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59화
태화는 말을 하고 나서 최수빈의 표정을 살폈다. 최수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최수빈으로선 그럴 만했다. 최수빈은 <내 복권 내놔!>가 부성 국제 영화제 본선에 진출할 걸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수빈이 태화를 보며 물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다고?”
“그래. 못 믿겠다면 나중에라도 계약서 보여줄게.”
“아…. 아냐. 그럴 필요까지야.”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태화의 말투와 표정이 너무나 자신감에 넘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화가 최수빈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결과잖아. 부성 국제 영화제라면 인지도나 평판에서도 나쁘지 않아. 극장에 제대로 홍보도 못 하고 걸리는 것보다 차라리 부성 국제 영화제 같은 곳에서 성과가 난다면….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그래도 최수빈은 태화에게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만큼 최수빈은 지금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너 이거….”
“장난 아니냐고?”
최수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는 최수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최수빈 자신의 첫 주연작이니만큼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내가 정말 이런 걸로 장난친다면 난 사람도 아니지. 안 그래?”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정말 이런 걸로 장난친다면 넌 사람도 아니지.”
“수빈아. 내가 말했잖아.”
“뭘?”
“너 분명 뻘쭘해질 거라고.”
태화의 농담에 최수빈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그래. 태화, 네 말처럼 좀 뻘쭘하네. 그러게 빨리 말하지. 쫌!”
태화가 아무 말 없이 있자 최수빈은 더 뻘쭘함을 느꼈다.
“네가 자꾸 시간 끌고 뜸 들이고 그러니까…. 내가 그런 거 아냐.”
최수빈은 태화에게 슬쩍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태화는 이런 최수빈의 모습이 밉지 않았다.
태화는 오히려 최수빈의 이런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솔직히 태화는 최수빈의 이런 모습을 볼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태화와 최수빈은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캐스팅을 위해 애교를 부리곤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 성격이었다.
태화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네가 이렇게 놀라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큰일을 한 거 같다.”
“그건 맞는데….”
“오. 웬일로 순순히 인정을 다 하네.”
최수빈이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발언했다.
“성과를 낸 건 분명하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부성 국제 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는 거.”
“그렇지. 그리고 이 소식 말이야. 정원석 님보다 네가 더 빨리 알게 되는 거다.”
태화의 발언에 최수빈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정원석 님은 며칠 후에 볼 거야. 그전에 너에게 이 소식 전한 거고.”
태화의 발언에 최수빈의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흠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행동 했네.”
최수빈은 태화가 정원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여주로서 대우를 해주었지만, 최수빈은 그 대우가 정원석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태화로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원석이 만약 태화의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내 복권 내놔!>는 제작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태화는 기뻐하는 최수빈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부담감이 밀려왔다. 태화가 정원석보다 먼저 최수빈을 만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감님. 수빈이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다소 마음이 안 좋습니다.]
[자네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네.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 사람한테 말하기가 힘들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감독은, 리더는 결단했다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하네.]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끈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네.]
태화는 결심이 서자 시간을 끌지 않았다.
“수빈아.”
“왜?”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부탁? 뭔데?”
“다른 게 아니라 난 이번 <내 복권 내놔!> GV 행사에 선혜영 님을 데려가려고 해.”
태화의 말에 최수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말 그대로야. 선혜영 님. 부성 국제 영화제 GV 행사에 게스트로 데려가려고 해. 그러려면 현재 여주인 너의 양해가 필요해.”
“그런 거였어?”
“뭐가?”
“날 정원석 님보다 먼저 만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태화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맞아. 원래는 너하고 정원석 님 그리고 선혜영 님을 같이 만나려고 했었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너에게 제안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더라고.”
선혜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태화도 최수빈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언뜻 생각해 보면 태화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 것이기에 최수빈도 흔쾌히 동의할 것 같지만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특히 대중들의 관심을 갈망하는 여배우의 경우 자기 외에 누군가가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것에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게다가 선혜영은 관객들의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한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작품의 원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지만, 첫 촬영 때 불의의 사고로 여주에서 하차한 비련의 여배우!
최수빈의 머릿속은 순간 여러 생각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관객들의 관심이 선혜영의 등장과 함께 그녀에게 가버리게 될 게 뻔했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거지? 내가 <내 복권 내놔!>의 여주라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만큼 관객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죽 쑤어서 개 주는 꼴 되는 거 아냐?’
태화는 최수빈의 반응을 살폈다. 최수빈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태화 군.]
[네. 영감님.]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결국 최수빈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걸세.]
[저도 그렇게 할 거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최수빈에게 이 판단을 맡기기보다는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아까도 말했죠.]
선혜영을 부성 국제 영화제 GV 행사에 참여시키자고 결단한 건 태화다. 그래서 태화는 최수빈을 만나기 전 박도봉 감독과 이 부분에 관해서 상의했었다. 박도봉 감독은 말을 아꼈다.
박도봉 감독은 대신 태화에게 최수빈의 반응을 보고서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태화도 박도봉 감독의 의견에 동의했다.
태화가 최수빈에게 선혜영 관련 제안을 했을 때 어떻게 나올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네. 최수빈은 누가 뭐라고 해도<내 복권 내놔!>의 헤로인이네. 하지만 GV 행사에서 선혜영의 등장하게 되면 최수빈은 자신의 독점적인 지위가 흔들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될 걸 염려하고 있네.]
[영감님 말이 맞습니다. 결국 수빈이가 내 제안을 수락하게 하려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있어야겠죠.]
[그렇네. 그게 바로 자네가 해야 할 역할이네. 바로 리더의 역할이지. 리더란 자기의 조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독려하는 인물이네.]
얼마 후 침묵으로 일관하던 최수빈이 입을 뗐다.
“서태화.”
“왜?”
“넌 내가 네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알고 말한 거지?”
최수빈의 발언처럼 그녀는 태화의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내 복권 내놔!>의 여주로서 부성 국제 영화제 GV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건 최수빈으로선 당연한 일이다. 태화의 제안이 최수빈 자신에게 불리한 제안이어도 말이다.
태화가 최수빈의 물음에 대답했다.
“수빈이 네 생각도 어느 정도 맞아.”
“어느 정도? 전부가 아니고?”
“난 내 제안이 너에게 손해만은 아니라고 판단했어.”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손해만은 아니라니….”
태화는 최수빈에게 말하기 전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최수빈 넌 벌써 잊은 거냐?”
“잊어? 내가 뭘?”
“너 마지막 촬영하는 날 말이야. 너는 선혜영 님을 위해서 그녀가 했던 연기를 일부러 똑같이 따라 하기까지 했어.”
“그거야….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것과 네 제안이 무슨 상관이지?”
“처음엔 선혜영 님에게 관객들의 관심이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마지막 촬영 날 했던 네가 했던 연기가 관객들에게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
“아마도 관객들은 최수빈 너에게 찬사를 보내게 될 거야.”
“…….”
“첫 촬영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한 여배우를 위해서 그녀의 연기를 따라 하다. 최수빈.”
태화의 발언에 최수빈의 눈빛이 순간 빛났다. 태화도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관객들의 관심이 선혜영에게만 쏠리지 않게 될 거야.”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계속해서 최수빈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태화가 보기에 최수빈은 태화의 제안이 자신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최수빈은 태화가 이야기하는 동안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빈이 넌 통이 큰 여배우이면서 인간적인 여배우로 관객들에게 알려지는 거지.”
“…….”
“수빈이 너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솔직히 난 수빈이 네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나 없었으면 <내 복권 내놔!>완성이나 됐겠어?”
“그렇지. 하지만 내가 너한테 고맙다고 한 건 단지 그게 다가 아냐.”
“그게 다가 아니다?”
“그래. 수빈이 네가 이 작품에 참여해서 우리 영화는 서사를 만든 거야.”
“서사를 만들어?”
“그래. 네가 다시 <내 복권 내놔!>에 참여하기로 했을 때 내가 너에게 했던 선물 기억나?”
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네가 나한테 파란 장미를 선물했었지.”
“파란 장미의 꽃말은?”
“기적이잖아.”
“그래. 네가 작품에 참여하면서 어찌 보면 기적이 완성되어 간 거야. 그 서사의 중심에 네가 있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리고 아직 우리 영화의 서사는 끝나지 않았어.”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서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 부성 국제 영화제 본선 진출했잖아. 아직 만들 수 있는 서사가 있어.”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 최수빈의 얼굴은 옅은 홍조를 드러냈다. 이건 최수빈이 흥분했기 때문이었다.
“서태화.”
“왜?”
“정말 네 말대로 될까?”
“뭐가?”
“정말 네 말대로 우리 영화에 서사가 만들어질까?”
“아마도.”
최수빈은 알고 있었다. 영화제에서 성과가 났던 작품들은 작품 외적인 측면에서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서사가 있었다는 걸.
<내 복권 내놔!>는 영화 외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서사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