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7화
태화는 이채연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 간 대화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타이밍이다. 상대가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해야 하는 사안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때도 있다. 태화는 전략적으로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걸 택했다.
태화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이채연뿐만 아니라 밴드 엔의 다른 멤버들도 태화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태화 군. 상대가 가볍게 질문한 내용에 이렇게 대응하는 건 뭔가 생각이 있어서겠지?]
[그렇습니다. 영감님. 이제부터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겠다는 신호를 주는 겁니다.]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하지만 단지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신호를 주는 것만으론 부족하네. 자칫하면 상대에게 나쁜 이미지만을 심어줄 수 있네.]
[알고 있습니다. 웃자고 한 말에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뭔가 준비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태화는 박도봉 감독에게 자기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생각을 차분하게 들었다.
[한번 고려해 볼 만한 생각일세.]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 오히려 이채연이 제게 한 질문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어찌 됐건 이채연은 장난삼아 한 말이지만 제 생각을 말할 수 있게 계기를 만들어준 거니까요.]
[그렇네.]
생각을 정리한 태화가 이채연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밴드 영입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네? 정말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멤버는 직접 음악을 하는 멤버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저는 밴드 엔의 객원 멤버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객원 멤버요?”
“네. 그게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쓰는 방법입니다.”
그때였다. 태화와 이채연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던 오창민이 입을 열었다.
“감독님 제안. 흥미롭군요.”
“그런가요?”
“그 제안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럼. 설명해 드리기로 하죠.”
태화는 이번에는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여기서도 태화가 뭔가 시간을 끄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면 신중함보다는 답답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감독으로서 밴드 엔의 객원 멤버로 참여하려고 합니다.”
오창민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감독으로 참여한다라. 이유가 뭐죠?”
“너튜브나 각종 자료를 봐도 밴드 엔은 제대로 된 뮤직비디오가 없더군요.”
“…….”
“제가 객원 멤버가 된다면 밴드 엔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뮤직비디오라.”
오창민은 태화의 대답에 흥미를 보였다. 오창민이 바로 밴드 엔의 멤버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오창민의 질문에 김우진이 먼저 대답했다.
“뭐. 나야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우리도 뮤직비디오가 필요하긴 하잖아.”
오창민은 김우진의 대답을 들은 후 시선을 채성관에게 돌렸다.
“성관아. 네 생각은 어때?”
“나도 우진이 생각과 같아. 뭔가 임팩트 있게 대중들한테 호소할 필요가 있지.”
오창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채연에게 이동했다. 이채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앞서 말한 두 사람과 의견이 같아.”
오창민은 이채연의 의견을 들은 후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나나 멤버들은 일단 감독님의 제안에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실력이겠죠. 안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이 좋아도 그걸 현실화시킬 수 있는 건 실력이니까요.”
오창민의 발언에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시간을 좀 더 낼 수 있습니까?”
“시간이요?”
“그렇습니다. 제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 할 거 아닙니까?”
오창민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태화에게 물었다.
“어떻게 실력을 확인시켜 준다는 겁니까?”
태화가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USB 메모리를 꺼냈다.
“제가 이번에 만든 작품입니다. 밴드 엔의 음악이 필요한 바로 그 작품이죠.”
태화는 <내 복권 내놔!> 담긴 USB 메모리를 오창민에게 건넸다. 오창민은 태화가 건넨 USB 메모리를 받았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죠?”
“자신감 여부를 떠나서 전 절실합니다.”
“절실하다?”
“네. 이 작품에 수많은 사람의 열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 열정이 헛수고가 되면 안 되니까요.”
“그렇더라도 그건 감독님 사정입니다. 만약 이 작품이 별로라고 판단한다면 더는 없습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좋습니다. 그럼. 감독님의 작품 보도록 하죠.”
오창민은 태화에게서 받은 USB 메모리를 함지훈에게 건넸다.
“형. 지금 여기서 볼 수 있죠?”
“그럼.”
#.
밴드 엔의 멤버들과 함지훈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함지훈이 태화가 건넨 USB를 가게에 있는 노트북에 꽂았다.
함지훈은 파일명 <내 복권 내놔!>를 마우스로 더블 클릭했다. 그러자 영화<내 복권 내놔!>가 플레이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밴드 엔의 멤버들이 노트북 화면에 집중했다. 태화는 밴드 엔 멤버들과 함지훈의 모습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태화 군. 수고했네. 활이 시위를 떠났구먼.]
[영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인가?]
[밴드 엔이 저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난 받아들일 거로 보네.]
[꽤 자신이 있으시군요. 그 근거가 뭡니까?]
[자네와 밴드 엔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일세.]
[이해관계 일치요?]
[그렇네. 자네는 영화에 사용할 음악이 없고 밴드 엔은 현재 제대로 된 뮤직비디오가 없는 상황일세. 하지만 가수가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려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네.]
[네. 뮤직비디오도 그 제작비용이 만만치 않죠. 요즘은 수억 원이 후딱 넘어가니까요.]
[그렇네. 어쨌든 자네와 밴드 엔은 서로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네. 협상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네.]
[네.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대화의 흐름이 저한테 꽤 유리하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알고 있네. 바로 이채연 때문이지.]
[네. 이채연의 돌출 발언이 제게는 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채연의 발언 때문에 제가 자연스럽게 <내 복권 내놔!>를 밴드 엔 멤버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태화는 밴드 엔의 반응을 살폈다. 밴드 엔은 <내 복권 내놔!>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처음 영화가 시작될 무렵엔 서로 잡담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태화로서는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영화를 보면서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작품의 몰입도가 높다는 의미다.
#.
얼마 후.
밴드 엔의 멤버들과 함지훈은 <내 복권 내놔!> 감상을 끝냈다. 영화가 끝난 후 이들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화 군. 저들의 반응을 보니 둘 중 하나구먼.]
[모 아니면 도겠죠.]
[맞네. 말을 잃을 정도로 아니면 말할 가치도 없는 그런 의미일 걸세.]
침묵을 뚫고 오창민이 포문을 열었다.
“성관아. 너 먼저 말해봐.”
채성관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발언했다.
“작품은 괜찮았어. 스토리도 재미가 있었고.”
채성관이 시선을 태화에게 돌리며 물었다.
“감독님. 이 작품 저예산으로 만들었다고 지훈이 형한테 들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 제작비로 만든 영화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와. 어떻게 그 돈으로 이렇게 만들 수가 있죠?”
태화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발언했다.
“아까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어떤 말이요?”
“이 작품에 수많은 사람의 열정이 녹아들어 있다고 한 말이요.”
“…….”
“제가 방금 한 말은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전 그들의 열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태화의 대답을 마치자마자 이번에 김우진이 발언했다.
“내 의견은 성관이하고 비슷해요. 영화도 재밌게 봤고요. 근데 정말 놀랍긴 했어요. 그 정도의 저예산으로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김우진의 발언에 이어 오창민이 태화에게 물었다.
“감독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네. 물어보세요.”
“어떻게 저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습니까?”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았을 거 같아서요.”
오창민의 이 질문은 밴드의 리더로서 태화에게 묻는 말이었다.
“아마도 함지훈 대표님은 제가 스태프들과 맺은 계약 내용을 모를 겁니다.”
“감독님. 계약서도 만드셨나요? 보통 이런 저예산 영화는 계약서 같은 거 잘 안 만들잖아요.”
오창민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지인이 영화 스태프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창민은 영화계에 대해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보통 잘 안 만들죠. 네. 그런데 전 계약서를 만들었고 스태프와 개별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누군가는 얼마 안 되는 돈. 무슨 계약을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성의다.
“처음에는 같이 일하는 피디도 말리더군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
“하지만 이런 방법이 아니면 제 진심을 전달할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눈으로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내 생각대로 진행했습니다.”
오창민은 태화의 답을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감독님의 진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군요.”
“그렇죠. 제 진심을 알아보고 따라주었던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태화와 오창민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태화 군. 오창민이 자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구먼.]
[네. 본인도 어쨌든 밴드 엔의 리더이니까요.]
[그렇네.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리더는 숙명을 떠안게 되지. 그 숙명이란…….]
[결국 조직을 잘 이끄는 것이잖아요.]
[그렇네. 그리고 리더가 그 조직을 잘 이끌기 위해선 조직 구성원이 그 사람을 리더라고 인정해야 하네.]
[그래야 팔로십이 생겨나잖아요.]
[그렇네. 그리고 자네는 오창민보다 큰 조직을 이끌었던 리더일세. 오창민으로선 자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네.]
사람을 만나 무언가를 협상하다 보면 변수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변수를 가능한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최대한 자료를 모으고 전략을 짜게 된다. 태화도 밴드 엔과의 협상에서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협상엔 언제나 변수가 나오게 마련이다.
오늘 협상에서 최대의 변수는 오창민의 태화에 대한 태도 변화였다. 오창민이 처음 태화를 만났을 땐 태화는 그저 외모가 출중한 영화감독이었다.
-저렇게 잘생긴 영화감독이 있었나?
여기에 다른 걸 보태면 좀 뻔뻔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태화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작비로 장편영화를 완성한 감독이었고 밴드 엔의 음악을 자신의 영화에 갖다 쓰려고 하는 인물이었다.