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50화
오창민의 판단은 현 상황에서 나름 정확했다. 현재 밴드 엔은 정체 국면이었다.
인디밴드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인디밴드가 처음에 데뷔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인지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인지도라는 것도 결국 인디밴드 음악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올라가는 게 대부분이다. 밴드 엔이 대중적인 인지도를 올리려면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맞는다. 메이저 자본이 밴드 엔을 키워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이 경우 메이저 자본과 밴드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한다. 심한 경우 밴드가 해체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메이저 자본이 원하는 밴드 멤버만 슬쩍 빼가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밴드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보통 메이저 자본이 원하는 멤버는 밴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오창민으로서는 태화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밴드 엔이 영화 음악에 참여하는 건 메이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수요자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실제로 특정 영화에 배경 곡으로 쓰였던 노래가 나중에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경우가 종종 일어나곤 했다.
오창민이 태화에게 말했다.
“어쨌든 감독님은 우리한테 영화 음악을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하지만 그 선택이 영화와 밴드 엔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떤 영화를 찾아봐도 한 밴드가 영화 음악 전체를 맡았던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밴드 엔의 미발표곡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군요.”
태화의 발언에 오창민은 한동안 태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화를 바라보던 오창민이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감독님이 방금 한 발언 진심이군요.”
“당연히 진심입니다.”
“이거 감독님에게 미안해지는군요. 전 감독님이 했던 발언에 관해서 의심했었습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 한 거로 생각했거든요.”
“괜찮습니다. 내가 오창민 님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
“저하고 오창민 님. 아니, 제가 밴드 엔을 알게 된 기간이 짧았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태화는 오창민의 심정을 이해했다.
[태화 군. 자넨 오창민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했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으로 느껴진 게 맞는가?]
[그렇습니다. 영감님. 이런 걸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거겠죠?]
[그렇네. 일단 자네와 오창민은 현재 처한 상황이 비슷하네. 두 사람 모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팀을 이끌고 있었고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하는 처지인 점에서 그렇네.]
[현재 처한 상황이 비슷하니 그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비슷할 수밖에 없죠.]
[어쨌든 서로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건 현 상황에서 나쁠 게 없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으니 서로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
[네.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태화와 오창민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영화 작업에 몰두했다.
#.
얼마 후.
태화는 오창민과의 음악 작업을 끝내고 바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마무리 작업은 사운드 앤 이미지에서 박지형 사운드 팀장이 담당했다.
태화가 사운드 앤 이미지에 도착하자 박지형이 태화를 크게 반겼다. 박지형은 태화를 사무실 문 앞까지 가서 맞이했다.
“감독님. 반갑습니다.”
“네. 박 팀장님. 저도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인사를 건네고 나서 박지형의 방으로 향했다.
“감독님. 그동안 무슨 일을 꾸미나 했더니 꽤 재밌는 계획을 세웠더군요.”
박지형은 그동안 태화나 한재영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박지형이 이렇게 한 이유는 <내 복권 내놔!>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한재영 피디님한테 들은 감독님의 계획은 꽤 섹시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괜찮은 생각입니다.”
“어떻게든 뚫고 나가야 하니까요.”
태화는 잠시 박지형을 바라보았다. 박지형은 태화가 발언할 때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부성 국제 영화제에 출품해서 성과가 난다면 그다음을 도모해 볼 수도 있겠죠.”
태화의 말에 박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언했다.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보통 이럴 때 현실의 벽 앞에 멘탈이 나가거든요. 그래서 다른 걸 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포기하게 되겠죠.”
“맞습니다. 아무리 자기의 작품에 애착을 가진 감독이라도 계속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면 포기하게 되더군요.”
박지형의 말은 영화계 현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감독이라도 자본 앞에 힘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 현실.
박지형은 그동안 <내 복권 내놔!> 외에도 저예산 영화 작품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자신이 참여한 작품 중 극장에 개봉된 영화는 그중 한두 편밖에 되지 않는다.
그 극장 개봉이라는 것도 일주일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기간의 개봉에 불과했다. 박지형은 이런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태화는 뭔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길 바랐다.
배급사를 섭외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저예산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박지형은 태화가 취하려는 방식이 나름 괜찮다고 판단했다.
태화와 박지형, 두 사람은 박지형의 방에 도착했다.
#.
박지형은 태화가 오기 전 사운드 작업을 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밴드 엔의 음악이 적절한 부분에 배치되었지만 기존 사운드와의 조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때 필요한 게 사운드 믹싱 작업이다. 사운드 믹싱 작업은 기존의 각종 사운드와 음악 등을 전체적으로 조율해서 맞춰가는 작업 과정이다.
박지형 사운드 팀장은 능숙하게 사운드 믹싱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박지형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감독님. 이거 좋은데요?”
“괜찮죠?”
“네. 감독님 설명만 듣다가 실제로 귀로 들으니까 알겠네요. 감독님이 영화 음악을 기대해도 괜찮다고 한 이유를 말이죠.”
“…….”
“무엇보다 한 밴드의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와 느낌이 다른 곡들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각기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시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물론 운이 좋아서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네?”
“내가 아는 감독님이라면 그냥 운에 맡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
“아마도 감독님은 이 밴드를 만나기 전 치밀하게 준비했을 겁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박지형의 발언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팀장님은 제 속을 다 들여다본 듯합니다. 하지만 운이 따랐던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박지형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태화를 바라보았고 태화도 이를 잘 느끼고 있었다.
“밴드 엔의 미발표곡이 여러 가지 분위기를 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박지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언했다.
“하지만 그 운이라는 것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지는 않죠.”
“그렇지만 저한테 운은 사운드 믹싱 작업을 박 팀장님이 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태화의 말에 박지형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거 감독님의 입담이 갈수록 세지는 것 같은데요?”
“입담이라기보다는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박 팀장님 실력이야 검증된 거 아닙니까?”
태화의 말처럼 박지형의 실력은 어느 정도 이 분야에서 검증이 된 스태프다. 박지형의 손을 거치자 전반적인 영화의 퀄리티도 올라갔다.
영화는 크게 보면 연속된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이다. 사운드 부분이 정리되니 영화의 퀄리티도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태화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 팀장님. 매우 좋습니다.”
#.
태화는 자기 방 책상에 놓인 모니터를 한동안 응시했다. 모니터 화면엔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 출품에 관한 안내 페이지가 떠 있었다.
태화는 안내에 따라 필요한 걸 온라인으로 제출하면 된다. 온라인 제출에 필요한 건 두 개다. 하나는 작품 소개서이고 다른 하나는 작품이 담긴 동영상 파일이다.
작품 소개서에는 영화의 시놉시스와 장르 특징 등을 기술하는 부분과 감독의 소개에 관한 부분으로 나뉜다. 태화는 이 부분들에 관해서 아주 성실하게 작성했다.
태화는 온라인 접수에 필요한 파일을 제출했다. 제출이 완료되자 모니터 화면에 제출 완료 메시지가 떴다.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 작품 제출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태화는 제출 완료를 확인한 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영감님. 이번에도 활이 시위에서 떠났습니다.]
[그렇군. 저번 공모전에 이어 두 번째 활일세.]
[영감님. 이런 말 하기는 좀 뭐하지만….]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네.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걸 알지만 궁금하긴 하군요.]
[이번에는 저번보다는 명확하게 이야길 할 수 있을 거 같네.]
[저번보다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요?]
[그렇네. 그런 배경엔 완성된 작품이 나왔기 때문일세. 저번 공모전에선 단지 설계도만 가지고 판단해야 했네. 설계도를 보고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그 해석의 범위가 너무 넓네. 즉 한계를 정할 수가 없다고 할 수 있네.]
[영감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에 작품을 연출해보니 확실히 알 수 있겠더군요. 시나리오라는 설계도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어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네가 그걸 느꼈다면 또 하나의 성과라면 성과일세.]
[영감님.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올 거로 생각하세요?]
[자넨 이번이 두 번째임에도 꽤 불안한 모양일세.]
[두 번째라고 하더라도 활이 노리는 과녁이 다르니까요.]
[그러면 대답하겠네. 자네의 입봉작 <내 복권 내놔!>는 이번에 좋은 결과가 있을 걸세.]
[영감님답지 않은 발언이군요. 영감님은 좀 보수적으로 결과를 보지 않으셨나요?]
[내가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건 이 작품이 많은 강점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세.]
[많은 감정이요?]
[그렇네. 그 많은 감정 중 최고는 바로 제작비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발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작비요? 그게 최고의 강점이라고요?]
[그렇네. 영화는 관객이나 심사위원이나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창작물로 인식하고 있네. 그리고 제작비가 바로 작품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걸로 인식하고 있네. 하지만 <내 복권 내놔!>는 이러한 인식을 깨는 작품이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퀄리티는 상당히 높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