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6화
소정훈은 태화와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태화 감독님.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소정훈은 오늘 태화를 처음 보았지만, 왠지 마음에 들었다. 소정훈이 이런 마음이 생긴 데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댄다면 그건 바로 촉이었다.
소정훈은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는 논리보다는 이 촉이라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소정훈의 이 촉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다.
소정훈은 자리를 뜨기 전 다시 몸을 돌려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감독님.”
“네. 기자님.”
“오늘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랄 만한 일이요?”
“네. 기대해 봐도 좋을 겁니다.”
태화는 소정훈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했다.
“그 놀랄 만한 일이라는 거. 당연히 알려주시지는 않겠지요?”
소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저도 백 퍼센트는 아니라서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소정훈이 입가에 미소를 살짝 머금은 채 말했다.
“혹시라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내 체면만 구길 거 아닙니까?”
“기자님은 혹시 그 놀랄 만한 일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겁니까?”
“물론 그것도 있지만……. 일단 기자로서 취재차 왔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가 봐야겠군요.”
“아. 네. 바쁘실 텐데 제가 붙잡았군요.”
“네. 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소정훈은 태화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그러자 한재영이 태화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라는 건 뭘까?”
태화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글쎄……. 나도 감이 전혀 안 오는데?”
“아. 진짜. 그냥 말해주고 가지. 사람 궁금하게. 정말 별일 아니면 진짜.”
“별일이 아니지는 않을 거야.”
“뭐?”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시시하지는 않을 거 같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그 소정훈이라는 기자 말이야.”
“왜?”
“사이비 같지는 않았어.”
“하긴. 자기의 신분을 밝힌 상태니까. 물론 사이비라면 소정훈이라는 이름도 가짜겠지만…….”
“…….”
“태화. 네 촉을 한번 믿어보자. 그 놀랄 만한 일이 뭐일지 정말 궁금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태화와 한재영의 대화가 끝나자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태화 군. 난 소정훈 기자의 말에 신뢰가 가는군.]
[정말입니까?]
[그렇네. 부성 국제 영화제는 올해 30주년이네. 뭔가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를 준비할 만하네.]
[저도 그럴 거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는 없군요. 영감님은 무슨 감이 잡힐 만한 게 있으십니까?]
[아마도 영화제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라면 사람이지 않겠나?]
[사람이요?]
[그렇네. 무슨 예산이나 지원금이 늘었다는 건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가 아니잖나?]
[그렇겠네요. 예산이나 지원금은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만한 사건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인물이 온다는 거네요?]
[그렇네. 그리고 내 생각엔 그 인물이 리허설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걸세.]
[그렇다는 건 부성 국제 영화제 측에서도 극비에 부친다는 거 아닙니까?]
[자네 말이 맞네. 태화 군. 자네는 궁금해도 조금만 참게나. 그 실체가 조만간 드러날 테니.]
[알겠습니다.]
태화는 다시 리허설에 집중했다.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 개막식 리허설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올해는 30주년이라 그런지 감독들의 참여율도 꽤 높았다.
비록 리허설이지만 감독들의 자리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
리허설이 끝나고 이제 개막식 시작될 시간이 되었다. 부성 국제 영화제 개막식 현장엔 국내를 포함해 해외에서도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그만큼 부성 국제 영화제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개막식이 열리는 시민의 전당홀 입구에는 레드카펫이 길게 펼쳐져 있었고 레드카펫 좌우에는 가드선 뒤로 수많은 팬이 레드카펫에 발을 디딜 스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막식이 시작되기 전 수많은 스타가 이 레드카펫을 밟고서 시민의 전당 홀로 들어가게 된다.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은 건 배우 이헌수였다. 이헌수는 최근 몇 년간 연기와 인기에서 급성장한 배우다.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에 이헌수가 출연한 작품이 출품되지는 않았다. 단 이헌수는 초대받은 자격으로 부성 국제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헌수의 등장에 팬들은 큰 함성으로 보답했다.
“오빠!”
“헌수 오빠!”
“이. 헌. 수!”
이헌수는 팬들의 연호에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이헌수를 바라보던 여성 팬들이 순간 자지러졌다.
“꺄악!”
이헌수를 시작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는 스타들이 레드카펫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팬들의 함성도 커졌다.
태화는 전당 홀 안에서 밖에서 나는 함성을 듣고 있었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제법. 무게감 있는 사람들이 여기 온 거 같다. 안 그래?”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재영이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놀랄 만한 사람들은 아니야.”
태화의 말에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 생각과 같아. 그리고 정말 놀랄 만한 인물이라면 처음부터 공개하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한재영은 기대감에 얼굴에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야. 진짜 누굴까?”
한재영은 깜짝 놀라게 해줄 인물에 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태화는 달랐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의 대화를 통해서 깜짝 놀라게 할 인물이 누구일지 예상하였다. 이제 남은 건 태화 자신과 박도봉 감독이 예상한 그 인물이 이곳에 나타나는지 하는 여부였다.
#.
레드카펫을 밟은 스타들이 개막식장으로 입장을 완료하고 나서 개막식을 진행할 사회자가 무대에 등장했다.
남성 진행자는 권현성. 요즘 방송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진행자다. 권현성과 맞춰 호흡을 맞출 진행자는 예린.
예린은 아이돌 출신 연기자로 최근 몇 년간 성장하고 있는 배우다. 예린은 아직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은 없지만 서브 주연급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중이다.
권현성과 예린이 팔짱을 낀 채 무대에 등장하자 객석에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는 권현성과 예린의 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리허설 때 약속된 행동이기도 했다.
권현성과 예린이 간단하게 인사말을 한 후 부성시장이 개막 선언을 위해 무대에 등장했다.
권현성이 부성시장을 향해 발언했다.
“이제 부성 국제 영화제는 개막을 선언하는 순서가 되겠습니다.”
권현성의 발언이 끝나자 부성시장 장우현이 개막을 선언했다.
“제30회 부성 국제 영화제 개막을 선언합니다!”
부성 국제 영화제 개막을 선언하는 장우현의 목소리엔 꽤 힘이 넘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개막 선언 멘트를 많이 연습한 듯했다. 장우현의 개막식 선언에 이어 아이돌 그룹의 축하 공연이 이어졌다.
아이돌 그룹의 힘겨운 노래가 부성 국제 영화제의 분위기를 한층 업 시켰다.
개막식은 리허설 때 했던 대로 큰 무리 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진행자 권현성은 대본에는 없지만 가끔 위트가 넘치는 애드리브를 날리면서 개막식의 분위기를 살려나갔다.
어느덧 개막식도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권현성이 진행을 위해 발언했다.
“이제 개막식도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막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는데 아쉽지요?”
권현성의 애드리브 발언에 객석에선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권현성이 방금 애드리브를 친 건 자료화면에 잠깐 문제가 있어서였다. 기술적인 문제로 권현성에게 잠깐 시간을 끌어줄 것을 연출자 박은호가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행사를 할 땐 준비한 자료가 말썽인 경우가 간혹 생기고 그에 대비해서 백업 본을 항상 준비한다. 박은호는 백업 본 자료를 잠깐 컴퓨터에서 돌려보았다. 백업 본은 문제없이 잘 재생이 되었다.
박은호가 권현성에게 지시했고 권현성은 자신의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박은호의 지시사항을 들었다.
“권현성 씨. 정상적으로 진행하세요. 문제 해결됐어요.”
객석의 웃음이 잦아들자 권현성의 발언이 이어졌다.
“자. 그럼. 오늘 하이라이트로 들어가겠습니다.”
“…….”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작에 진출한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권현성은 마지막 문장에서 힘을 주어 발언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도 센스라면 센스였다.
권현성은 그냥 억양 없이 말하는 것보다 마지막 부분에 힘을 주어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집중하게 했다. 즉 강약을 활용한 것이다.
강약의 활용. 말이 쉽지 이걸 현실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어쨌든 권현성은 부성 국제 영화제 같은 큰 무대에서 자기의 능력을 입증하고 있었다. 권현성의 멘트 이후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스크린이 펼쳐졌다.
펼쳐진 스크린 위로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한 작품들을 간략히 편집한 화면들이 펼쳐졌다.
박은호가 기획한 이 순서의 특징은 사회자의 멘트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보통 자료화면을 만들더라도 사회자가 그에 따른 멘트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개막식 연출자 박은호는 사회자의 멘트를 완전히 배제시켰다.
이 부분이 다소 리스크가 있는 게 아니냐고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에서도 몇 번 이의를 제기했었다. 하지만 박은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영상자료는 사회자의 멘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없다면 심심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도록 자료를 만들어오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에서 사회자의 멘트 없이 이뤄져야 그다음 순서에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박은호의 집요한 설득에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의 설득에 성공했고 지금처럼 사회자의 멘트 없이 경쟁 부분에 진출한 작품들을 자료화면만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
박은호가 만든 자료화면은 구성이 괜찮았다. 그래서인지 콘텐츠에 대한 몰입감이 상당했다.
자료화면이 나가는 동안 누구 하나 딴짓하거나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료화면이 다 나가자 객석에서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박수 소리가 잦아들어도 무대가 다시 환하게 밝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이건 사고라고 생각할 그 시점이었다.
아직 어두운 무대를 배경으로 사회자 권현성이 발언했다.
“여러분 이제 놀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권현성의 발언에 객석에서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놀랄 준비?”
그때였다.
-터벅. 터벅.
무대 위로 올라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두운 무대 때문에 아직 그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