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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53화 (175/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53화

태화가 웃으며 박도봉 감독에게 말했다.

[크크크. 면접관의 표정에서 얻은 결론입니까? 관상학도 아니고. 이건 표정학으로 불러야 하는 겁니까?]

[뭐.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결과이니 말일세.]

[그래서 그 결과는 뭡니까?]

태화의 질문에 박도봉 감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꽤 길었다.

박도봉 감독의 이러한 태도에 태화는 당연히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 왜 아무런 말이 없으세요?]

[아. 미안하네. 잠시 생각하느라 그랬네.]

[무슨 생각이요?]

[혹시라도 내가 놓친 게 있는지 다시 복기를 해보았네.]

[혹시라도 망신당할까 그런 겁니까?]

[지금 망신당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태화 군. 자네한테 망신당하는 건데.]

[그래서 이제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그렇네. 태화 군. 자네는 자네의 입봉작 <내 복권 내놔!>와 함께 부성 국제 영화제에 가게 될 걸세.]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만약 영감님이 내린 결론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말일세.]

[자신만만하시군요.]

[내가 놓친 부분을 복기해 보니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네.]

[도대체 뭘 복기하신 겁니까?]

[오늘 면접은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위한 면접이었네. 부성 국제 영화제 출품작 예심을 담당하는 면접관 정도면 대충 면접을 보지 않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방금 한 발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공모전의 면접도 그랬잖아요.]

[지난번 공모전의 면접과 비슷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네.]

[다르다고요?]

[그렇네. 지난 공모전의 면접은 어떻게 보면 자네의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봤지만, 이번 면접은 그렇지 않네.]

[네. 작품이라는 결과물이 나온 상태니까요.]

[그렇네. 면접관들은 자네를 선정하면서 아마도 면접의 콘셉트를 정해서 왔을 것이네.]

[면접의 콘셉트요?]

[그렇네. 면접관들끼리 토론을 통해서 자네의 면접은 아마도 검증 중심으로 가자고 합의를 보았을 거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음. 실제로 그렇게 했잖아요.]

[그렇네. 자네의 검증으로 면접의 무게 중심이 옮겨진 건 작품 자체가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해도 괜찮다는 판단이 설 정도로 괜찮았다는 의미네. 게다가 자네는 면접관들이 준비해 온 질문에 아주 잘 답변했네. 특히 면접관들은 자네의 답변에 흥미를 느꼈네. 그건 그들의 표정에 잘 나왔으니까…….]

[……….]

[때론 비언어적인 행위가 언어적인 행위보다 진실을 말할 때가 많네.]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네. 사람의 표정이라는 행위도 그 비언어적인 행위의 하나일세. 특히 면접관이 굳이 흥미롭지 않은데 흥미로운 표정을 자네를 향해 지을 필요가 없었네.]

[그렇긴 하네요. 제가 뭐라고. 제가 무슨 지명도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네와 <내 복권 내놔!>는 부성 국제 영화제로 가게 될 것이네.]

[영감님이 내린 결론 믿어도 됩니까?]

[믿어도 되네.]

순간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감님 말을 들으니 어쨌든 심적으로 위안이 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영감님 말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전 영감님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원망하지 않는다?]

[네. 솔직히 <내 복권 내놔!>를 연출하면서 행복했던 게 사실이니까요. 모든 걸 떠나서 제 인생에서 이런 시기는 없었습니다.]

태화가 방금 박도봉 감독에게 한 말은 진실이었다. 태화가 <내 복권 내놔!>작품을 제작하면서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자기를 신뢰하고 따라주었다. 태화 자신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신뢰받아 본 경험이 그의 인생에서 일찍이 없었다. 태화가 <내 복권 내놔!>를 연출하면서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지만 그걸 뚫고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사람들이 태화에게 보내 주었던 신뢰 때문이었다.

[자넨 결과와 상관없이 값진 경험으로 만족한다는 말인 건가?]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해야죠.]

태화는 자기도 모르게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나쁜 면접 결과가 나왔을 때 심리적 충격을 덜 받기 위해서다.

기대감을 잔뜩 가지고 있다가 혹시라도 자기의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면 그 충격은 엄청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화의 이런 방어기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박도봉 감독도 태화의 이런 심리를 알고 있었다.

[영감님. 만약 다시 처음부터 도전해야 한다면…….]

[도전해야 한다면……?]

[전 기꺼이 다시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난 자네가 방금 한 말을 믿어 의심치 않네.]

[이젠 정말 영화감독이라는 일이 재미가 있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태화 군. 그 생각은 일단 접어놓게나.]

[네?]

[벌써 안 될 걸 예상할 필요는 없으니 말일세. 그리고 내가 예측한 대로 될 테니 더욱 그럴 필요 없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이 정도로 자기의 예측을 확신한다면 믿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태화의 스마트폰의 벨이 울렸다. 태화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바로 한재영이었다.

원래는 면접이 끝나면 태화가 바로 연락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태화는 한재영에게 연락하기로 한 걸 깜빡했다.

“어. 그래 재영아.”

-태화야. 어떻게 된 거야? 면접은 잘 본 거야?

한재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면접이 아닌 사안이었다면 한재영은 먼저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재영은 그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정말이야?

“그래. 그냥 차분하게 기다려 보자.”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너 면접 망치고 뭐 하나 했다.

“미안하다. 내가 연락했어야 했는데…….”

-아니. 됐어. 면접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뭐. 하여튼 조심해서 올라와라.

“그래. 걱정하지 마. 근데 나 지금 바닷가야.”

-뭐? 바닷가? 그래서 전화 제때 연락 못 한 거였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너 따라가는 건데. 간 김에 회도 좀 먹고. 나도 바다 좀 보고 싶었는데.

한재영의 목소리엔 진한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오늘은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가장 좋은 건 부성 국제 영화제 출품작에 선정된 후에 회 먹으러 가는 건데…….

“그렇게만 된다면 최고지.”

-어쨌든 조심해서 올라와라.

“그래.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솔직히 나 걱정 안 해.

“걱정 안 한다고?”

-너 혼자 부성시에 가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

“많은 생각?”

-그래. 그런데 결론은 하나로 모이더라고.

“그래서 결론이 뭔데?”

-너나 나나 그동안 열심히 했잖아. 그래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아직 우리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보면 한재영도 태화처럼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한재영은 태화 다음으로 작품에 책임을 져야 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그렇기에 태화 못지않게 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재영아.”

-왜?

“우리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실망하지는 말자.”

한재영은 이 순간 느꼈다. 태화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그리고 한재영의 마음 한편엔 미안한 마음이 갑자기 올라왔다.

‘아. 내가 조금만 더 잘할걸…….’

사람은 항상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쉬워하게 마련이다. 한재영의 심정도 그랬다.

-그래. 태화야. 그렇게 하자. 우리 실망하지 말자. 절대로…….

#.

태화가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에서 면접을 보고 보름의 시간이 지났다. 이날은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은 경쟁 부분 최종 합격 작품을 발표하는 날이다.

[태화 군. 오늘이지?]

[네. 영감님. 제가 면접을 본 날에서 보름 후에 최종 합격 작품이 발표하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태화는 오늘 자전거를 타고 한강 자전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태화는 차분하게 최종 결과를 기다릴까 하다가 집을 나섰다.

[어떤가 기분이?]

[자전거를 타니까 기분은 좋네요. 오늘따라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경치도 좋고요.]

[그렇군. 자네 말대로 오늘 경치가 남다르게 좋구먼.]

태화는 한강대교 북단을 지나는 위치에서 잠시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태화가 자전거를 멈춘 건 자신의 스마트폰이 울렸기 때문이다.

태화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태화는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태화는 전화번호를 보자 바로 감이 왔다.

[영감님. 연락이 온 거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구먼. 받아 보게나.]

[네.]

태화는 크게 숨을 쉬었다. 그런 후 태화는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기. 서태화 감독님 연락처 맞죠?

“네. 그렇습니다. 혹시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인가요?”

태화는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자신을 서태화 감독님이라고 지칭하는 걸 듣고서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인 걸 알아챘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연락을 드린 건 저번에 면접 보셨던 결과 때문입니다.

태화는 순간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불과 몇 초 후면 태화에게 결과가 통보된다. 이럴 때 보통 연락이 오는 건 긍정적인 결과일 때이다. 하지만 부성 국제 영화제는 사무국은 면접을 봤던 작품에 한해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통보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이러한 원칙은 인지도가 꽤 높은 부성 국제 영화제로선 당연히 취해야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어쨌든 태화는 이 결과에 따라 앞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탈락이 된다면 태화는 우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록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되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현실화가 되는 건 다른 문제다.

보통 부정적인 결과가 현실화하였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데에만 꽤 시간이 걸린다.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도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태화가 긍정적인 통보를 받게 된다면 커다란 기쁨과 함께 다음 단계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태화가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의 결과 통보를 기다린 시간은 정말 몇 초간의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태화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태화에겐 이 순간 느꼈던 긴장감은 마치 몇 년 치를 합친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로 사무국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태화 감독님이 연출하신 <내 복권 내놔!>는 올해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에 출품하게 되었습니다.

“출품하게 되었다고요? 그럼. <내 복권 내놔!> 작품이 예심을 통과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예심을 통과하고 영화제 본선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서태화 감독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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