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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67화 (178/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7화

연출자 박은호는 조명과 오디오를 잘 활용하고 있었다. 박은호가 어둡게 만든 무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이 걸을 때마다 발걸음 소리가 잘 들리도록 무대 바닥에 마이크를 설치했다.

터벅. 터벅.

이 소리는 객석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극적으로 들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두운 환경에서 청각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은호는 바로 이점을 잘 살리고 있었다.

박은호는 시각을 통제하고 청각만으로 제한된 정보를 주고 있었다. 이러한 박은호의 연출은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개막식을 연출하는 박은호는 현재 자신이 연출하고 있는 이 장면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 연출되고 있는 장면이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건 바로 앞 순서에서 진행자인 권현성의 멘트를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내가 의도한 대로다.’

객석에 있던 사람들은 이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두운 무대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출자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객석에서 반응을 보이면 몸에서 전율을 느끼곤 한다. 현재 박은호가 그랬다.

‘그래. 이 맛에 무대 연출을 하는 것이지.’

현재 개막식 현장은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지만, 태화의 머릿속은 그렇지 않았다.

[영감님. 이 순간 그 누구도 입을 함부로 열지 못하고 있군요.]

[그렇네. 지금 이 고요함을 깨는 건, 단순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닐세.]

[그렇습니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걸 넘어 커다란 잘못을 한 것으로 되어버릴 분위기입니다.]

[그렇네. 개막식을 연출한 연출자가 사람들을 기대감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네. 그만큼 연출자가 연출을 잘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기대감을 충족할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 잔뜩 기대하게 만들고 그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거야말로 코미디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네. 그리고 그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까도 말했듯이 바로 그 사람이네.]

[네. 영감님. 그 사람밖에 없습니다.]

터벅. 터벅.

더는 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멈춰 섰기 때문이다.

꿀꺽.

객석에 있는 사람들은 그 한 사람이 멈추는 것에 맞추어 저마다 침을 삼켰다. 긴장감과 기대감에 목이 탔기 때문이었다. 권현성의 이어폰으로 박은호의 지시사항이 전달되었다.

-권현성 씨. 차분하게 소개하세요.

박은호는 유독 ‘차분하게’라는 지시사항을 강조해서 말했다. 권현성은 박은호의 연출 의도를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다음 멘트를 준비했다.

어둠 속에서 진행자 권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놀랄 준비 되셨습니까? 오늘 개막식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부성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소개합니다.”

권현성의 목소리는 들뜨거나 하지 않고 차분했다. 권현성의 소개가 끝나고 무대의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권현성이 놀랄 준비를 하라는 인물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 인물이 누군지 밝혀지자 객석에 있었던 사람들은 놀라움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그 인물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진행자 권현성이 놀랄 준비를 하라고 했던 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영진이 누구던가?

명실상부. 현 영화계의 일인자 아니던가?

게다가 이영진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현재 부성 국제 영화제 개막식에 온 것이다.

“이영진입니다.”

이영진이 자기를 소개하자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객석에서 터지는 연호와 박수 소리. 그야말로 객석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태화만은 그렇지 않았다. 태화는 오히려 차분했다. 언젠가 자신이 넘어야 할 벽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영감님과 제가 예측한 게 맞았습니다.]

[그렇네. 예측이 맞은 건 맞은 거고……. 어떤가 소감이?]

[제가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에 진출한 것에 자부심이 더 느껴지는군요.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심사위원장이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게 되는 건가?]

[네. 그러니 더욱 이번 영화제에서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구먼. 심사위원장이 이영진이니 말일세.]

[그러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이영진이잖아요.]

부성 국제 영화제는 그동안 영화계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심사위원장으로 임명해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영진만큼 파급력이 큰 인물들은 아니었다.

어쨌든 태화로서는 기회라면 기회였다. 이영진이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한 만큼 대중들도 부성 국제 영화제에 진출한 작품이라는 것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태화 군. 어쩌면 예상하지 않았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네.]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요?]

[그렇네. 이영진의 후광효과를 기대할 수 있네.]

[그렇군요. 영감님. 대중들은 부성 국제 영화제=이영진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테니까요.]

[그렇네.]

한편 이영진은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자신의 발언을 이어갔다.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는 30주년을 맞습니다. 이런 의미 있는 올해, 제가 심사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길지 않은 발언. 하지만 이 발언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더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영진의 존재는 그랬다. 존재감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그런 인물.

[이야. 정말 대단하군요.]

[그렇네. 이영진은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네.]

[이영진의 등장 이후 이 개막식도 더는 의미가 없겠군요.]

[그렇겠지.]

#.

이영진의 등장 이후 부성 국제 영화제는 개막식부터 뜨거워졌다. 개막식이 끝나자 기자들이 이영진에게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개막식이 열린 시민의 전당 홀은 잠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이 한 번에 이영진을 둘러싸면서 복도가 막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안 요원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보안 팀장이 기자들을 향해 외쳤다.

“기자님. 잠시만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하지만 기자들은 보안 팀장의 말을 아무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들의 취재 경쟁은 뜨거웠다. 기자들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서로 밀치며 난리가 났다.

“야. 밀지 마!”

순식간에 이영진의 주변은 취재 경쟁으로 인해서 기자들 사이의 몸 싸움장이 되고 있었다. 보안 팀장이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보안 팀장이 보안요원에게 지시했다.

“정리들 좀 해.”

보안 팀장의 명이 떨어지자 보안 요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이영진이 손을 들어 보안 요원을 제지했다. 이영진의 손짓에 보안 요원들도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 요원도 이영진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영진이 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저기. 기자 여러분.”

하지만 기자들은 이영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기자들끼리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영진은 한숨을 쉬고 나서 배에 힘을 꼭 주었다.

“기자님들!”

이영진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졌다. 이영진의 사자후에 기자들도 순간 자리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영진은 기자들이 자신에게 집중하자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방금 사자후를 내뱉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표정이었다.

“기자님들. 여러분의 취재에 응하겠습니다. 단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이영진의 발언에 기자들은 자리싸움을 멈췄다. 분위기가 잡히자 이영진이 발언했다.

“좋습니다. 이제 한 분씩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진이 말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영진이 그중 한 사람을 지목했다.

“저기. 기자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주간 시네마. 박지영 기자입니다.”

주간 시네마는 영화잡지로는 판매 부수가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잡지다.

“오늘 의상이 참 기자님과 잘 어울리십니다.”

박지영 기자는 정장 바지에 데님으로 된 블레이저를 입고 있었다. 이영진의 칭찬에 박지영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네. 박 기자님. 질문하시죠.”

“네. 그럼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진 감독님. 심사위원장직 언제 제안받으신 겁니까?”

“부성 국제 영화제 측에서 제안받은 건 꽤 되었습니다.”

“꽤 되었다고요? 얼마나 된 겁니까?”

“몇 개월 됐습니다.”

이영진의 대답에 기자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몇 개월 전이라면 꽤 오래전입니다. 그런데 그 제안을 수락한 건 언제입니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영화제 측이 제안한 시점과 감독님이 수락한 시점이 꽤 시차가 납니다. 그렇다는 건 고민을 꽤 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응하게 된 겁니까?”

“…….”

“혹시 영화제 측에서 삼고초려라도 한 겁니까?”

이영진은 삼고초려라는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삼고초려는 아닙니다. 제가 그럴 만한 인물도 아니고요.”

“그럼, 뭐죠?”

“저의 개인적인 일정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일정이라면?”

“네. <아름다운 인생> 제작 일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한참 촬영 중이어서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태화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태화는 노량진에서 이영진이 연출한 <아름다운 인생> 촬영장에서 박도봉 감독과 이영진의 관계에 관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간 시네마 기자 박지영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아름다운 인생> 제작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인데……. 현재 어느 정도 진척이 된 겁니까?”

“현재 촬영은 다 끝난 상태이고 후반 작업 중입니다.”

“그럼. 개봉은 언제쯤입니까?”

이영진은 박지영의 질문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박 기자님. 그건 부적절한 질문 같군요.”

“네?”

“죄송하지만 오늘 질문은 부성 국제 영화제와 관련해서 받겠습니다. 오늘 저는 영화감독이 아닌 부성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자. 그럼 다른 분 질문 받겠습니다.”

이영진이 겸손하게 발언했지만 실상 이영진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다 얻은 상황이었다. 이영진은 박지영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연출한 <아름다운 인생>에 관한 홍보를 한 셈이었다.

이영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영진은 그중 한 기자를 지목했다.

“시네 매거진. 전우철 기자입니다.”

“네. 전 기자님. 질문해 주십시오.”

“감독님. 심사위원장을 수락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네.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부성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수락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아까 개막식에서도 말했듯이 부성 국제 영화제는 30주년을 맞습니다. 특히 부성 국제 영화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국제 영화제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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