌써 자네의 이영진에 관한 생각을 밝힐 필요는 없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태화가 한재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재영아. 나 잠깐 기자님하고 이야기 좀 할게.”
“그래. 알았어. 주차장으로 와.”
“알았어.”
한재영은 태화의 부탁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태화는 한재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모습에 태화는 마음속으로 찡한 게 올라왔다.
태화는 한재영을 먼저 보내고 나서 소정훈에게 말했다.
“기자님. 다소 의외입니다.”
“의외요?”
“네. 아까 리허설 때 기자님의 모습은 놀랄 만한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요.”
태화의 발언에 소정훈은 순간 움찔했다. 태화도 소정훈의 이러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제가 혹시 잘못 본 겁니까?”
소정훈은 아무 말도 없이 태화를 잠깐 바라보았다. 태화는 그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소정훈의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다는걸.
잠시 말이 없었던 소정훈이 입을 열었다.
“재밌군요.”
“뭐가 말인가요?”
“감독님이 한낱 기자 나부랭이에게 관심이 있다니 말입니다.”
“뭐.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죠. 개인이 무언가에 관심을 두는 건 자유니까요.”
소정훈의 화법은 꽤 노련했다. 박도봉 감독도 이 부분을 눈치챘다.
[태화 군. 소정훈 기자. 저 사람 만만치 않구먼.]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네. 자네가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보다는 화제를 전환하려고 하고 있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네. 그냥 말을 돌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음. 그래서 상대의 반응을 보겠다는 계산인가?]
[그렇습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일세. 한 번에 찔러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니 말일세.]
[네. 영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