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9화
태화의 말을 들은 이우섭과 김현석의 얼굴엔 동시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 그 표정 뭐지? 뭐가 좋다고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거야?”
태화의 물음에 이우섭이 대답했다.
“형이 저희를 생각해 주는 마음 때문에요. 솔직히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
“그런데 오늘 이렇게……. 그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저희를 불렀다는 건……. 그만큼 저희를 인정해 준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절로 나왔어요. 그건 현석이도 마찬가지일걸요.”
김현석이 이우섭의 말을 받았다.
“우섭이 형이 맞아요. 솔직히 저하고 우섭이 형. 그동안 좀 불안했거든요.”
태화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불안했다고?”
“네. 그 불안감은 우리 영화가 극장에 개봉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럼?”
“우리가 소외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요.”
“소외?”
“네. 저하고 우섭이 형은 어차피 현장 인력에 더 필요한 인력이잖아요.”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이 가졌던 소외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후반작업이 시작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갑자기 사라진 듯한 느낌.
후반 작업은 주로 감독과 후반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스태프가 한다. 그래서 실제 연출부 중 일부는 프로덕션 단계에서 후반 작업으로 넘어갈 때 상당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점에 관해서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도 미처 신경 쓰지 못했어.”
이우섭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형이 사과할 일도 아닙니다. 그냥 상황이 그런 거지.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내가 영화 음악에 매달리는 동안 너희들은 소외감과 싸우고 있었어. 어찌 보면 너희 두 사람도 큰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걸 파악했어야 했다.”
솔직히 태화가 이렇게 발언했지만, 이우섭과 김현석을 위해서 태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태화가 이런 발언을 한 건 리더로서의 공감 능력 때문이었다.
태화는 누구보다도 소외감이 어떤 감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외감이 사람을 얼마나 작아지게 만드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리더가 당장 뭘 해줄 수는 없지만 공감을 해준다는 사실만으로 구성원은 리더에게 호감을 느끼고 따르게 된다.
“너희들을 불러서 맥주라도 한잔했어야 했어.”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이 발언했다.
“솔직히 그 부분에선 내 잘못이 크다. 내가 좀 더 신경 썼으면 됐는데……. 알다시피 나도 정신이 좀 없었거든. 게다가 배급사를 알아보는 것도 결과가 좋지 않았었고.”
한재영의 발언에 이우섭이 발언했다.
“재영이 형. 잘못 없어요. 형도 어떻게든 극장 개봉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거잖아요.”
“그렇게 이해해 주니 고맙다.”
“형도 고생 많았어요.”
자칫 이상하게 흐를 수 있었던 대화의 분위기는 태화의 발언으로 훈훈하게 변하고 있었다.
[태화 군. 자네의 앞선 발언은 아주 효과적이었네. 대화에는 두 가지가 중요하네.]
[두 가지요?]
[그렇네. 하나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타이밍이네. 자네의 발언은 내용과 타이밍 측면에서 아주 적절했다고 할 수 있네.]
[우섭이하고 현석이가 소외감을 느꼈다고 했을 때 정말 아차 싶더라고요.]
[자네가 발 빠르게 대화를 이끌어 간 덕에 잘 마무리가 되었네. 어떤 조직이든 작은 틈에 의해서 결국 무너지는 것이지. 자네가 만약 이우섭과 김현석의 말을 단순히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했다면 틈은 순식간에 확 벌어졌을 것이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방금 한 발언을 꼭 씹어보았다.
[영감님. 말이 맞네요. 만약 제가 너희들보다 내가 훨씬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면 저와 저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틈이 벌어졌을 겁니다.]
#.
어쨌든 태화를 포함한 네 사람 사이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태화는 이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태화가 발언을 이어갔다.
“아직 오늘 중요한 결과를 말하지 않았어.”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웃음이 나왔다. 태화도 이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지금껏 오늘 만남의 주제를 잊어버린 채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한재영은 이우섭과 김현석처럼 오늘 협상의 결과를 모르고 있었다. 김현석이 궁금한 듯 한재영에게 물었다.
“재영이 형도 결과를 모르고 있었어요?”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태화가 나한테 결과를 말해주지 않았어.”
“그럼. 결과를 최초로 듣는 거네요?”
“야. 근데 너는 불안하지 않아?”
“전, 태화 형 믿어요. 뭐라도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요?”
김현석이 태화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형. 그렇죠?”
김현석은 현재 태화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건 김현석의 절실한 마음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태화도 김현석의 이런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오늘 협상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이 세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태화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화의 음악을 담당할 뮤지션은 밴드 엔이다.”
이우섭이 태화에게 물었다.
“밴드 엔이라. 좀 생소한데요? 혹시 인디밴드인가요?”
“그래. 인디밴드야. 아직 많이 유명하지는 않은 밴드지. 하지만 이 밴드의 음악이 우리 영화의 분위기와 맞아. 그래서 이 밴드와 접촉했고 오늘 협상을 완료했어. 협상 결과는 밴드 엔이 우리 영화의 음악 부분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거야.”
태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재영이 발언했다.
“나도 태화의 말을 듣고 나서 밴드 엔의 음악을 들어봤어. 음악 스타일이 귀에 팍팍 꽂히더라고. 섭외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태화야.”
“왜?”
“밴드 엔이 그냥 우리 영화의 음악에 참여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여건상 우리가 저작권료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있는 거지?”
한재영의 물음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건이 붙었어. 하지만 그 조건은 내가 제안한 조건이야.”
“네가 제안한 조건?”
“그래. 우리 영화 <내 복권 내놔!>가 부성 국제 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하게 되면 공연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어.”
한재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공연? 무슨 공연?”
“일단 GV 때 공연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태화의 발언에 한재영은 깜짝 놀랐다.
“뭐?”
“왜 그렇게 놀라?”
“안 놀랄 수가 없잖아. 영화제에서 그것도 GV 행사에서 밴드가 공연한 적은 거의 없어.”
“하지만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잖아.”
“…….”
“우선 30주년을 맞이하는 부성 국제 영화제에서 뭔가 화제성을 만들어낼 수 있어. 그리고 그 화제성이 밴드 엔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겠지.”
“나도 태화, 네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주최 측에서 네 생각을 얼마나 이해해 주느냐에 있어.”
“알아. 주최 측이 내 생각을 이해해줘야 GV 행사 때 밴드 엔이 공연할 수 있도록 하겠지.”
“그러니까.”
“하지만 재영아, 우리는 한 가지 주요한 점을 놓치고 있어.”
“주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부성 국제 영화제의 예심을 통과하는 거야.”
태화의 말에 한재영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듣고 보니 그렇네.”
“예심 통과 이후의 상황에 관해서 상상하는 건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 상상의 영역이야. 이제는 상상의 영역을 현실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해.”
태화와 한재영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현석이 발언했다.
“태화 형. 당연히 이번에도 뭔가 그림이 만들어지겠죠?”
김현석의 말투는 약간 들떠 있었다.
“현석아. 좀 흥분한 것 같은데?”
“네. 비록 배급사를 통한 극장 개봉은 힘들어졌지만, 부성 국제 영화제에 그것도 경쟁 부분에 <내 복권 내놔!>가 출품된다면 그것도 큰 의미를 지니잖아요.”
“…….”
“영화제에 게스트로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 처음 경험하는 일입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김현석은 태화의 발언을 듣고 잠깐 입가에 웃음이 퍼졌다.
“어쨌든 영화제에서 성과가 난다면 극장 개봉도 꿈만은 아니잖아요.”
태화는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표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모였다.
그건 바로 열망이었다.
“<내 복권 내놔!>는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인생작이 될 거 같다.”
#.
다음 날.
태화는 밴드 엔의 리더인 오창민과 함께 바로 <내 복권 내놔!> 음악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의 진행은 영화를 보면서 바로 오창민이 멤버들과 선곡한 노래를 영상에 입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오늘 작업하는 공간은 밴드 엔의 녹음실에서 진행됐다. 밴드 엔은 리더인 오창민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한다.
태화는 오늘의 작업을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서 <내 복권 내놔!> 복사본을 오창민에게 건넸다. 오창민과 밴드 엔의 멤버들은 <내 복권 내놔!> 작품을 보면서 자신들의 음악을 영상과 매칭을 시키면서 오늘 작업을 준비했다.
그 덕에 오늘 작업은 매끄럽게 진행이 되어갔다. 태화도 작업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오창민 님.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 준비가 꽤 잘 된 듯합니다.”
“우리 밴드의 음악만으로 곡을 구성했으니까요. 만약 다르게 작업을 진행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겁니다.”
보통 영화 음악은 음악 감독으로 섭외된 스태프가 여러 가지 노래 중 선곡하면서 이루어진다. 해당 장면과 어울리는 곡을 선곡하다 보면 여러 뮤지션의 음악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내 복권 내놔!>의 음악 작업 방식은 이러한 방식과는 달랐다.
저작권료 때문이지만 태화는 영화<내 복권 내놔!>의 모든 음악을 밴드 엔에 전적으로 맡겼다. 이 때문에 실제 음악 작업에 걸리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태화가 오창민을 보며 말했다.
“근데 미리 선곡해 온 음악을 들어보니 미발표된 곡도 보입니다.”
“네. 선곡을 하다 보니 기존에 발표되었던 곡만으로는 좀 부족하더라고요. 어떻게 들으셨나요?”
“전 좋았습니다. 신선하기도 했고요. 몇몇 곡은 밴드 엔의 기본적인 분위기하고는 다르더라고요.”
실제로 밴드 엔은 거칠고 와일드한 분위기의 노래가 주류였지만 미 발표곡은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의 노래도 몇 곡이 있었다.
“영화 음악은 우리 밴드에게도 기회라면 기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