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51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감님 말에 동의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깨는 작품이라면 영화제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렇네. 태화 군. 극장은 기본적으로 상업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만. 영화제는 그렇지만도 않네. 기존의 상업성보다는 다양성을 평가의 우선 항목으로 고려하는 게 일반적이네.]
[그런 의미에서 <내 복권 내놔!>가 가능성이 있는 거군요.]
[그렇네. <내 복권 내놔!>는 다양성 측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많네. 특히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많네.]
영화는 크게 내용적 측면과 형식적 측면으로 구성된다. 내용적 측면은 내러티브이고 형식적 측면은 프레임에 담긴 영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씬에 원 씬 원 커트를 적용한 원칙은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네. 게다가 <내 복권 내놔!>는 일반적인 인식을 어느 정도 깨고 있네.]
[영감님이 말한 일반적인 인식은 롱 테이크에 관한 것이겠군요.]
[그렇네. 롱 테이크는 일반적으로 화면이 지루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내 복권 내놔!>는 그걸 깨고 있네. 자네의 무모하게 보였던 시도가 지금 빛을 보고 있는 것이네.]
태화는 잠시 <내 복권 내놔!>를 원 씬 원 커트로 촬영하는 걸로 결정했을 때를 생각했다. 촬영을 맡았던 이한철의 반대뿐 아니라 박도봉 감독도 반대했었다.
[영감님. 제가 고집을 부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처음엔 나도 자네의 고집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네. 왜냐하면 자네의 시도는 좋지만 그 결과가 너무 불확실했기 때문일세. 하지만 자네는 조금씩 자네의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했네.]
[저도 당시엔 약간의 오기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부성 국제 영화제가 <내 복권 내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네.]
[그 이유가 뭡니까?]
[자네는 영화계에서는 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인물일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인물이요?]
[그렇네. 자네는 이 작품이 장편영화 입봉작일세. 하지만 자네는 이전에 어떤 작품도 만들었던 경력이 없네. 정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지. 영화제 관계자로선 자네를 궁금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네.]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현재 자네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부성 국제 영화제에 <내 복권 내놔!>가 출품되는 것뿐이구먼.]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말게. 꼭 그렇게 될 걸세.]
#.
태화는 부성 국제 영화제에 <내 복권 내놔!>를 제출하고 나서 한동안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보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다고 그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일체 영화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지났고 태화는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여보세요.”
-서태화 감독님. 전화 맞죠?
태화는 전화를 건 상대가 자신을 서태화 감독이라고 지칭하는 걸 듣고 어디서 연락을 해왔는지 감이 왔다.
‘혹시…….’
순간 태화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태화는 잠시 심호흡하고 나서 전화를 건 상대에게 대답했다.
“네. 제가 서태화입니다. 실례지만 어디십니까?”
-네. 여기는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입니다.
태화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아. 네.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가 메일로 안내문을 발송해 드렸는데 혹시 보셨나요?
“아직 메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서태화 감독님 작품 <내 복권 내놔!>가 예심을 통과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그래서 면접 일정 관련해서 메일을 보내드렸습니다. 메일은 저희 쪽에 서류를 제출하실 때, 보내 주셨던 메일로 보냈습니다.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럼. 면접 스케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화는 전화를 끊고서 소리를 질렀다.
“와우!”
태화가 소리를 지르자 카페 ‘민들레’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태화에게 쏠렸다. 태화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현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카페 ‘민들레’ 사장 정소영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야. 무슨 일이야?”
“좋은 일이 있어서요.”
“좋은 일? 뭐 신나 보이기는 하더라. 근데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인데 그렇게 소리까지 질러?”
“그게…….”
태화는 정소영에게 방금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에서 연락이 온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정소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와. 정말 잘됐다. 소리 지를 만하네.”
“대표님. 미안합니다. 그래도 조용히 좋아했어야 했는데.”
“근데 조용히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니? 좋아할 때는 그냥 좋아하는 거지.”
“하하.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소영은 태화를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화도 정소영의 눈빛이 어떤 의미인 줄 알고 있었다.
정소영의 눈빛은 마치 자랑스러운 남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이야. 서태화. 정말 감독이 되는구나.”
“아직 결정된 건 없습니다.”
태화는 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소영은 태화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괜히 설레발 치면 안 되겠지. 그래도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이야. 서태화. 뭔가 일을 저지르는 거 아냐?”
“일을 저질러요?”
“영화제 가서 막 상 휩쓸고 그러는 거 아냐?”
“아니. 너무 설레게 하는 말하지 마세요. 아직 결정된 거 하나도 없습니다. 면접 통과도 해야 한다고요.”
태화의 말에 정소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펄쩍 뛰는 걸 보니 정말 그런 생각한 거 아냐?”
“아닙니다. 지금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태화는 현재 두 개의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나는 설렘이고 다른 하나는 차분함이었다. 그리고 태화는 자기의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함으로 수렴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
며칠 후.
태화는 부성시로 향했다. 태화가 부성시로 향한 이유는 면접 때문이었다.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은 당연히 부성시에 있었다. 태화는 자가용을 이용하기보다는 KTX를 이용하는 걸 택했다.
한재영은 태화를 배웅하기 위해서 KTX 역까지 따라왔다.
“태화야. 아직 내 제안 유효하다. 지금이라도 네가 같이 가자고 하면 갈 수 있어.”
“재영아. 네 제안 고맙다. 하지만 면접은 나 혼자 다녀올게.”
“왜?”
“그냥 혼자 차분하게 다녀오는 게 나을 거 같다.”
한재영은 더는 태화에게 보채지 않았다. 한재영은 태화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재영이 보기에 태화는 신중하게 면접에 임하고 싶어 했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라.”
“응. 그렇게 하마.”
태화는 KTX에 탑승하고 나서 두어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태화의 눈에 멀리 부성역의 모습이 보였다.
[태화 군. 다 왔구먼.]
[네. 영감님.]
[어떤가 기분이.]
[그냥. 덤덤하네요. 이미 비슷한 경험도 한번 해봤고요.]
[사람에게 경험이란 중요하네. 자네가 만약 공모전에서 면접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현재 심정이 어땠을 거 같은가?]
[아마도 엄청 긴장하고 쫄아 있는 상태였을 겁니다.]
[허허허. 그랬겠지.]
태화는 부성역을 나왔다. 태화는 역 광장을 가로질러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부성 국제 영화제 사무국은 부성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태화는 면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면접은 심층 면접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시간 안배가 잘 되어 있었다.
면접 대상자는 미리 통보된 시간에 맞춰 오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태화는 면접을 위해서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태화는 면접장에 도착하고 5분 정도 대기했다가 진행 스태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
“서태화 님.”
“네.”
“지금 면접장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태화는 진행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면접장으로 들어섰다. 면접장은 일반 면접장과 다르게 면접관 다섯 명이 면접자를 원형으로 둘러싸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면접관이 면접자를 둘러싸는 형식은 그 자체만으로 면접자에게 압박이 될 수 있었다. 태화도 순간 압박감을 느꼈다. 시각적으로 주는 효과가 꽤 컸기 때문이다.
[태화 군. 압박감을 느낄 필요 없네. 이 형식이 본질이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각적으로 주는 효과는 상당하네요.]
[시각적 효과. 아마도 그게 보이지 않는 일차 관문이라면 일차 관문일 걸세.]
[일차 관문이요?]
[그렇네. 감독은 때로는 배짱이 필요한 자리이기도 하니 말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이 발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영화감독은 단순한 창작자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걸.
태화는 면접관들을 향해 허리 숙여 정식으로 인사했다.
“영화<내 복권 내놔!>의 감독 서태화입니다.”
태화는 인사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태화가 자리에 앉자마자 면접관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태화의 첫 번째 질문을 던진 면접관은 강신재다. 강신재가 태화에게 질문했다.
“서태화 감독님.”
“네.”
“경력을 보니 전에 작품을 만들었던 경험이 전혀 없던데요? 심지어 단편영화 스태프로 일했던 경력도 없었습니다.”
“네. <내 복권 내놔!> 작품이 제 첫 작품이자 장편 입봉작입니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 서태화 감독님의 경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가 있는 거죠?”
태화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강신재를 보았다. 강신재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 군. 단순히 열심히 만들었다는 거로 답해서는 안 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잠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뤘다.
“면접관님. 잠깐만요.”
“왜 그러시죠?”
“잠시만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
“부성 국제 영화제 같은 권위 있는 영화제에……. 그것도 경쟁 부분에 출품을 위해서 하는 면접입니다. 제가 면접관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신중히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태화의 요청은 합리적이면서 정당했다. 강신재는 태화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면접 스케줄이 이미 짜여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로 인해서 면접 스케줄이 꼬여서는 곤란하겠죠.”
강신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태화는 강신재로부터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영감님.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 단순하고 뻔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한 건 아니겠죠.]
[그렇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중요하네.]
[중요하다고요?]
[그렇네. 단순히 첫 번째 질문이기에 중요한 게 아니네.]
[그럼 뭡니까?]
[잠시 내가 면접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을 해보았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