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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60화 (155/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0화

태화는 최수빈의 반응을 살폈다. 최수빈은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태화 군. 최수빈은 자네의 말에 수긍했을 거네. 왜 그런지 아는가?]

[글쎄요.]

[자네의 말에는 최수빈에게 희생하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네.]

[…….]

[최수빈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네. 자네가 만약 최수빈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듯한 뉘앙스만 풍겼어도 최수빈은 어긋날 수 있었네.]

박도봉 감독의 지적은 정확했다. 최수빈이 태화가 의도한 대로 마음을 돌리기 시작한 건 최수빈이 촬영 마지막 날 선혜영이 했던 연기를 자신이 똑같이 따라 한 걸 태화가 언급하면서부터다.

[그렇더라도 부성 국제 영화제 불참이라는 카드를 꺼내지는 않았겠죠.]

[그렇네. 최수빈은 부성 국제 영화제 불참이라는 최악의 카드는 꺼내지 않았을 거네. 그렇게 하게 되면 자신에게 너무나 큰 타격이 되니까. 하지만 영화제 기간 한 팀이 아니라 홀로 튀어나갈 수도 있네. 그렇게 된다면…….]

[작품의 감독과 여배우가 불화를 겪는 거고……. 그건 엄청난 손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그렇네. 하지만 자네는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네. 자네가 최수빈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설득에 성공했으니 말일세.]

한동안 잠자코 있던 최수빈이 입을 열었다.

“서태화. 네가 생각하는 대로 가자.”

“수빈아. 고맙다.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서태화.”

“왜?”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했었던 행동 말이야.”

“선혜영 님 연기를 따라 했던 네 행동 말하는 거야?”

“응. 오늘을 위해서였던 거 같아.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상하지 못했지만…….”

최수빈의 말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언했다.

“내가 보기에 당시 넌 어떤 대가를 바라고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었어.”

“…….”

“당시 수빈이 네 의도는 너무 순수했어. 안타까운 여배우를 위한 행동이었지. 너의 그 순수한 의도가 우리 영화의 외적 서사를 만들어낸 거야.”

태화의 칭찬에 최수빈은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근데 너한테 하나 물어봐도 돼?”

“뭘?”

“진짜 너 무슨 말 잘하게 하는 학원 다니거나 그러는 거 아냐?”

최수빈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태화도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 그런 학원에 다닌 적 없어.”

“그래? 그런데 네가 지금처럼 말을 그렇게 잘했었나?”

“글쎄. 말을 잘하는 건지 잘은 모르겠고……. 그냥 수빈이 너에게는 진심으로 말했을 뿐이야.”

#.

선혜영은 최수빈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 님. 고마워요.”

“뭘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해하실 필요 없어요. 솔직히 그때 사고가 나고 병원에 갔을 때 <내 복권 내놔!>라는 작품과는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선혜영이 정원석에게 시선을 한 번 준 후 다시 발언했다.

“물론 원석 오빠가 계속 작품에 참여했지만……. 저는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선혜영은 말을 마치고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선혜영은 말을 마치고 훌쩍거렸다. 정원석은 옆에서 그런 선혜영을 챙겼다.

“혜영아. 이렇게 좋은 날 왜 울고 그래.”

“나야, 좋아서 그런 거지.”

태화는 선혜영을 통해서 좋아서 눈물을 흘린다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태화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최수빈도 선혜영을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수빈에겐 선혜영의 모습 자체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선혜영의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태화가 발언했다.

“선혜영 님.”

“네. 감독님.”

“최수빈 님이 선혜영 님에게 할 말이 있답니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넘겼다. 태화가 그렇게 한 건 최수빈과 이곳에 오기 전에 조율이 된 결과다.

“수빈아. 네가 선혜영 님에게 제안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정말 그럴까? 감독인 네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 그렇지 않아. 너는 선혜영 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야.”

“특별한 의미?”

“그래. 너는 선혜영 님의 배역을 이어받은 사람이야. 선혜영 님에겐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어. 최수빈.”

“왜?”

“난 처음에 운만 뗄 거야. 결론은 최수빈 네가 지어줘.”

최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수빈은 만약 자신이 선혜영이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에 집중했다.

‘내가 선혜영 님이라도 자기의 뒤를 이어서 배역을 소화해 준 연기자한테 이야기를 듣고 싶을 거 같아. 배역으로 이어진 관계라는 게 있으니까.’

연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배역이다. 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치열한 공개 오디션도 보는 것이고 경제력이 있는 연예기획사는 로비를 벌이기도 한다.

‘게다가 선혜영 님은 감독인 태화와 무슨 불화가 생겨서 중도 하차한 것도 아니다. 그냥 사고가 나서 그렇게 된 것뿐이야. 즉 선혜영 님은 악감정이 없어. 그 말은 내가 선혜영 님에게 제안해도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해. 내가 태화의 제안을 굳이 거부할 명분이 없어.’

태화의 발언에 선혜영과 정원석의 시선이 최수빈에게 향했다. 최수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선혜영 님. 이번 부성 국제 영화제에 함께 가요. 부탁드립니다.”

최수빈은 발언하고 나서 선혜영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선혜영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는 최수빈을 보자 바로 손사래를 쳤다.

“최수빈 님. 그러지 마세요. 그러시면 제가 미안해요.”

“미안하게 생각하실 거 없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선혜영 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겁니다.”

당황한 건 선혜영뿐만이 아니었다. 선혜영의 옆에 있었던 정원석도 당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황한 건 태화였다. 태화는 최수빈이 선혜영에게 허리를 숙일 것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영감님. 수빈이가 선혜영에게 허리를 숙이다니요. 이거 의외인데요?]

[나도 솔직히 놀랐네. 최수빈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 줄은 몰랐네. 내가 볼 때 최수빈의 저 행동은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이라고 볼 수 있네.]

[즉흥적이라…….]

[그렇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쨌든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존재일세.]

[결국 수빈이도 지금 이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최수빈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네와 선혜영의 관계가 우호적이라는 걸 알게 된 게 첫 번째 이유네. 감독과 배우는 가깝고도 먼 사이거든. 하지만 자네와 선혜영이 서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자 최수빈도 태도가 바뀐 거로 볼 수 있네.]

[하긴 수빈이는 오늘 저와 선혜영이 대화를 나누는 걸 처음 보는 거잖아요.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수빈이는 분위기에 적응한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네. 하지만 최수빈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 거네.]

[네. 자기의 역할을 확실히 한 거죠. 존재감도 과시하고요.]

[그렇네.]

최수빈이 선혜영에 허리를 숙인 건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최수빈이 허리를 숙여가면서 정중히 부탁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선혜영은 기분 좋게 태화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감독님. 그리고 최수빈 님.”

태화와 최수빈은 선혜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혜영이 옆에 앉아있는 정원석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원석 오빠가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저한테 말했었거든요. 감독님은 나를 잊지 않고 있다고……. 그런데 오늘 최수빈 님까지 이렇게 저를 대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감독님과 최수빈 님의 제안. 정말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선혜영의 대답에 태화와 최수빈 모두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기쁜 사람은 정원석이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연인, 선혜영이 뭔가 대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

태화와 최수빈은 정원석과 선혜영과의 미팅을 끝마치고 카페를 나왔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특별히 갈 데 있어?”

“왜?”

“특별히 갈 데 없으면 바래다주려고.”

“오. 서태화 제법인데?”

태화는 오늘 집에서 나올 때 차를 끌고 나왔다. 태화가 끌고 나온 차는 SUV 차량이다.

태화는 카페에 주차 공간이 부족해서 근처 공영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태화와 최수빈은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까지 걸었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물었다.

“솔직히 나 수빈이 너한테 놀랐다.”

“놀라? 왜?”

“나는 네가 선혜영 님에게 허리를 숙일 줄은 몰랐거든.”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네가 성질내지 않고 넘어가기를 바랐는데…….”

“뭐? 내가 성질을 왜 내냐?”

“그야. 넌 자존심이 세니까. 솔직히 내가 너에게 부탁할 때도 살짝 불안하긴 했었거든.”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그냥…….”

“그냥?”

“그래. 그냥.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선혜영 님. 직접 보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겠더라고.”

“어쨌든 고맙다. 수빈이 네가 정중하게 제안해서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어.”

“…….”

“솔직히 선혜영 님이 동정심 때문에 그런 거로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거였는데……. 수빈이 네가 정중하게 부탁하는 모양새가 되니 선혜영 님도 자신을 동정해서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었어.”

“하긴 나라도 동정심이 느껴졌다면 아마……. 자존심에 발동이 걸렸을 거야.”

“어쨌든 수빈이 네 덕에 큰 산을 넘은 느낌이야. 고맙다.”

“서태화.”

“왜?”

“나한테 고마움을 느끼는 건 좋지만, 꼭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늘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냐.”

“…….”

“나도 <내 복권 내놔!>의 투자자잖아. 투자자로서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태화는 최수빈의 대답을 듣고 나서 피식 웃음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투자자님.”

태화와 최수빈이 대화하면서 걸어가는 사이 두 사람은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수빈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차 빼서 내올 테니까.”

“알았어.”

#.

태화와 최수빈이 탄 차량이 최수빈의 집 앞에 도착했다. 태화와 최수빈이 차에서 내렸다.

최수빈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으로 향했다.

“최수빈.”

“왜? 고맙다고 말하려고?”

태화는 최수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해야지.”

“지나간 이야기?”

“그래. 이제는 앞으로가 중요하잖아.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성과를 내야지. 안 그래?”

태화의 말에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태화, 네 말이 맞아. 근데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최수빈의 질문에 태화는 고개를 저었다.

“계획보다는 일단 부딪혀 보는 거라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태화의 발언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긴. 너나 나나. 가끔 영화제에 놀러 가긴 했지만 게스트 자격으로 가는 건 처음이잖아.”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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