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1화
최수빈은 웃어넘겼지만, 태화가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뭔가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엔 태화가 촬영을 진행하면서 보여주었던 능력 때문이었다. 실제로 <내 복권 내놔!>를 촬영하면서 수많은 고비가 찾아왔었다. 태화는 그때마다 위기를 잘 넘겼고 기어이 <내 복권 내놔!>를 완성했다.
‘태화가 그동안 해왔던 성과를 본다면…….’
최수빈은 태화를 슬쩍 쳐다보았다. 최수빈은 오늘따라 태화의 모습에서 듬직함을 느꼈다.
‘이번 영화제에서 한번 기대를 해보아도 좋을 거 같은 생각이 들어.’
태화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최수빈. 남은 기간 준비 잘해라.”
“준비? 뭐 할 게 있나?”
“남은 기간 운동도 좀 하고.”
“왜? 나 살쪄 보여?”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왜?”
“그냥. 긴장감 유지 차원에서 하면 좋을 거 같아서.”
“긴장감 유지 차원이라…….”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긴장감 유지라는 태화의 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다.
최수빈은 <내 복권 내놔!> 촬영이 끝나고 나서 한동안 느슨한 생활을 해왔다. 이제 다시 고삐를 잡을 시기가 온 것이다.
“태화.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내가 요즘 좀 느슨해지긴 했거든.”
“그래. 운동 열심히 하고. 대신 너무 무리하진 말고.”
“무리?”
“그래. 다이어트를 심하게 한다거나……. 그런 건 하지 말라고.”
“알았어.”
“그래. 들어가서 쉬어.”
“응. 너도 조심해서 돌아가.”
“그래.”
최수빈은 태화와 인사를 나누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최수빈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태화가 자신을 캐스팅하러 왔던 때가 떠올랐다. 자신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애교까지 부리던 태화의 모습.
최수빈은 그 모습이 떠오르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정말. 그때는 가능성 하나만 보고 뛰어들었는데…….’
#.
태화는 최수빈을 바래다주고 차량으로 이동 중이었다. 태화의 스마트폰으로 전화 연락이 왔다.
발신자는 바로 한재영이었다.
“어. 그래. 재영아.”
-일은 잘 끝났냐?
한재영은 오늘 최수빈이 선혜영과 만나는 일정을 알고 있었다. 한재영으로서는 그 결과를 알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잘 끝났어.”
-오, 정말이야? 다행이다.
“수빈이나 선혜영 님이나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남을 마무리했어. 네가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한재영은 태화가 선혜영을 부성 국제 영화제에 함께 데리고 가고 싶다는 말에 한편으로 환영했다. 한재영에게도 선혜영은 아픈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재영은 다른 한편으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화야. 네 생각에 나도 동감한다. 선혜영 님이 영화제에 같이 가는 건 아주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야.”
“알아. 네가 무슨 걱정이 있는지. 만약 선혜영 님이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거나 혹은 수빈이가 자존심이 상한다면……. 아마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거야. 혹시라도 수빈이가 감정이 상한다면 자칫…….”
“영화제를 망칠 수도 있겠지.”
“재영이 네 맘 알아.”
한재영은 부성 국제 영화제 본선 진출이 결정되고 나서 모든 사안이 조심스러웠다. 한재영은 요즘 상황이 깨지기 쉬운 유리 같았다. 태화도 한재영의 이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속에서 해야 한다고 하는 일을 안 할 수는 없어.”
한재영은 태화의 생각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태화. 너 자신 있어?”
“뭐가?”
“수빈이 설득할 자신이 있냐고?”
한재영이 태화에게 이런 질문을 한 건 최수빈이 바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최수빈이 못하겠다고 하면 솔직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해봐야지. 전에 수빈이 캐스팅할 때 애교도 부렸는데……. 뭘 못하겠냐?”
“하긴. 못 할 게 없지.”
어쨌든 태화는 한재영의 염려와 달리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했다. 한재영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리고 너무 기뻤다.
-태화야. 이거.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
“왜? 맥주 생각나냐?”
-넌 생각 안 나?
“당연히 나지. 재영아. 한강에서 보자.”
-오케이.
#.
태화는 약속 시간에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태화와 한재영은 한강 공원에서 보자고 하면 항상 만나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성산대교 아래다.
태화는 성산대교 아래 있는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는 한재영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가 한재영을 불렀다.
“재영아!”
한재영은 태화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한재영은 태화와 시선이 마주치자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재영은 태화가 가까이 다가오자 물었다.
“차는?”
“아까 근처에 왔는데 시간이 좀 남더라고. 그래서 차는 집에다 두고 왔지.”
“잘했다.”
태화는 한재영과 인사를 하고 나서 자기의 코로 스며드는 냄새에 신경을 빼앗겼다. 태화가 그 냄새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벤치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벤치에는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와 비닐봉지에 쌓여 있는 뭔가가 놓여있었다.
“야. 근데 벤치 위에 있는 거 뭐야? 구수한 냄새가 나는데…….”
“오다가 시장에 들러서 치킨 좀 샀지.”
“아. 그 집 치킨 아주 맛이 죽이지. 식감도 아주 바삭하고.”
“그러니까.”
태화와 한재영은 그 시장표 치킨 단골손님이었다. 그 치킨은 다른 곳에선 맛볼 수 없는 바삭함과 적당한 간이 배 있기 때문이었다. 치킨에 밴 간은 살짝 짰는데 그래서 오히려 맥주 안주로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한번 맛보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맛이지.”
“그렇지.”
태화와 한재영은 성산대교 아래 벤치에 앉았다. 때마침 풍경이 참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도로는 막 퇴근을 재촉하는 차량으로 채워져 가고 있었고 서쪽으로 지는 해로 인해 하늘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차량들의 헤드라이트와 저녁노을이 합쳐져 한강 특유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강의 풍경을 본 태화가 입을 뗐다.
“이 모습 참. 아름답지 않냐?”
“응, 아름답다. 그런데 너 되게 오랜만인 거 알아?”
“뭐가?”
“한강의 이 풍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 거 말이야.”
“내가 그랬나?”
“응. 그건 내가 잘 알아.”
“…….”
“태화. 너 한동안 이 풍경이 슬프다고 했었어. 이 세상에서 자신만 버림받은 것 같다고 했었지.”
태화는 한재영의 말을 듣고서 피식 웃었다.
“내가 그랬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일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어. 한마디로 세상에 대한 원망이었지.”
태화의 대답을 들은 한재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니냐?”
“뭐. 사실이잖아. 내가 인정 안 한다고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오. 서태화. 쿨한데?”
한재영은 태화에게 편의점에서 사 온 캔맥주를 건넸다. 그런 후 한재영은 자신이 시장에서 사 온 치킨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치킨의 포장이 뜯기자 구수한 냄새가 확 올라왔다.
태화는 치킨의 냄새를 맡고서 감탄을 연발했다.
“야. 이거 냄새가 더 좋아진 거 같은데?”
“좀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빨리 한잔하자. 그래야 치킨도 먹지.”
“오케이.”
태화와 한재영은 각자 손에 든 캔맥주를 살짝 부딪친 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태화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발언했다.
“오늘따라 맥주가 잘 넘어간다.”
“너도 그러냐? 나도 그랬는데. 크크.”
태화와 한재영은 치킨 한 조각씩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각자의 입에 들어간 치킨은 바삭하게 씹혔다.
“태화야. 치킨 바삭하지 않냐?”
“응. 정말 맛있는데?”
“오늘 운이 좀 좋았어.”
“운이 좋아?”
“응. 내가 사 온 치킨 있잖아. 주인아저씨가 기름을 갈고 바로 튀긴 거였거든.”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 시간을 알고 간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근데 태화야.”
“왜?”
“정말 고맙다.”
“뭐가?”
“솔직히 부성 국제 영화제 정도의 영화제에 게스트로 가는 거 쉽지 않거든.”
“뭘 또 그런 걸 가지고.”
태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한재영은 태화와 달리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평생 영화를 해도 부성 국제 영화제 게스트로 못 가는 영화인들도 많아. 그런 점에서 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 정도야? 넌 극장 개봉작에 참여도 했었는데?”
태화의 질문에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솔직히 저번에 극장에 개봉했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은 그렇게 큰 감흥은 없었어.”
“네 포지션 때문에?”
“그래. 그 작품에선 내 포지션은 연출부원이었어. 어찌 보면 그냥 묻어간 것일지도 몰라.”
한재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캔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내 복권 내놔!>는 내 프로듀서 입봉작이기도 해. 난 더는 묻어가는 그런 위치가 아니야. 그런데 이런 초저예산 영화가…. 처음에 완성이 될까도 의심스러웠던 그 작품이 지금 부성 국제 영화제 본선에 올랐어.”
“그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지.”
태화는 발언하고 나서 캔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발언했다.
“솔직히 태화 네가 이제 배우 관두고 영화감독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내가 연기가 아닌 다른 삶을 살 거로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연기는 내 미련이었던 거 같아.”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나도 편하게 말해도 될 거 같다. 태화 넌 연기보다는 감독이 맞는 거 같다. 네가 감독이 되기로 하고 나서 성과가 나기 시작한 거니까.”
태화는 한재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영이 네 말이 맞는다. 나도 일을 진행하면서 너처럼 생각했어. 정말 나는 연기가 아니라 감독이 맞는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꾸기로 한 거야? 솔직히 계속 궁금했었거든. 학부 시절에도 태화 넌 연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잖아.”
한재영의 궁금증은 태화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내 인생의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태화의 대답에 한재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랬었어? 언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뭐?”
“넌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이야. 그냥 머릿속에서……. 영화감독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정말이야?”
“야. 솔직히 나 오디션 볼 때 나를 바라봤던 감독들의 시선. 짜증이 났었거든.”
“그래서 너도 한번 감독이 돼서 그렇게 하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