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52화
태화의 질문에 박도봉 감독이 대답했다.
[내가 면접관이라면 자네를 검증하는 데 주력할 것이네.]
[검증이요?]
[그렇네. 분명 자네의 이력은 상당히 매력적이네. 전에 영화계에서 본 적도 없고 흔적도 없었던 인물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니 말일세.]
[이력이 매력적인데 검증한다? 좀 모순 아닙니까?]
[언 듯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결코 모순적 관계가 아니네.]
[모순이 아니다?]
[그렇네. 매력적인 이력이기에 더욱 검증이 필요한 것이네. 특히 부성 국제 영화제는 대내외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영화제이네. 그 말은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파급력도 꽤 강할 수밖에 없네.]
[영감님 설명을 들으면 그 검증이란 게 나쁜 것만은 아니군요.]
[그렇네. 그만큼 자네에게 관심이 크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자네의 대답은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네.]
[정확하고 구체적이요?]
[그렇네.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면접관도 자네를 인정하게 될 것일세.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답변한다는 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해야 할 수 있는 것이네.]
[결국 애매모호한 대답은 안 된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애매모호한 대답은 지금 상황에선 도움이 되지 않네. 특히 자네처럼 이력이 전무한 경우엔 더욱 그렇네.]
[하지만 이미 질문 자체가 포괄적이면서 애매한데요?]
[여기서 대답의 스킬이 필요한 것이네.]
[대답의 스킬이요?]
[그렇네. 자네가 대답을 주도해 나가야 하네.]
[내가 주도해 나간다?]
[그렇네. 솔직히 자네가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죠. 이미 전 <내 복권 내놔!>를 만들 때 시나리오부터 시작해서 모든 제작 과정에 관여했습니다. 직접 몸으로 부대끼면서 말이죠.]
[바로 그걸 말하면 되네. 하지만 시나리오를 어떻게 썼고 하는 부분은 과감하게 넘어가도 되네.]
[그래도 됩니까?]
[서사라는 건 꼭 시간 순서대로 갈 필요는 없네. 이런 면접장에서는 상대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부터 바로 치고 들어가는 게 나을 수 있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자네가 처음 운을 떼면 면접관도 그에 따라 반응하게 될 걸세.]
태화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면접관인 강신재에게 말했다.
“면접관님. 답변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답변하세요.”
“그럼. 먼저 주요 스태프 섭외부터 설명하겠습니다.”
강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강신재는 태화가 방금 했던 발언이 마음에 들었다. 강신재는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태화가 시나리오를 어떻게 썼고 하는 부분이 궁금하지 않았다. 강신재가 궁금했던 부분은 실제 제작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실제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주요 스태프 선정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주요 스태프가 정해지지 않으면 작업이 진척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가 영화감독으로 이력은 미천하지만 제 주변엔 유능한 영화 스태프들이 많이 있습니다.”
태화는 프로듀서로 한재영을 섭외했고 그 이유에 관해서 설명했다. 태화의 설명을 들은 강신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서태화 감독님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유능한 스태프들이 <내 복권 내놔!>같은 초저예산 영화에 참여한 이유가 단지 좋은 시나리오와 한재영 피디의 역할 때문이라는 게 좀 이해가 되지 않네요.”
“거기엔 제가 진심으로 스태프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다가가요? 하지만 그건 서태화 감독님의 말일 뿐입니다. 진심이라는 게 어떤 증거를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고요.”
“제 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가 있다고요?”
“네. 바로 계약사항입니다.”
태화의 말에 강신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계약서를 스태프별로 작성했습니까?”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원칙적으로 옳지만…….”
태화는 강신재가 놀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초저예산 영화에 스태프별로 개별 계약을 한다는 게 좀 난센스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경우 그냥 구두로 계약한다.
게다가 태화는 영화 소개서에 이 부분을 적지 않았다. 강신재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게별 계약과 관련해선 영화 소개서나 자기소개서에 없던 데요?”
“네. 그 부분은 적지 않았습니다. 작품 자체의 소개와는 거리가 있으니까요.”
강신재는 태화의 답변에 살짝 놀랐다. 그래서일까? 강신재는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히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혹시 그 계약서 나중에라도 보여줄 수 있습니까?”
“네. 계약서를 스태프별로 2부씩 작성했으니까……. 저한테도 스태프별로 작성한 계약서 1부가 있습니다. 필요로 한다면 제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더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네. 하십시오.”
“그 계약서에는 특약이 있습니다.”
“특약이요?”
“네. N 분의 1 조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N 분의 1 조항?”
“그게 뭐냐면요…….”
태화의 설명이 이어지자 강신재는 집중했다. 사람마다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누군가는 정말 재밌게 이야기하는 반면 누군가는 정말 재미없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태화의 설명이 끝나자 강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언했다.
“음……. 인상적이네요.”
“…….”
“스태프를 투자자로 생각한 그 발상이 참 신선하면서도 좋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까?”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선이라…….”
“네. 스태프들을 설득하는데, 당신도 투자자라는 인식을 주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투자자이니 당연히 작품에 임하는 자세도 다를 거고요.”
“그렇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리는군요.”
“네?”
“여기 적혀 있는 스태프 중엔 제 눈에 익은 이름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 복권 내놔!> 스태프로 참여했다는 게 좀 놀라웠거든요. 물론 그 사람이 종종 저예산 영화에 참여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런 초저예산 영화까지 참여했을 거로는 생각 못 했습니다.”
태화는 강신재가 누굴 말하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강신재는 박지형 오디오 팀장을 지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신재가 모르는 측면이 있었다.
박지형이 <내 복권 내놔!>에 참여하기로 한 건 계약서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박지형은 태화 자체의 매력 때문에 작품에 참여했다. 하지만 태화는 여기서 굳이 이 내용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태화가 이 사실을 말해 봐야 역효과만 발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강신재의 질문 이후 다른 면접관의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른 면접관들의 질문은 강신재만큼 태화를 압박할 만한 질문들이 아니었다.
면접관들이 태화에게 관심이 있었던 사안은 박도봉 감독이 생각했듯 태화에 관한 검증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태화가 연출한 <내 복권 내놔!>는 이미 완성된 작품으로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에 제출된 상태였고 그 작품을 면접관들도 이미 본 상태였다.
<내 복권 내놔!>를 본 면접관들의 궁금증은 하나로 수렴되었다. 그건 바로 태화에 관한 관심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이 정도의 퀄리티를 낼 수 있는 사람. 도대체 그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강신재는 이러한 관점에서 태화에게 질문했고 태화는 그에 대해 적절하게 답변했다.
이윽고 태화는 면접을 마쳤다.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면접관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면접관들을 대표해서 강신재가 화답했다.
“오늘 면접 보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고생은요. 즐거웠습니다.”
“즐거워요?”
“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전 좋았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저에 관해서 관심 가져주시는 것도 좋았고요.”
#.
태화는 부성 국제 영화제 예심 면접을 마치고 나서 근처 바닷가로 향했다. 부성은 국제적인 해양도시이기도 한 곳이다.
태화가 해변에 도착하자 바다 내음이 코로 스며들었다.
[영감님. 주문진 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군요.]
[같은 바다라고 다 같은 게 아니네.]
[그러니까요.]
[강릉이 휴양도시라면 부성은 국제항구가 있는 항구 도시네. 도시의 규모나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태화는 모래사장에 들어가기 전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태화는 맨발이 된 상태에서 해변의 모래를 밟았다.
[그래도 모래는 주문진 해변이 최고네요.]
[허허. 그런가?]
[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그 부드러운 촉감은 최고라고 할 수 있죠. 조만간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주문진에 가고 싶구먼.]
[영감님. 꼭 가겠습니다.]
[뭐. 가는 건 좋지만, 그전에 결과가 좋아야 하네.]
[전에 영감님은 좋은 결과를 예상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네. 그리고 그 생각엔 조금도 변하지 않았네.]
[혹시 빨리 주문진 가고 싶어서 그냥 찔러보는 거 아닙니까?]
[허허허.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네.]
[영감님도 한 번 꽂히면 정말 못 말리는 스타일이시군요.]
[내가 전에 영화 일하려고 가출까지 했었다는 말하지 않았었나?]
[네. 했었습니다. 근데 영감님.]
[왜 그러나?]
[영감님은 아까 제가 면접 볼 때 뭔가 느끼신 거죠?]
[내가 수많은 작품을 연출하면서 수많은 연기자의 표정을 보아왔네.]
[그랬겠죠. 영감님이 연출한 작품 수는 전 세계를 찾아봐도 흔하지 않은 기록이죠.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연기자들은 여러 가지 감정들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다양한 안면 근육을 사용하게 되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런데 오랫동안 연기를 해온 사람들은 그런 티가 잘 나지 않는데 연기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배우들은 티가 나게 되어 있네.]
[영감님 말에 공감합니다. 연기자라면……. 어쩔 땐 평소에 잘 안 쓰는 안면 근육을 써야 할 때도 있죠.]
[태화 군. 아까 난 면접관들의 표정에 주목했었네. 사람의 표정엔 많은 걸 담고 있으니 말일세.]
[어쩐지…. 그래서 아까 제가 면접할 때 별다른 말이 없었군요. 면접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저런 말씀 하시더니.]
[실제 면접에서 내가 말을 아낀 건…. 자네가 잘하고 있었기 때문일세. 그래서 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로 했네.]
[그래서 저를 면접했던 면접관들의 표정을 살핀 겁니까?]
[그렇네. 면접관들은 연기자들이 아니네. 오랫동안 감정 훈련을 해온 연기자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네.]
[그 말은 면접관들의 표정에서 영감님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자네를 보던 면접관들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네. 그리고 자네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네.]
[그렇다면 영감님이 내린 결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