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5화
한재영이 인사를 건네자 안주원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재영 피디님. 서태화 감독님에게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한재영은 방금 안주원이 한 발언이 절반 정도는 인사치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재영은 궁금했다. 태화가 안주원에게 자신을 어떻게 말했는지.
한재영이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된 건 안주원의 포지션과 상관이 있었다. 안주원은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 기획팀장이다.
당연히 이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한재영이 살짝 궁금한 표정으로 안주원에게 물었다.
“서 감독이. 저에 관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절친이면서 최고의 동료라고 말하더군요. 만약 한 피디님이 이번에 작품을 같이 하지 않았다면 이번과 같은 성과도 없었을 거라고요.”
한재영은 안주원의 말이 꽤 달콤하게 들렸다. 한재영은 슬쩍 시선을 태화에게 돌렸다.
‘태화라면 당연히 그렇게 이야기했을 거야.’
안주원이 한재영에게 말했다.
“어쨌든 저도 한 피디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저도 안 팀장님 직접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안주원은 한재영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감독님. 오늘 좀 불편하시겠지만,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주원이 이렇게 말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영화감독들은 창작자이고 그래서 자존심도 강하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리허설에 참석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들이 뭔가 동원된다는 느낌 때문이다.
“당연히 협조해야죠.”
“다른 감독님도 서 감독님 같았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꽤 참석하신 것 같은데요?”
태화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좌석 위치별로 참석자들 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올해는 예년에 비해서 양호한 편입니다. 특히 작년에는 감독님들이 리허설에 불참을 많이 하셔서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올해는 참여율이 높다니 어쨌든 다행입니다.”
“네. 감독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일 보십시오. 안 팀장님.”
안주원이 자리를 뜨고 나서 태화와 한재영이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입을 뗀 건 한재영이다.
“태화야. 고맙다.”
“뭐가?”
“나에 관한 소개 말이야.”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그리고 난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넌 당연한 거로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래. 간혹 사람 중엔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사람이 있거든.”
“네 말에 뼈가 있는 것 같다? 혹시 네 경험이냐?”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노코멘트.”
한재영은 태화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태화 군. 한재영이 자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한 건 아니지만 사실은 긍정의 답변이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영이 성격이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는 성격은 아니니까요.]
[한재영이 이전 작품에서 감독으로 함께 작품을 했던 신창우 감독은 자의식이 강했을 가능성이 크네.]
[그러고 보니. 신창우 감독의 그런 성향이 작품에도 그대로 담겼었잖아요.]
[자네 기억하는구먼.]
[네. 대사 중심의 영화의 특징.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겠죠.]
[그렇네. 신창우 감독은 자의식이 강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었을 거라네. 이러한 성향은 다른 스태프를 다소 낮춰 보는 경향으로 이어지곤 하네.]
[네. 영감님 말에 공감합니다.]
[때로는 당연한 말을 하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이 되어버리기도 하네. 과거 자네가 한재영을 안주원에게 소개한 내용이 그렇네. 자네는 사실대로 말한 것이지만 한재영에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세상이라는 게 참 웃기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네요.]
[그렇네. 그리고 그게 바로 사람이 사는 세상의 본질이기도 하네.]
#.
개막식 리허설이 다가오자 시민의 전당 홀로 입장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차 늘기 시작했다.
태화와 한재영은 자리에 앉아 속속 전당 홀로 입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한재영이 누군가를 보자 소리치듯 말했다.
“아니, 저 사람은?”
“왜. 누군데?”
“이정필 감독이야.”
“이정필 감독?”
“응. 독립 영화 쪽에선 꽤 유명한 감독이야.”
이정필 감독은 올해 40대 중반의 감독으로 독립 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었다. 그가 만든 작품은 독립 영화임에도 개봉하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정필 감독의 작품은 항상 사회의 소수자, 어두운 곳을 향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묵직했다. 그래서인지 이정필 감독은 나름대로 팬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태화와 한재영은 이정필 감독이 어디에 앉는지 시선을 좇았다.
이정필 감독은 본선 경쟁작에 진출한 작품의 감독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태화야.”
“왜?”
“이정필 감독. 어떻게 보면 너에게 강력한 경쟁자일지도 몰라.”
이번에 이정필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지렁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 속담에서 영감을 받은 제목이다.
“어차피 쉬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이야. 서태화. 자신감 빵빵한데?”
“자신감이 아니야.”
“그럼, 뭐야?”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거잖아.”
“하긴. 나도 태화, 네 생각과 똑같아. 뚜껑을 열기도 전에 미리 결론을 낼 필요는 없지.”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열려 있는 거잖아.”
“그렇지.”
잠시 후 개막식 연출을 맡은 연출가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성 국제 영화제 개, 폐막식 연출을 맡은 박은호입니다.”
박은호가 자기를 소개하자 객석에 앉아 있는 감독과 스태프들이 손뼉을 쳤다. 박은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저를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은호의 발언에 객석에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행사 연출자는 그 행사의 성격에 맞게 연출을 해야 한다. 특히 부성 국제 영화제처럼 영화 스태프가 참석하는 행사엔 다른 연출 방식이 필요하다.
일단 연출자의 발언이 지시적이거나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감독들은 튕겨 나간다. 이럴 땐 적절하게 유머를 구사하면서 연출을 해나가야 한다.
적절하게 유머를 구사하는 전략으로 보자면 박은호의 인사법은 괜찮은 출발이었다.
그때였다. 태화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혼잣말이지만 살짝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 신경 좀 쓰네.”
태화와 한재영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지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태화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 남자에게 물었다.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말이시죠?”
“아. 그거요.”
남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태화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기 무대 위에 있는 연출자. 박은호. 이 바닥에선 꽤 잘나가는 연출자입니다.”
태화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나가는 연출자요?”
“네. 저 박은호 연출자. 제법 굵직한 행사를 연출했던 사람입니다.”
“굵직한 행사요?”
“네. 일단 동네에서 노는 물은 아니라는 거죠.”
그 남자는 말을 하고 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얼굴을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요?”
“네. 웬 배우가 연기에 앉아 있나 했거든요. 이 자리는 배우의 자리가 아니잖아요.”
“아. 그러셨나요?”
태화는 그냥 이 남자와의 대화를 끝내도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화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박도봉 감독도 태화의 이런 심리를 눈치채고 있었다.
[태화 군. 저 남자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일세.]
[네. 무대 위의 저 연출자에 관해서 안다는 게 예사롭지 않아서요.]
[음. 자네의 생각에 동의하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이나 스태프가 저 연출자를 알기는 어렵네.]
[어렵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거 아닙니까?]
[뭐…….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네. 감독들이야 자기 세계에 빠져 사니까. 태화 군.]
[네.]
[자네가 흥미를 느낀다면 저 남자에 관해서 알아보게.]
[의외군요.]
[왜 의외라고 생각하는가?]
[영감님은 영화제에 집중하라고 할 거 같았거든요.]
[자네가 저 남자에 관해서 알아보는 것도 영화제에 집중하는 거라고 할 수 있네.]
[네? 그게 무슨…….]
[부성 국제 영화제에……. 그것도 리허설 현장에 그냥 앉아 있는 사람은 없네.]
[저도 영감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럼. 한번 알아보게나. 이럴 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안이 있네.]
[명심해야 할 사안이요?]
[그렇네. 질문은 직설적으로 나가게.]
[직설적이요?]
[그렇네. 괜히 빙빙 돌릴 필요 없네. 직설적으로 나가되 근거를 확실하게 대도록 하게.]
[다행이군요. 저도 빙빙 돌리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게 좋으니까요.]
태화가 바로 그 남자에게 질문했다.
“저기.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뭐. 그렇게 하세요. 또 궁금한 게 있나요?”
“네. 스태프 아니시죠?”
태화의 질문에 남자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개막식 연출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까지 아는 영화 스태프는 많지 않거든요. 그 정도로 무대 위에 있는 연출자를 안다는 건 그 분야 사람이거나 아니면…….”
남자의 표정이 놀람에서 흥미로 순간 바뀌었다.
“아니면요?”
“기자가 아닐까요?”
“…….”
“부성 국제 영화제에 기자가 취재를 오는 건 당연하잖아요.”
태화의 답변에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야. 추리가 제법 괜찮으시네요?”
“그럼. 기자가 맞는 겁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영화잡지 필름 포커스의 소정훈 기자입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찍었는데 맞았네요.”
“근데 정말 찍은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저는 오늘 기자님을 처음 봅니다. 어쩌면 찍는 게 당연하죠.”
“하하. 그렇게 되는 건가요?”
소정훈이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태화가 소정훈의 손을 맞잡았다.
“반갑습니다. 기자님.”
“아차. 근데 아직 전 그쪽이 누군지 모르는군요.”
“저도 제 소개하는 걸 깜빡했습니다. 저는 서태화라고 합니다.”
“서. 태. 화?”
“네. 영화 <내 복권 내놔!>의 감독입니다.”
소정훈은 태화에게서 <내 복권 내놔!>라는 영화 제목을 듣자 무언가 기억이 난 듯했다.
“아! <내 복권 내놔!>.”
“…….”
“제목이 독특해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소정훈의 말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내.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제목이죠.”
“어쨌든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아. 바쁘신 모양이군요.”
“그것도 있지만……. 이 자리가 제자리가 아니거든요. 그냥 비어 있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